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87화
결심?
전우들의 피로 길이 열렸다.
파스케비치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놓은 도하 장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도나우강을 건넜다.
“다행히도 영국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군요.”
“놈들도 우리가 강을 건너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한 것이겠지.”
파스케비치는 임시로 설치된 배다리로 안전하게 강을 건너고서는 아직 강을 건너고 있는 병력을 돌아봤다.
강가에 빼곡하게 들어찬 병사들이 강을 건널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모습이었다.
“강을 완전히 건너는 데는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아무리 빨라도 반나절은 걸릴 겁니다.”
“그렇겠군.”
파스케비치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의 흑해함대가 서방의 연합함대를 상대로 하루 정도는 버틸 것이라 믿었으니 말이다.
“너무 조급하게 병사들을 닦달하지 말고 한 명의 낙오자도 나오지 않게 하도록.”
“예, 각하.”
그렇게 러시아군이 느릿느릿하게 강을 건널 동안에도 영국군은 어떠한 대처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기병대를 보내 몇 번 쿡쿡 찔러볼 만도 했지만, 저쪽에서는 놀라우리만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영국놈들이 포기한 것은 아닐 테고…….”
“아무래도 우리가 강을 건널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최소한의 경계병력은 세워두질 않았나?”
“그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급하게 부대를 동원할 수가 없는 게 아닙니까?”
“피치 못할 사정?”
* * *
미리 도나우강을 따라 세워둔 정찰병들 덕분에 러시아군의 이런 움직임은 즉각 영국군 사령부에 전달되었다.
하지만 정작 영국군은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왜 부대를 못 움직인다는 건가.”
“……이번 원정은 단기 결전을 상정하여 보급품을 그리 많이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각하, 지금 전투를 벌이면 크림반도 상륙에 쓸 보급품이 없습니다…….”
“…….”
영국군은 이번 원정에서 그리 많은 보급품을 준비하지 않았다.
심지어 야영에 쓰일 텐트까지 제대로 갖추지 않아서 병사들은 모포 한 장에 의지하여 오들오들 떨어야 했을 정도이니 말은 다 한 셈이었다.
“각하, 어찌할까요?”
부관의 물음은 지금 싸우고 크림 상륙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크림반도 상륙을 위해 지금 물러날 것인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래글런 남작은 단호히 대답했다.
“어차피 보급은 또 받으면 그만이다. 우리에게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있잖은가!”
“알겠습니다. 그럼 전투를 준비시키겠습…….”
“각하! 각하!”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러시아군이 도하를 마치고 이곳을 향해 진군 중이라고 합니다!”
“……한발 늦었군.”
너무 태평하게 앉아 있던 래글런 남작은 기회를 놓쳤고 기민하게 움직였던 파스케비치는 그가 놓친 기회를 손에 움켜쥐었다.
이후에는 연합군과 러시아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부대의 규모 면에서나 화력 면에서 크게 밀렸던 영국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바르나에서의 짧은 전투로 영국군은 크림반도로 나아갈 상륙거점이자 연합함대의 기항지를 잃었고 오스만은 수도인 이스탄불이 러시아군의 사정권에 들어왔다.
거기에 보헤미아 전역의 승전 이후 승리 분위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던 서방측에 찬물이 뿌려졌으며 일각에서는 러시아와 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의견도 천천히 고개를 들 정도였다.
“후……. 이걸로 한숨 돌렸군.”
“각하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습니다!”
“……이건 내가 잘나서 이긴 게 아니라 내 상대인 녀석들이 멍청해서 이긴 것이야.”
파스케비치는 전장을 정리 중인 병사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하나같이 피곤해 보이고 어딘가 불편해 보였지만 그래도 다들 살아 있음에 안도하고 있었다.
“추가보급품을 마련하는 건 어려워 보이는군.”
“예, 아무래도 본국에서 추가보급품이 도착한다 해도 도나우강을 저들이 꽉 잡고 있으니…….”
“반면에 저들은 오스트리아로부터 급한 대로 보급품을 공여받을 수 있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흠…….”
일단 강을 건너와서 연합군을 밀어내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이번 전투의 패배로 열받은 연합군은 강을 봉쇄하여 이쪽의 보급선을 끊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흑해함대는 이 방어선을 돌파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적의 보급품을 상당수 노획할 수 있었다는 건데……. 이게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겠군.”
“정확한 수량을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생각처럼 그리 많은 양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지.”
파스케비치는 바르나에 있는 연합군이 상당한 양의 보급품을 쌓아뒀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의 보급품을 탈취하여 다시금 발칸 전역을 휘어잡을 수도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뚜껑을 열어보니 연합군의 보급상태는 러시아군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우리보다 못한 것 같군.”
“예?”
“아무것도 아닐세.”
파스케비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슬슬 퇴근길에 오른 붉은 태양이 만든 붉은 노을 아래에서 그는 부대가 나아갈 길을 고민했다.
‘적이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패배뿐이야……. 그렇다면 무리해서라도 이스탄불이나 다른 곳을 공격해야 하는 걸까?’
그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 * *
한편 연합군과의 합류를 위해 헝가리로 돌아왔던 괴르게이의 부대에 황제의 친서가 전달됐다.
그 편지를 읽어본 괴르게이는 혀를 차며 자신의 부관인 줄러 언드라시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자네 혹시 황제에게 편지라도 보낸 건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괴르게이는 책상 위로 편지 하나를 툭 던져줬다.
“폐하께서 자네에게 친서를 내렸군.”
“황제가 저와 무슨 연관이 있다고요?”
“폐하라고 부르게.”
“어차피 제 황제도 아닌데요.”
“줄러.”
그는 괴르게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황제가 보냈다는 편지를 뜯어봤다.
“흠…….”
“무슨 내용인가?”
“폐하인지 뭔지 하는 분께서 제게 빈으로 와서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의 사후 외무장관직에 오른 부올 백작을 보좌해 달라는군요.”
“허허, 자네의 이야기가 폐하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간 모양이로군.”
언드라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저에 대해 뭘 들으신 것인지 모르겠군요.”
“지난 혁명 당시에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면서 지원을 받아내려 한 것을 아신 것이겠지.”
“결국,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과정만 보자면 둘을 끌어들일 뻔하여 제국에 큰 위협을 주지 않았나.”
괴르게이는 그의 성공을 축하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가기 싫다는 듯이 편지를 대충 던지며 말했다.
“가기 싫은데, 거절해도 됩니까?”
“제국의 외무차관 정도면 괜찮은 직책이거늘 어째서 싫다는 건가?”
“합스부르크 놈들 밑에서 일하기 싫습니다.”
“지금도 일하고 있잖나.”
“이건 제 조국 헝가리를 위함이지 합스부르크 놈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의 단호한 말에 괴르게이가 웃으며 말하길.
“헝가리의 왕이 합스부르크 황제이거늘 그 둘을 나눠서 구분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는 아직 헝가리의 왕이 아닙니다.”
“아직은 그렇지,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은가? 어차피 황제는 성 이슈트반 왕관의 주인이 될 사람이네.”
“각하께서는 제가 황제를 위해 일하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언드라시가 살짝 실망했다는 듯이 묻자 괴르게이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하길.
“황제를 위함이 아니라 자네 가족과 친구, 그리고 마자르인을 위해 일하라는 것일세.”
“결국, 그것이 합스부르크 놈들의 배를 불려주는 것이 아닙니까?”
“마자르인도 함께 배부르겠지.”
“…….”
괴르게이는 여유롭게 악마의 검은 물을 한 모금 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자네가 잘 되었으면 좋겠네.”
“저는 이미 충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허허,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라 자네가 새로이 태어날 제국의 정치인으로 우뚝 섰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네.”
“정치인이요? 하지만 헝가리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라고 하면…….”
언드라시의 머릿속에는 헝가리를 대표하는 정치인들의 이름과 얼굴이 떠올랐다.
혁명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던 러요시 코슈트부터 혁명정부의 초기 총리직을 맡았던 러요시 바티야니, 그리고 위대한 개혁가였던 세체니 이슈트반까지……. 누구 하나 헝가리를 대표하기엔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들은 괴르게이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젊은 부관에게 말했다.
“바티야니? 그 친구는 늙은 데다가 새가슴인지라 너무 소심해, 그리고 코슈트는 헝가리를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몽상가지.”
“그럼 세체니 이슈트반 경은 어떻습니까?”
“그 친구는…….”
괴르게이는 잠시 고민했다.
세체니는 훌륭한 개혁가였다.
혁명가들이 모두 합스부르크 타도를 외치면서 급진적인 정책을 밀어붙일 때도 그는 합스부르크와의 타협을 주장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헝가리 독립이 국민투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을 때도 패배감에 젖어 있는 혁명가들에게 일갈하며 사그라드는 혁명의 불꽃을 이어간 것 역시 세체니 이슈트반이었다.
“그 친구는 훌륭한 혁명가이긴 해도 훌륭한 정치인은 아닐세.”
“그 둘의 차이점이 뭡니까?”
“음……. 사람을 이끄는 방향이 다르잖나.”
“방향이 다르다고요?”
괴르게이는 잘 설명하기 어려웠는지 한 손으로는 머리를 긁적였고 다른 손은 허공에 흐느적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 혁명가는 앞으로 이끄는데, 정치인은 위로 이끈다고들 하지 않는가.”
“처음 듣습니다.”
“으음……. 아무튼 세체니 그놈은 남들과 함께 갈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들 머리 위에는 서지 못할 놈이야.”
괴르게이의 인물평가를 전부 들은 언드라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의문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또 뭔가?”
“헝가리인을 대표할 것이라면 새파랗게 어린 저보다는 각하나 다른 군부의 인물들도 있잖습니까.”
“허, 나보고 헝가리인을 대표하라고?”
괴르게이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누군가를 대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들을 앞에서 이끌 만한 능력이 못 돼.”
“하지만 전투에서는…….”
“그건 군대라는 특수한 집단이니 가능한 것이야. 내가 군복을 벗고 정치인이 된다 한들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믿고 따르겠나?”
“…….”
그건 그도 동감하는 바였다.
괴르게이가 혁명의 영웅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부문에 한정된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는 있어도 성격이 원체 뭣 같아서 적을 많이 만드는 타입이었다.
그러니 괴르게이는 정치하기엔 모자람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니 폐하께서 자네를 선택하신 것이겠지.”
“얼떨떨하군요.”
“그만큼 자네 능력이 알려진 것이니 자부심을 느껴도 좋네.”
“흠…….”
그렇게 설명을 들었음에도 언드라시는 합스부르크의 황제를 위해 일할 생각이 없었다.
괴르게이 역시 그의 생각을 대충 눈치채고는 그를 치과 가기 싫다고 떼쓰는 아이를 달래주듯이 살살 꼬셨다.
“거절할 생각이라도 황제를 찾아가서 직접 거절하는 것이 서로 간에 뒤끝이 남지 않고 좋지 않은가?”
“…….”
“그동안 쉬지도 못했을 테니, 휴가 다녀온다는 기분으로 빈으로 가게나 그리고 겸사겸사 아델에게 내 편지와 안부도 전해주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부인께서 딸을 낳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허허, 자네도 그 소식을 들은 모양이로군. 아직 얼굴은 보질 못했지만 이름은 내가 손수 지어줬다네.”
“그렇습니까? 각하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셨다니 궁금하군요.”
“후후후……. 베르타일세, 괴르게이 베르타.”
자식 이야기에 괴르게이의 입꼬리는 하늘 모르고 치솟았으나 얼마 가지 못해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후우……. 그럼 뭐하겠나? 전쟁이 길어져서 자식새끼 얼굴 한번 못 보는데 말이야.”
“그래도 이번 연도에는 종전할 것이라고 소문이 떠돌던데요.”
“종전? 개소리 말라 하게, 러시아 놈들은 자기들이 완전히 졌다고 생각되기 전까지는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질 녀석들이야.”
“그거도 그렇겠지요…….”
잠시 고민하던 언드라시는 마음을 굳힌 것인지 황제의 친서를 움켜쥐며 괴르게이에 말했다.
“그럼 빈에 다녀오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다녀오는 김에 내 가족들에게 안부도 좀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언드라시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황제를 만나보고 결정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