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81화
평화공 펠릭스
오스트리아를 조기 탈락시키겠다는 계획도 실패하고 그동안 발칸에서 먹었던 땅들도 죄다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제국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곧바로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일단 병력이 준비되는 대로 폴란드를 되찾아야 한다! 오스트리아 놈들이 그곳을 정복하게 둬서는 안 될 일이야!”
“폐하, 지금은 우크라이나로 몰려들 연합군을 막는 것이 시급합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지금 병사들을 무장시킬 총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뭐……. 거창하게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었다.
실상은 멘시코프가 시원하게 대군을 말아먹은 덕분에 지휘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전투로 인해 잃은 병력쯤이야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러시아제국에서 인력이 부족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정작 부족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총이었다.
당장 지난 전투에서 손실한 장비만 하더라도 두세 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양이었다.
이는 제국 내의 조병창에서 석 달 동안 부지런히 무기를 찍어내야 겨우 수량을 맞출까 말까 한 양이었다.
이런 장비가 한 번에 싹 날아가 버렸으니 병사들에게는 창고에 쌓여 있던 구식장비가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구식장비들의 상태 역시 문제가 상당히 많았다.
“보급품이다.”
“오……. 드디어 무기를 주는 건가?”
“저 간악한 서방 놈들에게 쓴맛을 보여줄…….”
“…….”
“이게 뭐야……?”
병사들은 자신들의 앞에 있는 러시아의 전통병기인 버디슈와 수백 년 전 표트르대제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머스킷을 보고는 할 말을 잊었다.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스트렐치셨다는데…….”
“……너도 스트렐치가 되겠구나.”
“하느님 맙소사…….”
대부분의 무기가 제대로 관리가 되질 않아서 녹이 슬거나 내부 총열이 막혀 있는 등 사소한(?) 문제들을 동반하고 있었지만……. 지휘관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무기를 제대로 쓸 수 있냐 없느냐가 아니라 병사들을 무장시키느냐 못 시키느냐가 더 중요했기에 그런 것이다.
“이게 뭐야…….”
“이런 거로 어떻게 싸우라고…….”
“그냥 나가 죽으라는 건가?”
병사들은 불만을 느꼈지만, 어차피 그들이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도 상부에서 이를 해결해 줄 리도 없었기에 다들 그저 투덜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우웩……. 냄새나는 것 좀 봐.”
“기름칠은 언제 한 거야……?”
“나무가 다 썩은 것 같아.”
“내 건 언제 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라도 그 수량이 넉넉하지 못해서 일부 병사들은 무기도 없이 나무막대기만 들고 훈련받을 정도였다.
이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대책은?
“무기생산을 더욱 늘리도록 하여라.”
“폐하, 이미 기술자들이 모두 달라붙어 무기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럼 더 노력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 노력이 지금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흠…….”
이전에도 불거졌던 문제였지만 그때는 전황이 유리했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던 문제였다.
하지만 보헤미아에서의 패전 이후 생산력 문제가 발목을 잡으면서 니콜라이의 골치를 썩였다.
“으음…….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병사들을 무장시킬 만큼 총기를 당장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아무래도 수입을 해와야 할 것 같은데…….”
키셀료프는 말끝을 흐렸다.
그가 말하기에도 지금 자신의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정작 니콜라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인지 키셀료프에게 물었다.
“지금 무기를 수입해 올 만한 나라가 있는가?”
“……굳이 따져보자면 프로이센이나 스웨덴 정도가 있을 것 같군요.”
“스웨덴은 사이도 좋지 못하고 우리 군의 수요를 충족시켜줄 만한 생산력을 갖추지도 못했으니 그쪽은 건너뛰고……. 프로이센이 좋겠군.”
니콜라이의 머릿속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한 오스트리아를 대신 프로이센이 든든하게 동맹국 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러시아가 이전에 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고 말이다.
“프로이센이라면 무기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해 줄 수는 있지만……. 저들이 과연 우리와 거래하려 들겠습니까?”
“지난번에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러 가는 길을 열어준 것 역시 프로이센이 아니던가? 그러니 저들에게 좋은 값으로 제안한다면 저들도 거래에 응하겠지.”
“하오나 지금 서방국가들이 대놓고 우리를 적대하는 상황이고 오스트리아 역시 우리와 적대하는데……. 프로이센이 우리와 거래를 하려 들지 의문입니다.”
“괜찮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놈들과는 다르게 의리가 있는 녀석들이니까! 그 친구들은 지난 나폴레옹 전쟁 때도 우리와 함께했어!”
니콜라이의 말에 키셀료프는 입을 다물고서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보다 더 오래된 동맹국이지 않았습니까? 폐하…….’
정작 그러면서도 키셀료프는 고개를 숙였다.
“예, 그럼 그리하겠나이다.”
* * *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엘리자베트 양은 무엇이 불만인지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분명 산책이라고 하셨잖아요.”
“산책 겸 병문안이지.”
“…….”
그렇다.
나는 산책을 핑계로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의 상태를 살펴보러 온 것이다.
“폐하……. 오셨습니까…….”
“오우……. 빈말이라도 좋은 모습이라고는 못하겠군.”
공작의 상태는 끔찍했다.
평소에도 그리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창백했던 피부는 아예 혈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총기 가득했던 두 눈은 썩은 동태눈처럼 보였으며 호리호리하던 공작의 몸은 뼈와 가죽만 남아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지난번에는 과로로 쓰러졌다고 들었거늘……. 이건 단순한 과로 때문이 아닌 것 같은데?”
“허허, 전부 제가 모자란 탓이지요.”
공작은 눈에 띄게 병약해져 있었다.
이제는 대화를 하는 것도 힘에 겨운 것인지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져 갔다.
“으음……. 병명이 뭐라던가?”
“뇌의 혈전인지 뭔지 하는 것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는데,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
공작은 평소와는 달리 말투도 어눌해졌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굉장히 힘들어 보였다.
‘공작이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 아세요?’
[모른다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만 들었네.]
‘하…….’
아무래도 이번 전쟁으로 인해 무리했던 것이 공작의 늙은 몸에 큰 무리를 준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잠을 조금 더 줄이고 공작의 부담을 최소화했어야 했는데…….’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공작 역시 그러했고.]
‘아직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랑 해야 할 게 산더미인데 이렇게 보낼 수는 없습니다.’
내 말에 영감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그만 보내주게.]
‘예? 하지만 영감님이 지난번에 말씀하시길 공작만큼 뛰어난 인재는 다신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내버려 둬요?’
영감님은 여유로운 얼굴로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을 내려다보며 말씀하셨다.
[공작은 제국을 위해 일평생을 헌신했으니 그의 삶이 허무하다고 할 순 없지.]
‘하지만…….’
[뛰어난 인재를 잃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모름지기 지배자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네,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손에 쥔 것을 언제든지 놓아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다시 시작하되 놓아줄 때를 알라는 것이군요…….’
영감님은 내 말에 그저 말없이 웃으시고는 공작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침대에 기댄 채로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그 모습에 나도 조용히 옆에 꿇어앉아 영감님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신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이런 곳에 떨어진 것을 보면 신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했으니, 그 존재에게 기도하려는 것이다.
‘공작이 딱 일 년만 더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어허, 자네는 곧 죽을 사람도 써먹으려는 건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거죠.’
공작이 떠난다면 그동안 어머니를 견제해 주던 든든한 장벽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거기에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주던 공작이 떠난다면 둘의 갈등도 점점 표면으로 떠오를 것이었다.
그리고 공작의 파벌들 역시 각자 이익을 좇으며 갈가리 찢어질 것이 분명했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다.
나는 공작처럼 그들을 통제할 카리스마가 없다.
그리고 두 정치세력 간의 사이를 중재해 줄 만한 협상 능력도 떨어졌다.
거기에 어머니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도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작이 사라진다면 간신히 균형을 잡아놓은 제국 내부는 다시금 혼란에 빠질 것이었다.
[……자네는 너무 걱정이 많군.]
‘걱정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에요.’
[자네라면 천천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야.]
영감님은 나를 다독이며 용기를 북돋아 줬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던 용기가 샘솟는 것은 아니었다.
“펠릭스 공……. 그대가 이렇게 가버리면 나와 제국은 어쩌란 말인가?”
“폐하께서는……. 잘 해내실 겁니다…….”
“그대가 없는데, 나 혼자 어찌 국정을 이끌겠나.”
“허허허……. 폐하……. 폐하라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를 잘 헤쳐나갈 겁니다…….”
공작도 영감님처럼 내가 잘 헤쳐나갈 것이라 말했지만 내 마음속 불안감은 쉬이 없어지질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작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리며 내게 말했다.
“폐하, 저는 제국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여러 황제를 모셔오며 그리 좋지 못한 일도 많이 겪어왔지……. 으으으……!”
공작은 한창 말을 하던 중에 갑자기 몸을 떨었다.
그것도 그냥 떠는 것이 아니라 침대가 다 흔들릴 정도로 격하게 말이다.
“펠릭스 공? 왜 그러는 것인가?!”
“의사를 불러오세요!”
엘리자베트가 급히 집사에게 명령해 의사를 불러오게 했다.
공작은 진료를 받고는 아편을 투여받고서야 조금 진정되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공작이 왜 갑자기 발작 증세를 보이는 건가!”
“그것이……. 각하께서는 머리에 큰 충격을 받으신 탓에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머리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인가?”
“예, 이런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은 많이 봤습니다만 각하처럼 심각한 이는 저도 처음입니다.”
“으음……. 알겠네.”
공작은 아편을 처방받고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내게 말했다.
“으으으……. 제가 못 볼 꼴을 보여드렸군요.”
“…….”
영감님의 말이 맞았다.
공작은 곧 죽을 것이었다.
그게 한 달 뒤가 될 수도 조금 뒤가 될 수도 있겠지만 공작이 죽는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후우…….”
그 사실이 한탄스러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공작은 그런 내 모습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폐하는 제가 모셨던 황제 폐하들 가운데 가장 현명하시며 유능한 분입니다.”
“칭찬은 고맙네만……. 그리 기운이 나진 않는군.”
“폐하께서는 언제나 제국의 중심을 잡아주셔야 합니다. 폭풍 속에서도 우뚝 서 있는 등대처럼 제국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셔야 합니다.”
“기억해 두겠네.”
공작은 내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렇다니 다행이로군요. 한창 바쁘실 텐데 이만 돌아가시지요. 폐하.”
“……부디 병을 떨치고 일어나게.”
나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렴요. 조금 쉬었다가 쉰브룬궁으로 출근할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폐하.”
이 만남이 공작과의 마지막임을 짐작했다.
공작 역시 이것이 나와의 마지막임을 눈치챈 듯했지만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작은 웃으며 날 배웅했고, 나도 억지로나마 웃으며 공작을 떠나보냈다.
그날 저녁.
공작이 숨을 거뒀다.
1853년의 늦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