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83화
소수민족을
프로이센은 러시아의 무기거래에 응했다.
처음에는 프로이센 내부에서도 서방과 적대 중인 러시아와 무기를 거래한다는 것에 큰 거부감을 보이며 서로 논쟁을 벌였다.
“서방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그들과 무기거래를 한다면 서방에서 우리를 안 좋게 볼 게 분명합니다.”
나름대로 상식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프로이센 정계의 주류의견은 이러했다.
“허허, 우리가 언제까지 그들의 눈치만 살펴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가 직접 참전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남아도는 무기만 팔겠다는데, 저들이 나쁘게 볼 이유도 없지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하긴……. 그냥 창고에서 썩어가는 무기만 팔겠다는 건데 저쪽에서 싫어할 이유는 없지?”
“안 그래도 신식무기공장과 탄약공장을 증설하려면 부지가 필요했는데, 기존의 공장을 활용할 수 있게 되겠군요.”
“오히려 구식무기로 러시아군을 무장시켜 서방을 이롭게 했으니 저들도 우리에게 고마워할 겁니다.”
“……?”
다른 곳이었다면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그런 말을 꺼낸 이를 욕했겠지만, 프로이센에서는 그에 반대하는 사람을 미친놈처럼 바라봤다.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허허, 적이 구식무기로 싸운다는 것은 그만큼 전투에서 아군이 유리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애초에 우리가 무기를 팔지 않으면 러시아군은 빈손으로 싸우는 거잖습니까!”
“그것이야말로 궤변이로군. 전투에 나서는 군인에게 총이 없어서야 쓰겠는가?”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모든 사고가 전쟁으로 연결되는 프로이센의 융커들에게는 이것이 당연했다.
심지어 프로이센의 외교관인 비스마르크마저 유커들의 주장을 지지했을 정도였다.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군은 이번에 새로운 소총을 도입하였으니 기존에 쓰지 않던 소총은 조속히 퇴출당하여야 합니다.”
“역시 자네는 뭘 좀 아는군.”
“그리고 지금 러시아가 무너지는 것은 우리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비스마르크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조금 더 적극적인 대러시아 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분전하여 오스트리아의 힘을 줄여놓아야 향후 독일통일을 위한 결전에서 우리나라가 유리한 지점을 가져갈 수 있을 것입니다.”
“으음……. 맞는 말이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는가?”
“우선은 스웨덴을 거쳐 러시아와 무기거래를 트고……. 그 이후에는 봉쇄로 인해 힘들어하는 러시아를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 자원과 물품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비스마르크의 제안에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고민했다.
지난번에 국경을 열어준 일도 오스트리아 측에서 눈치를 채고 슬슬 자신들을 압박해 오고 있었는데, 이전 일까지 저들의 귀에 들어가면 상대가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흠…….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폐하, 가끔은 과감하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 듣기 좋은 말로 넘어가기엔 너무 과감한 것 같으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러시아와 좀 더 가깝게 지내는 것을 망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난 독일연방 회의에서 오스트리아 측 대표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를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렇다는 것은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 러시아 간의 은밀한 거래가 오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러시아와 무기를 비롯한 여러 자원과 공산품을 거래하며 더 가까워진다?
이건 어딜 봐도 외교적인 자살처럼 보였다.
“폐하, 소신을 믿어주시옵소서.”
“으음……. 지금 러시아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서방 측에 들켰다가는 우리는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허허……. 그대가 어찌 처리하겠다는 것인가?”
“그건…….”
* * *
그로부터 몇 달 후.
러시아는 스웨덴을 거쳐 프로이센의 지원 물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이걸 얻어내기 위해 스웨덴의 입에 상당한 이익을 물려줘야 했지만, 덕분에 당장에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역시 우리의 오랜 동맹인 프로이센답다!”
“…….”
“허허, 무엇이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로군. 키셀료프.”
키셀료프는 항구에서 옮겨지고 있는 프로이센의 무기와 여러 지원 물품을 보며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했다.
“폐하, 분명 저 물품은 프로이센에서 보내온 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네, 그쪽에서 우리의 제안을 수락하여 그들의 물건 중에 남는 것을 보내온 것이지.”
“그런데 말입니다……. 어째서 저 물건을 싣고 온 함선은 영국의 깃발을 달고 있는 것입니까?”
“봉쇄를 피하고자 그쪽 상선을 이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걸 보면 프로이센 녀석들도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쓴단 말이야.”
니콜라이는 껄껄 웃으며 항구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나무상자를 돌아봤다.
“이제 곧 저것들이 위대한 어머니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모인 병사들의 손에 들려 간악한 서방의 군대에 불벼락을 안겨줄 것이네.”
“폐하께서 바라신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하하, 그렇지! 그렇게 될 것이네, 지금이야 상황이 조금 어려워졌다만……. 언젠가는 이 상황이 바뀔 것이야!”
키셀료프의 시선은 들뜬 황제보다는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나무상자로 향했다.
정확히는 구석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자보다는 그것을 옮기고 있는 수병에 더 관심을 보였다.
‘영어를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들의 억양은 영국인들의 것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구나.’
그는 수병들의 억양이 영국본토의 억양과 다르다는 것을 파악했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느 지역의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단순히 영국 상선에서 일하는 자들이다 보니 거친 억양을 쓰는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니콜라이는 그런 키셀료프의 어깨를 두들기며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키셀료프.”
“예, 폐하.”
“요즘 들어 프로이센이 우리와 부쩍 가까워진 것 같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저들도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독일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래서 짐이 생각해 본 것인데……. 발칸에서의 일이 끝난다면 다시금 군대를 모아 오스트리아를 공략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니콜라이의 천연덕스러운 질문에 키셀료프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폐하, 발칸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전쟁을 이어가기보다는 저들과 협상을 하셔야지요……!’
하지만 이렇게 말했다가는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자신이라 하여도 목이 무사하지 않을 것이었기에 그저 고개를 숙이며 황제의 비위를 맞출 뿐이었다.
“뜻대로 하시지요.”
“하하하! 그래, 자네가 생각하기에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가?”
“예, 폐하.”
“프로이센이 우릴 돕는다면 제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날뛰는 오스트리아의 어린 황제도 곧 내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야.”
니콜라이는 꿈을 꿨다.
그 꿈속에서는 자신의 발아래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황제가 있었다.
그 옆에는 프랑스의 황제와 영국의 여왕도 자리하며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다시 한번 위대해질 것이네.”
니콜라이는 이번 전쟁이 그동안 자신들을 업신여겨왔던 서방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나폴레옹의 폭정으로부터 고통받을 때, 조국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미개하며 뒤떨어진 머저리들로 여기며 언제나 업신여겨왔다.
“형님께서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때까지 참을 수가 없었네.”
“폐하…….”
니콜라이는 언뜻 들으면 혼잣말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그는 스스로 엄숙히 맹세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조국을 끝까지 무시하고 잘났다는 듯이 으스대던 서방세계를 징벌하겠다고 말이다.
“전황은 곧 바뀔 것이네, 멘시코프의 일은 예상 밖이었지만……. 나는 파스케비치를 믿네.”
“대공 전하께서는 맡은 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실 것입니다.”
“그렇겠지.”
니콜라이는 무척이나 힘들고 지쳐 보이는 얼굴로 키셀료프를 돌아봤다.
평소 기운이 넘치고 자신만만했던 황제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키셀료프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멘시코프는 무얼 한다던가?”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모스크바의 별장에서 근신 중이라 들었습니다.”
황제는 근신 중이라는 말에 혀를 찼다.
“그놈이 내 계획을 모두 망쳐놨어.”
“……내심 반성하고 있을 겁니다.”
“그놈은 단순히 반성만으로 끝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야.”
말은 그리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서글픈 표정을 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멘시코프……. 멘시코프가 내 군대를 모조리 쓸어버렸어……. 놈이 러시아의 미래를 앗아가 버렸다고.”
“폐하, 곧 새롭게 편성된 부대가 서방의 침략군을 물리치고 러시아를 구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래야겠지…….”
키셀료프의 진심 어린 말에도 니콜라이의 안색은 좀처럼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안색이 어두워지며 천천히 바다 너머로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봤다.
“해가 지는군.”
“밤이 되면 추워질 겁니다. 그전에 따뜻한 곳으로 가시지요. 폐하.”
“러시아의 밤은 춥지, 프랑스인들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그럴 것입니다.”
니콜라이는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가만히 그 자리에서 수평선 너머로 해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저물고 찬 바람이 쌩쌩 불어오고서야 다시 활기를 되찾으며 키셀료프에게 말했다.
“몸이 조금 차가워졌군. 이럴 때는 보드카가 최고지, 어떤가?”
“폐하께서 하사하시는 거라면 보드카가 아니라 흙탕물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럼 오늘 보드카에는 흙탕물을 조금 섞으라고 해야겠군. 그대는 거절치 말고 기쁘게 마시게나.”
“……정말로 주시는 겁니까?”
“으하하!”
* * *
전쟁은 한창이었지만 제국의 경제지표는 꾸준히 상승 그래프를 달리고 있었다.
이미 제국 전역에는 각 도시를 이어줄 철로가 만들어지는 중이었고, 기존의 도로들도 재단장을 마쳤으며 지역마다 공장이 들어서며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다만…….
“폐하, 이대로 광범위한 지출을 이어갔다가는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릴 겁니다.”
“쓰읍……. 전쟁 때문인가?”
“그 영향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대부분은 대규모 공공사업에 따른 지출이 원인입니다.”
“그건 차관이 있잖은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들여온 차관은 작년에 전부 소모하고 정부의 재정지출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군.”
브루크 경은 금방이라도 제국경제가 죽어버릴 것처럼 내게 호들갑을 떨었다.
“폐하, 지금이라도 공공사업을 일부 축소하셔야 합니다. 특히 도서관 같은 경우는 필히 줄여야 합니다!”
“도서관은 또 왜 그런가?”
“몇몇 지방의 시민들은 자신의 영역에 도서관이 생기는 것을 반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서관이 생긴다는데 왜 싫어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왜?”
“……제국 내의 슬라브인들은 폐하의 도서관이 슬라브차별정책의 일환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도서관 내에 갖춰진 서적 대부분이 독일어와 헝가리어로 저술된 책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슬라브 놈들은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이전부터 러시아에 자극받아 제국 내에서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불러일으키기에 천천히 그들을 바꾸려 한 것인데……. 생각보다 반대가 심했다.
“그럼 슬라브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서는 도서관 건립을 미루는 것으로 하지.”
“폐하, 그렇게 되면 그곳에 거주하는 독일계와 헝가리계 주민들이 불만을 가질 것입니다.”
“음? 아, 그렇겠군.”
이것 참 골치 아픈 일이었다.
슬라브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곳에서는 독일인이나 헝가리인이 소수민족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어?
“잠깐……. 소수민족이라……?”
소수민족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다수와 비교하면 수가 적은 민족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국 내에 있는 독일계는 어떤가?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