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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85화 (85/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85화

제국의 역습?

발칸반도에서 물러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태세를 정비하며 서방 원정군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비록 발칸에서는 보급문제와 기타 여러 가지 요인이 뒤섞여 후퇴하긴 했으나 덕분에 파스케비치의 부대는 별다른 피해 없이 물러날 수 있었다.

“연합군의 함대가 흑해로 진입 중이라고?”

“예, 아무래도 크림 쪽을 노릴 생각 같습니다.”

“크림……. 크림이로군.”

파스케비치는 곧장 지도를 훑어봤다.

그리고 발칸반도의 해안가에서 크림반도를 향해 나아갈 만한 곳을 몇 군데 눈에 담았다.

‘국경에서 제법 거리가 있으면서도 크림반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면…….’

육지에도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있듯이 바다에도 배가 다니는 길이 있었다.

그렇다면 발칸에서 크림으로 들어오는 뱃길을 훑어봤을 때, 연합군이 선택할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바르나.”

“예?”

“연합군은 이곳에서 크림반도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스탄불도 있잖습니까?”

부하의 물음에 파스케비치는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흑해와 지중해를 이어주는 통로일 뿐이지 흑해 전역의 함대를 총괄할 사령부로 쓰기에는 부적절한 곳이야.”

“하지만 오스만 놈들의 지원을 받는다면…….”

“자존심 강한 영국과 프랑스 놈들이 자기들보다 한참 밑이라고 생각하는 이교도들의 지원을 받는다고?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

“아…….”

파스케비치는 서방 원정군의 심리를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유럽인들이 오스만을 대할 때는 동방이건 서방이건 가릴 것 없이 그들을 무시해서 그런 것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반면에 바르나는 흑해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자 무역도시이니……. 이곳에 사령부를 세우고 크림반도를 공략하기에는 딱 맞은 곳이지.”

“그렇겠군요……!”

“거기에 도나우강을 따라 영국 해군이 순찰을 돌고 있을 테니, 우리가 섣불리 다가가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말이야.”

파스케비치는 혀를 찼다.

그만큼 연합군은 완벽한 위치에서 크림반도를 향한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쓰읍……. 어렵겠는걸.”

“그럼 지금이라도 군대를 돌려 크림반도를 지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 그럼 늦어.”

지금 부대를 움직여 크림반도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바다를 가로지르는 연합군이 훨씬 빨랐다.

강행군으로 세바스토폴까지 간다고 해도 육지로는 한 달이 족히 걸릴 것이었다.

반면에 배로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면 충분한 거리였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파스케비치는 생각했다.

이대로 적들이 크림반도로 향한다면 아직 준비가 덜 된 아군은 별다른 대응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들의 전력을 깎아둬야만 했다.

“……바르나를 공격해야겠군.”

“예?! 적들이 다 모여 있을 겁니다!”

“알고 있네.”

원정군의 지상 병력뿐만이 아니라 대영제국이 자랑하는 영국의 왕립함대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파스케비치는 이곳을 공격하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저들은 강력한 함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우리가 발칸에서 물러났으니 바르나가 안전하다고 생각하겠지.”

“실제로도 안전하지 않습니까?”

“아니, 아직 내 휘하에는 병사들이 남아 있고 우리의 동맹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와 발칸의 여러 슬라브인은 그곳에 남아 있다네.”

파스케비치는 그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물론 그들이 뭔가 대단한 것을 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후방에서 시선을 좀 끌어주는 것만으로 족하지.”

“예? 어떻게 말입니까?”

“카자크인들은 지금 무얼 한다던가?”

* * *

“점령지 곳곳에서 슬라브인으로 구성된 유격대가 병사들을 습격한다고.?”

“예, 각하.”

“허허……. 이게 무슨 일인과?”

슬라브인 유격대 소식을 들은 래글런 남작은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그의 머리카락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여 굴곡진 그의 뒷덜미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발칸의 슬라브인들이 들고일어날 줄이야…….”

“저도 예상 밖이었습니다. 도대체가 러시아 놈들이 뭐가 이쁘다고 그러는 것들인지 원…….”

“흠…….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야……. 안 그런가?”

“신기하군요.”

유격대라고 해봤자 현지 주민들이 들고일어난 것보다는 파스케비치가 기동성이 좋은 카자크를 도나우강 건너편으로 투입하여 이곳저곳 쑤시고 다닐 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연합군으로서는 발칸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은 유격대가 미쳐 날뛰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뒤를 정리해야지 않겠습니까?”

“흠……. 큰 전투를 앞에 두고 병력을 재배치하는 것은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그렇다고 후방의 위협을 남겨둘 수는 없지요.”

래글런 남작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듯이 보스케 장군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프랑스군 본대가 도착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언제쯤 올 것 같은가?”

“그거야 도착해 봐야 알겠지만……. 두어 달 전쯤에 파리를 떠났다고 들었으니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도착할 것입니다.”

“그럼 그들에게 후방의 일을 맡기는 건?”

“예? 그럼 한 달 동안 저들이 날뛰는 것을 버려두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아직은 별다른 피해도 없잖은가.”

래글런 남작의 말에 보스케는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되물었다.

“병사 다섯이 다쳤잖습니까.”

“하루에 다섯 정도면 그리 큰 피해도 아니잖나.”

“허허……. 그들이 영국군인 것은 아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보스케는 무척이나 할 말이 많았지만 입을 닫았다.

어차피 말한다고 해서 알아들을 위인도 아니었고 굳이 그를 이해시켜야 할 필요도 못 느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있으니 옛 생각이 나는군.”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예전에 내가 이베리아에서 웰링턴 공작 각하를 모시던 시절에 비슷한 일이 있었네.”

“이베리아라면…….”

그건 나폴레옹 전쟁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적이었고 말이다.

“그때도 이처럼 원주민들이 손에 무기를 쥐고는 우리와 프랑스 놈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고는 했었다네.”

“그러시군요.”

“그때 각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지.”

래글런 남작은 무엇이 그리도 재밌는지 저 혼자 시시덕거리더니 사뭇 진지한 어투로 누군가의 흉내를 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후방을 짓밟는 게릴라가 아니라 우리의 앞에 있는 프랑스군이다!”

“으음…….”

“그리 말씀하시며 웰링턴 각하께서는 도망치는 술트의 프랑스군을 쫓는 데 열중하셨지……. 뭐 결국엔 잡지 못했지만 말이야.”

“예, 그렇군요.”

보스케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대놓고 후방업무를 프랑스군에게 일임하는 것도 모자라서 프랑스의 자존심인 제국 시절을 언급하며 제국군이 패배했던 일화를 언급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놈이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것이 얼마나 웃겼는지 모를걸세, 아니, 글쎄 자기가 먹으려던 저녁 식사까지 내팽개치고 도망쳤지 뭔가?”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잖습니까.”

“앗! 그렇지, 내가 또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아 버렸구먼……. 나이를 먹다 보니 또 실례했군.”

“…….”

래글런은 정말 사심 없이 실수를 한 것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며 보스케를 자극한 것도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잘 나갔던 시절을 이야기하다가 그리된 것일 뿐이었다.

“쯧…….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스케가 래글런 남작을 이해해 줄 이유도 없었다.

그의 관점에서 래글런 남작은 자신이 사령관인 것처럼 자신을 아래로 여기며 프랑스군을 업신여기는 재수 없는 영국 귀족에 불과했다.

“그럼 제 부대는 두러스에서 본대와 합류하여 발칸의 유격대를 처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으음……. 그렇게 해주겠나?”

“예, 고생하십시오.”

보스케는 자리를 떠나며 혀를 찼다.

“쯧……. 나이를 허투루 먹은 늙은이 같으니.”

당연하게도 프랑스군이 자리를 비우자 바르나에 남은 것은 반쪽짜리 사르데냐 원정군과 영국군, 그리고 오스만군대뿐이었다.

잘 정비되어 있는 프랑스군이 빠지고 뒤에 남은 이들 중에서 사르데냐는 지난 여러 번의 전투에서 손실된 부대를 수습하느라 정신없었고, 오스만은 영국군에게 대놓고 무시당하는 처지였던지라 불만이 아주 많았다.

그들이 오스만군을 무시하는 이유도 참으로 황당했던 것이…….

“오스만은 러시아와 맞붙어서 이겨본 적이 없는 이들이니 굳이 저들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지.”

“그렇지요. 우리가 무엇이 아쉬워서 저런 이교도들에게까지 손을 내민단 말입니까?”

“설령 저들의 도움으로 이긴다고 해도 우리의 명예에 큰 흠이 생길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스만군을 작전에서 배제하니 오스만의 군인들 역시 자신들을 무시하는 영국군에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니 막상 러시아군이 움직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동원 가능한 병력은 영국군뿐이었다.

“……러시아군이 움직였다고?”

“그, 그렇습니다. 각하!”

“그럴 리가 없는데…….”

“제가 확인했습니다.”

“흠……. 꼬랑지를 말고 도망쳤던 녀석들이 무슨 자신감으로 다시 이곳까지 기어들어 온 것인가…….”

하지만 래글런 남작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움직였다고 해봤자 함대가 도나우강을 틀어막고 있는 이상 저들이 강을 건너올 방법은 없었으니 말이다.

“러시아군 본대가 도나우강까지 왔다고?”

“예, 그렇습니다.”

“우리 함대는 어디 있는가?”

“러시아군의 도강에 대비하여 도나우강 유역을 순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로군.”

래글런 남작의 걱정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저……. 각하.”

“왜?”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했잖나.”

“예?”

영국함대는 무적이다.

그러니 러시아군은 도나우강을 건너지 못한다.

그게 래글런 남작의 결론이었다.

“아군 함대가 버티고 있는데 러시아군이 어떻게 강을 넘어오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크림반도를 공격 준비에 전념하면 그만이야.”

“그래도 경계병력을 세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잖습니까.”

“그래,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래글런 남작의 부관 역시 러시아군이 강을 넘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 가령 갑자기 강물이 모조리 말라버린다거나 러시아 놈들이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를 대비하기 위한 병력을 조금 남겨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영국군의 반응은 대체로 이러했다.

‘너희가 강을 건넌다고? 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

* * *

같은 시각 도나우강 건너편의 러시아군 진형에서는 러시아 유일의 야전 원수이자 발칸 원정군의 사령관인 이반 표도르비치 파스케비치가 심각한 표정으로 장교들에게 훈시를 하고 있었다.

“알겠나? 이건 크림에 있던 제국의 흑해함대가 목숨을 걸고 만들어준 기회다. 그러니까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도 안 되고 실패해서도 안 되는 작전이라는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시계를 맞추지.”

파스케비치가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자 휘하 장교들도 일제히 시계를 꺼내 들었다.

“현 시각……. 오전 11시 20분을 기점으로 시계를 00시 00분으로 맞두도록.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뒤에 아군 흑해함대가 바르나에 있는 서방함대를 공격할 것이다.”

파스케비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강을 건너기 위해 함대를 제물로 바쳤다.

빈말이라도 흑해함대가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를 이긴다고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마 모두 죽거나 운이 좋다면 몇몇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불쌍한 해군 녀석들의 명복을 빌며……. 제군들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네.”

파스케비치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시아에 영광을.”

그러자 장교들 역시 미리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러시아에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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