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80화
정적
부올 백작이 독일연방의회에서 온 힘을 다하며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와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차 맛이 좋네요.”
“그렇군요.”
나는 엘리자베트 양을 만나고 있었다.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그녀가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약혼식까지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네! 제가 여기저기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해서 약혼식 전에 오스트리아를 조금 둘러보고 싶어서요.”
“그러시군요.”
지난번에 러시아와 서방국가들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유럽 전역에 알렸던 파티 이후로 거의 2년 만에 재회하는 것이었다.
‘아니지……. 전쟁 중에 또 일 년이 지났으니 3년쯤 지난 것인가?’
엘리자베트 양은 올해로……. 몇 살이었지?
[열넷쯤 되었을 걸세.]
‘그럼…….’
내년이나 내후년쯤엔 성인식을 올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슬슬 정말로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으나 아직은 그렇게 위협적이진 않았다.
어차피 사람 일이라는 것이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니 그녀의 마음이 바뀐다거나 어머니께서 내게 두손 두발을 다 드시며 항복할 수도 있잖은가?
[자네만 모르는 것 같군.]
‘뭘요.’
[아닐세, 일이나 하게.]
영감님의 말에 괜스레 불안감이 생겼다.
“흠……. 엘리자베트 양.”
“네?”
“영애께서는 혹시 마음에 둔 남성분이나……. 사모하시는 분이 계신지요?”
“……?”
엘리자베트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그 옆에 계시던 영감님은 한숨만 푹푹 내쉬셨고, 말이다.
[자네는 어떤 때는 든든하다가도 이럴 때는 내 기대감을 여지없이 박살 내버리는군.]
‘원래 저 나이대 애들은 마음이 갈대 같아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하는 법입니다.’
[경험담인가?]
‘노코멘트하겠습니다.’
[그렇군. 그럼 지난번에 자네가 어렸을 적 중학교란 곳에서 만난 수빈이라는 여인과는…….]
‘아니, 지금 수빈이가 왜 나와요!’
영감님은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개인의 사생활이라든지 개인정보 같은 것을 잘 모르시는듯했다.
그러니 이렇게 내 옛 기억을 뒤지시며 나를 놀리시는 것이겠지.
‘아무튼! 걔랑은 진즉에 끝났어요!’
[아무렴. 누가 뭐라 했는가? 본인은 그저 자네가 그 수빈이라는 여인에게…….]
‘아, 좀!’
내면에서는 영감님과 아웅다웅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니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의미 모를 질문을 던지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폐하.”
“으, 응? 부르셨습니까?”
“제가 어렸을 적부터 시골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랐던 건 맞는데, 아무에게나 말을 걸 정도로 상냥한 성격은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처음 알았군요.”
영애는 턱을 괸 채로 앞에 놓인 과자를 하나 집더니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내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니 괜한 걱정 마세요.”
“……?”
내가 뭘 걱정한다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되었으나 그냥 과자나 받아먹었다.
그 후로도 종종 영애와 만나 빈 시내를 돌아다니거나 티타임을 가지는 등 함께 시간을 보냈다.
딱히 그녀에게 관심이 생겼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나 때문에 아무런 연관도 없는 타국에 온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녀를 배려하여 그런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가 이성으로 느껴진다기보다는 그냥 여동생이 하나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도 사촌 관계이니 동생이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잖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며 그녀를 대하는 것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편해졌다.
살면서 여동생은커녕 가족이라고 할 만한 이들도 없었지만 그래도 뭔가 안정감이 생긴다고 해야 할까?
그날도 평소처럼 엘리자베트가 내 집무실에서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책을 읽던 와중이었다.
“폐하.”
“왜.”
“폐하께서는 사교성이 좋으신 것 같아요.”
“내가? 나 싫다는 사람 많아.”
“하지만 제가 본 사람 중에는 폐하를 싫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던걸요.”
매일같이 듣는 입에 발린 말이었지만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었기에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아부가 늘었는걸 시씨?”
“제가 왜 아부하겠어요?”
“음……. 나한테 잘 보이려고……?”
“제가 폐하께 잘 보여서 뭐가 좋은데요.”
“…….”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하긴……. 나한테 잘 보일 이유가 없지.’
그렇다는 건 조금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겉치레나 아부성 발언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건데…….
‘사람들이 날 좋아한다고?’
이것 역시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당장 바흐 남작만 하더라도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을 대신에 하여 갈려 나가는 중이었고, 이전에 일하던 공작 역시 내 밑에서 한창 갈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전선에 나가 있는 일선 장교들 역시 전쟁 때문에 내게 불만이 많을 것이었다.
[……정말 자네의 사고방식은 종잡을 수 없군.]
‘뭐가요.’
[자네는 언제나 일을 맡기면서도 보상은 확실하게 해줬잖은가.]
‘당연한 거니까요.’
[세상에는 그런 당연한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네, 그런 점에서 미뤄보면 자네는 제법 훌륭한 고용주라고 할 수 있지.]
‘오……. 칭찬입니까?’
[……그래, 칭찬일세.]
영감님은 한숨을 내쉬시고는 말을 이어가셨다.
[자네는 지금 잘하고 있네.]
‘제가 좀 알아서 잘하는 편입니다.]
[…….]
‘그럼 아닙니까?’
[내가 아니라고 하면 자네는 믿을 건가?]
‘뭐……. 영감님 말씀이면 듣긴 할 겁니다.’
[으휴…….]
영감님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폐하, 바깥 날씨가 참 좋네요.”
“그런가? 난 잘 모르겠군.”
그녀의 말에 바깥을 돌아보니 풍경이 좋긴 했다.
애초에 궁전 자체가 풍경 좋은 곳에 만들어졌으니 그런 것이겠다만…….
“흠…….”
이렇게 바깥을 돌아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예전에 밖을 돌아다니다가 칼에 맞은 뒤로는 어지간하면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으니 밖에서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매일 서류 더미에 파묻혀서 일하다가 이따금 밖에서 사람들 구경이나 하는 게 내 휴식이고 여가생활이었다.
“이런 날에는 밖에서 산책하면서 카페나 살롱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도 하면 좋을 것 같네요.”
“그럼 그리하게.”
“…….”
그녀는 같이 산책하자는 듯이 말을 꺼냈다.
내가 그걸 어찌 아느냐고?
조금 전에 말 한마디 했더니 그녀가 내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기에 그녀의 싸늘한 시선에도 나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할 일이 바빠서 어려울 것 같은데……. 어머니께 말씀드릴 테니 둘이서 같이 다녀오는 건 어때?”
“이모님과 산책은 좀…….”
“흠……. 그건 그렇네.”
그녀가 약혼식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넘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머니는 저기압을 유지하셨다.
오죽했으면 평소에는 어머니가 뭐라 하건 밖을 쏘다니며 제멋대로 굴던 내 형제들과 어머니보다 사냥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마저 어머니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둘의 사이는 좋다 나쁘다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엘리자베트가 날 꼬셔서 제 언니를 제치고 황후 자리를 꿰차려 한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봤으나 이미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신 어머니께서는 남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께서는 약혼식에 앞서 신부수업을 빙자하며 엘리자베트를 괴롭혔고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엘리자베트가 나와 시간을 보낸다는 핑계로 집무실을 드나드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어머니께서도 자기를 안 건드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일에 몰두하는 것보다는 바깥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던 엘리자베트는 이런 생활에 답답함을 느끼며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네?”
“지금 처리해야 할 것이 많아서 안 될 것 같은…….”
“폐하께서 잠시 쉬신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것은 없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아니, 내가 없으면 안 돼.”
“왜요?”
“그야…….”
막상 설명하려고 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평소에 출근하던 것처럼 매일 기계적으로 일만 했던 것에 가까웠다.
보고가 올라오면 적당히 신료들과 논의하여 일을 처리하거나 별도의 조사를 명령했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서 바로잡게 했다.
이렇게 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내가 왜 일하는 거지?’
영감님에게 답을 물어보려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조금 전까지 옆에 계시던 영감님이 안 보였다.
‘영감님? 어디 가셨어요?!’
몇 번이고 영감님을 불러봤지만 동네 마실이라도 떠난 것인지 도통 대답이 없으셨다.
아니, 그냥 대답을 회피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영감님은 종종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준답시고 이런 식으로 사라지곤 하셨으니 말이다.
“으음…….”
“폐하,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오늘은 좀 여유롭게 보내시는 게 어떨까요.”
“여유……?”
전장에서는 군인들이 그리고 산업현장에서는 노동자들이 피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데, 내가 여유롭게 지내서야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 비한다면야 지금 내가 일하는 것은 고생 축에도 못 끼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바쁘게 일하는데, 나만 쉴 수는 없지.”
“모두 폐하처럼 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니 또 반박할 말이 없었다.
* * *
발칸의 원정군은 첫 만남부터 삐걱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잘 어울리며 서로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래글런 남작의 말실수는 잘 고쳐지지 않았지만…….
“……그러니 저 프랑스 놈들을 박살 내기 위해서는 키예프로 진군하여 저들의 식량 생산지를…….”
“크흠, 프랑스가 아니라 러시아입니다.”
“아, 미안하네! 나이를 먹다 보니 자꾸 헛소리하게 되는군…….”
“괜찮습니다.”
래글런 남작은 이따금 헛소리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리 나쁜 지휘관은 아니었다.
웰링턴 공작의 휘하에서 복무했던지라 어느 정도 대세를 읽을 줄 아는 능력도 갖췄고 여러 장교와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사교성도 가진 사람이었다.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키예프? 그러지 말고 발칸에 있는 러시아의 지원국들을 단죄하고 바르나에서 배를 갈아타고 곧장 세바스토폴을 공격하는 것이 좋아 보이는구려.”
“……듣기로는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흑해함대의 주둔지로 단단한 요새 도시라고 알고 있는데……. 이곳을 공략하시겠다고요?”
“그렇다네, 단번에 세바스토폴을 공략하여 적의 항전 의지를 꺾어놓을 생각이지!”
“…….”
래글런 남작의 말에 보스케 장군의 전투 의지가 대번에 꺾여 나갔다.
지금 연합군이 승기를 잡고 영국함대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러시아의 흑해함대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거기에 그들은 세바스토폴이라는 요새에 틀어박혀 있으니 그 모든 방해물을 뚫고 도시를 함락시키기란 참으로 힘들어 보였다.
보스케의 얼굴이 구겨진 것을 본 래글런 남작은 넉살 좋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허허, 왜 그런 표정을 짓는가? 설마 내가 세바스토폴에 직접 상륙할 것이라고 여긴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니 다행이로군요.”
“하하하,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세바스토폴에 전 병력을 투입할 것 같았는가? 예끼 이 사람아!”
래글런 남작의 웃음소리에 보스케 장군도 긴장을 풀며 그에게 물었다.
“하하하……. 제가 잠시 장군을 오해했던 모양이로군요. 하긴 제가 생각하기에도 우크라이나 흑토지대를 공격하는 그것보다는 크림반도를 공격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러시아에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겠지요.”
“그렇지!”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래글런 남작과 보스케 장군은 서로를 마주 보고는 턱이 빠져라. 크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웃던 보스케 장군은 웃음을 멈추고는 래글런 남작에게 물었다.
“하하하……. 그래서 크림반도는 어떻게 공략하실 생각입니까?”
“하하, 당연히 공격해서 빼앗아야지!”
“하……. 하하……. 공격해서 빼앗는다고요……?”
“그럼!”
보스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차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실 것인지…….”
“하하하! 우리 강력한 영국함대와 프랑스함대가 아군의 상륙을 지원할 텐데 무얼 그리도 걱정하는가? 우리는 안전하게 상륙하여 러시아군을 무찌르면 그만이야!”
“…….”
보스케는 더는 웃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