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86화
초봄
마지막으로 침대에서 눈을 붙여본 게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매일 아침 집무실 의자에서 눈을 뜨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 더미와 느긋하게 독서 중인 엘리자베트 영애가 나를 반겨줬다.
“……시씨?”
“일어나셨네요.”
“으음…….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이모님이 자꾸 귀찮게 하셔서요.”
“어머니가?”
또 그녀를 괴롭히려는 어머니를 피해서 내 집무실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그런데 바흐 경은 왜 저러는 거예요?”
“피곤해서 그렇지, 좀 쉬게 내버려 둬.”
본격적으로 해가 뜨면 쉬지도 못할 것이다.
발칸의 러시아군이 바르나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판정승을 거둔 뒤로 전황이 다시 매우 급해진 탓에 정신이 없었다.
바흐 남작과 함께 집무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전장에서 밀려들어 오는 보고서를 분류하고 각 산업현장에서 올라오는 요청서와 분류표를 정리하다 보면 어느샌가 하루가 지나가 있었다.
그럼 밤이면 좀 쉴 수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밤에는 낮에 처리하지 못한 서류를 마저 정리하거나 지방의 신료들이 올린 보고서를 일일이 지켜보고 빠진 것이나 대충한 것은 질책과 함께 돌려보내고 일을 잘 처리한 것은 칭찬과 함께 상을 내려야 했기 때문에 정신없었다.
“그러다가 제 명에 못 살아요.”
“영감님도 그 말 하시더라고.”
“그건 누군데요?”
“있어……. 잔소리꾼.”
[누가 잔소리꾼이라는 건가!]
영감님이 굉장히 심통 난 목소리로 나를 꾸짖으셨지만 늘 그렇듯이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이른 아침의 나른함과 몽롱한 기분을 음미하며 책상에 턱을 괴고 어제 처리하다 남은 보고서를 훑어보고 있으니 옆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 옆모습이 그렇게 잘생겼어?”
나름 재밌는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인데, 엘리자베트는 별 감흥도 없다는 듯이 답했다.
“아뇨. 이렇게 일에만 빠져 사는 폐하의 모습을 보니 제 결혼생활이 생각보다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크흠……. 결혼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어떻게 그러겠어요? 아버지나 어머니나 내심 제가 폐하와 결혼하길 바라시는 모양이던데요.”
엘리자베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어디 마음속까지 그럴 리는 없었다.
지금도 아무 상관없다는 말과는 다르게 그녀의 안색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결혼은 네 부모님의 문제가 아니라 네 문제잖아. 네가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야.”
나름 진지한 조언이랍시고 말했는데, 정작 엘리자베트는 나를 돌아보더니 말없이 빤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뭐, 왜 뭐…….”
“예전부터 든 생각인데, 폐하는 저랑 결혼하기 싫다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싫다는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이렇게 결혼하는 것은 좀 그러니까……. 네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는 뜻이지.”
“그래요? 그럼 제가 폐하께 결혼하자고 하면 어떻게 사실 생각이신데요?”
이건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매번 엘리자베트는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움직였는데……. 그게 아니라면?
참으로 골치였다.
[뭘 고민하나? 그냥 결혼해야지.]
‘예? 하지만…….’
[하지만 뭐?]
‘하지만……. 시씨는 어려도 한참이나 어린데요.’
[몇 번이고 말했지만, 자네도 어리잖나.]
‘아……. 그건 또 그렇네요.’
하긴 젊으니까 몇 날 며칠 밤을 새우고 밥도 잠도 걸어가면서 일해도 쌩쌩한 것이겠지.
내일모레면 마흔을 바라보는 바흐 남작은 아직도 뻗은 채로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저기요 폐하?”
“으음…….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지.”
“싫다는 건 아니네요.”
“좋다는 것도 아냐.”
“그게 그거죠 뭐.”
“…….”
그녀와의 이야기는 늘 이런 식이었다.
매번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샌가 상대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가 있었다.
내가 여자에게 쩔쩔맨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엘리자베트 앞에만 있으면 괜히 말을 아끼게 된다고 해야 하나?
“참으로 어렵군. 어려워…….”
“제가요?”
“……국정운영을 말한 것이네, 그 정도면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 수 있어.”
“자의식 과잉……? 그게 뭔데요?”
“흔히들 공주병이라고도 하지.”
“공주는 아니어도 공녀는 맞는데요.”
“…….”
이제 막 일어나서 그녀와 말 몇 마디 나눈 것일 뿐인데, 벌써 말려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발칸 쪽에서 일이 터진 탓에 골치가 아팠는데, 그녀의 일까지 고민해야 하니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짐은 어제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을 정리해야 하니, 적당히 쉬다가 돌아가시구려.”
“말투가 갑자기 딱딱해졌는데요.”
“짐은 원래 이런 말투이니 괘념치 말고 가서 볼일이나 보시구려.”
“폐하께서 우리 할아버지보다 더 딱딱한 말투를 쓰고 계시니까 좀 웃기긴 하네요.”
“…….”
영감님은 옆에서 웃음을 참고 있으셨다.
“……농담 좀 해본 거야.”
“그러시겠죠.”
“후우…….”
나보다 5~6살은 어린 녀석과 이러고 있으니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들어 머리를 서류에 처박고 눈앞의 일에만 집중했다.
“끄응……. 러시아 놈들이 발칸에서 사고를 쳤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런 일이 있어.”
서방의 연합함대와 러시아의 흑해함대가 교전하는 틈을 노려 도나우강을 건너온 러시아군은 바르나에서 상륙 준비를 서두르던 연합군의 후위를 쳤다.
둘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래글런 남작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피해를 견디다 못해 바르나에서 병력을 철수시켰다.
덕분에 보헤미아에서의 패전 이후로 러시아에 불리했던 전황은 다시 균형추를 되찾았으며 당장 본토가 침략당할 위기에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러시아가 어찌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이대로 협상하자며 나올 수도 있었고, 그게 아니라면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쓰려 할 수도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다시 공격한다든가 말이지…….”
“러시아가 여길 공격한대요?”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이……. 아직도 안 갔어?”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엘리자베트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거지?
너무 가까운 거리감에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밖에서 이모님이 눈에 불을 켜고 절 찾고 계신데, 나가봤자 무엇을 하겠어요?”
하긴 어머니께서 좀 끈덕진 부분이 있긴 하지.
애초에 그래서 내가 그녀를 집무실에 데려다 놓은 게 아닌가?
하지만 계속 붙어 지내다 보니 뭔가…… 뭔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평소에는 바흐 남작이 옆에서 곯아떨어지건 절규하며 제발 퇴근 좀 시켜달라고 울부짖어도 눈도 깜짝 안 했는데…….
왠지 모르게 엘리자베트 양은 신경이 쓰였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구박받는 것이 불쌍해서 좀 돌봐주는 것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뭐랄까…….
“쓰읍……. 그럼 여기 있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어째 한마디도 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한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러시아의 차르는 우릴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고……. 서방의 군대는 우릴 도와줄 수가 없으니 우릴 또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럼 큰일 아니에요?”
“큰일이지.”
그러니까 내가 밤낮없이 제국 전역의 군수공장을 완전가동하고 훈련 중인 병력을 무장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말이다.
“카르파티아에 받아둔 병력만 운용할 수 있으면 어찌어찌 여유가 생길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그곳의 병사들은 국경지대의 러시아군과 대치 중인 병력이라 쉽사리 빼기가 어려웠다.
자칫 잘못했다가 그쪽 방어선을 내주기라도 한다면 그 뒤로는 쭉 평야 지대인지라 그들을 막을 만한 곳이 없었다.
“쯧……. 결국 폴란드에 있는 라데츠키에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나…….”
라데츠키의 부대는 지난 보헤미아에서의 싸움으로 큰 피해를 보긴 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으니 그 피해를 복구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당장 움직여서 러시아 쪽 전선에 압박을 줄 정도는 되겠지.
‘지금은 패를 아낄 때가 아니야……. 최대한 가지고 있는 패를 전부 꼬라박아서라도 러시아 놈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다만 문제는…….
[그렇다면 전쟁이 더 길어질 텐데……. 제국이 거기까지 버텨줄 것 같은가?]
‘끄응……. 또 아픈 곳을 후벼 파시는군요. 영감님.’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라네.]
영감님의 말씀대로였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손해였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수출국 중 하나인 러시아와 오스만과의 수출길이 막혔는데, 서방에서는 이 물량을 받아주기는커녕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네들 물건만 팔아치우려고 하니, 경제가 잘 돌아갈 턱이 없었다.
그렇다고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나 영국처럼 튼튼한 경제블록을 가진 것도 아니니 사실상 내수경제만으로 여기까지 버틴 것이었다.
[그것도 이젠 한계지.]
‘알고 있거든요!’
물론 아직 이탈리아 무역 루트가 살아 있으니 완전히 숨이 막혀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힘든 것 역시 사실이었다.
서방에서 들여온 차관과 콜레라 대유행으로 팔아치운 경구 수액값으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였다.
‘저놈들 본토에서 딱 한 번만 더 이기면 러시아 놈들도 협상장에 나올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러시아 황제가 병에 걸려서 돌연사해 버린다던가?
[그게 어려운 일이잖나.]
‘쓰읍……. 그러게요. 영국이랑 프랑스 놈들이 발칸에서 러시아 놈들에게 밀려날 줄 몰랐는데…….’
[보나 마나 영국 놈들이 방심하다가 한 방 먹은 것이지, 거기에 상대도 이반 표도르비치 파스케비치였잖나.]
‘유명한 사람입니까?’
내 물음에 영감님은 코웃음을 치며 말씀하시길.
[자네도 수보로프라는 이름은 들어봤겠지?]
‘아뇨.’
[…….]
그러고는 잠시 말씀이 없으시더니 헛기침을 두어 번하시고는 말을 이어가셨다.
[흠흠…….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 활약했던 러시아의 명장일세, 수십 년 동안 전쟁터를 전전했으나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지.]
‘그게 가능해요?’
[그러니 명장이라는 것이지 않나.]
‘그런데 저는 왜 몰라요?’
[……나도 그게 궁금하네.]
영감님은 사심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쉬시고는 이내 천천히 설명해 주셨다.
[아무튼……. 그렇게 유명한 수보로프의 뒤를 이어서 러시아의 야전 원수가 된 사람이 쿠투조프라는 걸출한 장군이었는데, 이 친구는 나폴레옹을 상대로 조국을 승리로 이끌었지.]
‘아, 나폴레옹은 알아요.’
[……그래서 그 수보로프와 쿠투조프라는 걸출한 장군들의 후임으로 배정된 것이 이반 표도르 비치 파스케비치라네.]
‘머리가 좀 굴러가겠군요.’
[그냥 머리 좀 잘 굴리는 수준이 아니야. 지금 그 친구가 연합군을 가지고 노는 걸 보면 모르겠나?]
영감님과는 달리 군 경험이라고는 육군 병장 만기전역이 끝인 내가 알 리가 있나.
‘그 정도는 우리 쪽 장교들도 할 수 있잖아요.’
[그놈들을 어떻게 믿어!!!]
‘못 믿습니까?’
[그놈들을 믿느니 차라리 펠릭스가 무덤에서 살아나와 다시금 총리직을 맡았다는 걸 믿겠네!]
‘흠……. 그렇습니까?’
영감님이 화를 내는 것을 보아하니 제국군에게도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해 보였다.
지금 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위장교들은 대부분 나폴레옹 시대 사람들이니 한번 싹 물갈이해 줄 때도 되긴 했고 말이다.
[파스케비치 그놈은 천재일세.]
‘저도 천재인데요.’
[자넨 아니야.]
영감님께서는 단호하셨다.
[그놈은 전장을 제 손에 쥐고는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전부 엎어버린다네.]
‘음…….’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다.
* * *
아직 바르나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전…….
래글런 남작은 마지막으로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공략을 위한 작전 기획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도나우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러시아군이 도나우강을 건넜다고?”
“예, 각하!”
“흠……. 하지만 그곳은 아군함대가 지키고 있거늘……. 어찌 강을 건넌 것이란 말인가?”
그는 러시아군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에도 기껏해야 소수의 부대가 은밀하게 강을 건넜으리라 판단했다.
그게 합리적이었으니 말이다.
“아닙니다! 지금 러시아군의 선봉대부터 시작해서 본대가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을 제가 확인했습니다!”
“……본대가? 어떻게?”
“아무래도 강을 순찰 중인 아군함대를 끌어내기 위해 흑해함대를 미끼로 던진 듯합니다.”
“……함대를?”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천지에 강 하나 건너겠다고 자국의 함대를 미끼로 던져넣는 미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적어도 그가 아는 사람 중엔 없었다.
“일단…… 일단은……. 그래, 적이 강을 건너는 것을 방해해야 한다!”
“제가 확인했을 때는 이미 반쯤 강을 건넌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군대를 움직인다고 해도 저들은 이미 강을 전부 건너왔을 것입니다.”
“이런…….”
이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신이시여…….”
그냥 기도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