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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88화 (88/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88화

어버이날?

러시아가 다시금 전황을 뒤집었다.

물론 연합군이 궁지에 몰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러시아군이 승리한 것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어뜯은 것일 뿐이니 말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시민들은 길어지는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우리 쪽은 어떤가.”

“그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쓰읍……. 그렇겠지.”

어느 쪽도 확실하게 승기를 잡지 못하는 전쟁이 삼 년 내내 이어지다 보니 사람들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야 적을 무찌른다는 생각에 흥분하여 전쟁을 지지하다가도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쯤 되면 이런 말이 튀어나왔고, 말이다.

“폐하, 슬슬 러시아와 협상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협상? 협상 좋지, 그런데 우리가 먼저 협상하자고 굽히고 들어가면 러시아 놈들이 받아줄까?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폐하…….”

“그래, 넓은 마음으로 다 이해하고 넘어갔다고 치자고……. 그럼 협상을 어떻게 진행하겠나?”

“그야…….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최선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사람대로 죽고 물자는 물자대로 전부 날려 버리고, 말이지.”

“…….”

협상을 하려 해도 문제였다.

애초에 러시아 측에서 먼저 협상하자고 들어오는 게 아닌 이상 영국이나 프랑스는 절대로 먼저 협상하자고 나올 리가 없었다.

특히 자신의 지지율과 인기에 목숨을 걸고 있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곧 죽어도 먼저 협상하자고 나올 리가 없겠지.

그렇다고 러시아가 먼저 협상을 요청할 리도 없는 것이……. 저들에게 있어 이번 전쟁은 그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그동안 자신들을 무시해 왔던 서방국가들에 한 방 먹여보겠다는 명분으로 유럽대륙의 질서를 러시아를 중심으로 개편하겠다며 전쟁을 벌였다.

겉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러시아의 세력확장을 위해 막혀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얻어 지중해로 나아갈 길을 만들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했는데, 이대로 전쟁을 그만둔다?

“그렇게 되면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귀족들이 따가운 눈총을 보내오지 않겠는가.”

“으음……. 그건 그렇습니다.”

지금 러시아의 황제인 니콜라이 1세의 아버지인 파벨 1세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시한 채로 무리하게 일을 벌이려다가 암살당한 전적이 있다.

그리고 니콜라이 역시 황위에 오르기 전 그의 형인 콘스탄틴 대공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장교들의 쿠데타를 겪은 경험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자기가 벌인 일이 실패한 거라고 인정하려 들겠나? 그렇게 되면 황제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인데 말이야.”

“으음……. 그렇다면 러시아 측에서는 협상에 나설 의지가 없다는 것으로 보면…….”

“아니, 세상에 무조건이라는 것은 없으니 저들도 조건이 맞는다면 먼저 협상하려 할 수도 있지.”

“???”

바흐 남작은 조금 전까지 러시아가 먼저 협상장에 나올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던 내가 갑자기 러시아가 협상하자고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하니 당황하며 내게 물었다.

“조금 전에 폐하께서는…….”

“사람들이 전쟁에 지쳤다면 저들이 협상장으로 나오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거야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러시아 황제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하셨잖습니까.”

바흐의 말에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이런 단순한 사람 같으니라고.”

“다, 단순…….”

“왕이나 황제 같은 사람들의 잘못이 어디 그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전부 그들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아랫것들의 잘못이지.”

“아……!”

바흐 남작은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황제는 자신의 잘못을 뒤집어쓸 만한 사람을 내세워서 협상을…….”

“물론 그것도 저쪽에서 협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나 가능한 것이지.”

결론은 하나였다.

러시아 황제가 더는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결국, 놈들의 주력군을 한 번 더 박살 내거나 적의 본토를 공격해야 한다는 건데…….”

어느 쪽이건 쉽지 않았다.

러시아의 방대한 영토 중에 저들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힐 만한 곳을 공격하려면 저들 영토 깊숙이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저들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다.

그럼 저들의 주력군을 박살 내기는 쉬운가?

발칸에 있는 러시아군은 사실상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언뜻 보기엔 괜찮아 보이긴 했다.

다만…….

“따로 노는 연합군과 힘을 합쳐서 러시아군을 물리칠 수 있을까?”

“…….”

“어떤가? 바흐, 가능성이 좀 있을 것 같은가?”

군경력이 없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어려워 보였다.

연합군은 겉으로 보기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오스트리아라는 유럽 전통의 강대국이 힘을 합치며 강함을 뽐내고 있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문제가 적잖았으니 말이다.

일단 서로 간에 지휘권 문제로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손발이 너무 안 맞았다.

“한 번도 합을 맞춰본 적 없는 군대가 같이 싸워봤자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마는…….”

“폐하, 지휘권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흐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연합군은 지휘권 문제만 얼추 해결되면 러시아군을 상대로 크게 밀릴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폐하께서 직접 친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명목상으로나마 연합군의 지휘권을 우리 쪽에서 가져올 수 있잖습니까.”

“……나보고 전선으로 가라고?”

“예, 폐하.”

순간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바흐 남작의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의심 이들이었다.

[바흐는 시기적절한 조언을 했을 뿐이네.]

‘저보고 전선으로 가라는 게 적절한 조언이에요?’

[적어도 지휘권 문제로 군대가 분열하는 것은 막을 수 있을 테니 적절한 조언이지.]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그걸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 그보다도 현장지휘관들이 용납하겠어요?’

[그건 자네가 합스부르크이기에 가능한 것이네.]

‘……?’

영감님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대뜸 가문 이야기를 꺼내셨다.

[지금 유럽에서 우리 가문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가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

‘영국 왕실이나 프랑스 부르봉, 러시아 로마노프 가문도 있잖아요.’

단순한 내 질문에 영감님의 얼굴이 잘 익은 파프리카처럼 붉게 물들더니 처음으로 내게 고함을 지르셨다.

[그런 떨거지들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을 비교하지 말게! 합스부르크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굳건히 버텨온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가문이야!]

‘어우……. 예, 죄송합니다.’

[지금은 하노버 놈들이 잘나간다고 해봤자 그놈들은 예전에는 우리 가문 사람들과는 감히 눈을 마주할 생각도 못 하고 말도 함부로 못 걸 정도로 한미한 가문이었네! 그리고 뭐? 로마노프?! 그런 머저리들을 어찌 우리 가문에 비할 수 있겠는가!]

영감님은 잔뜩 흥분하셔서는 말을 쏟아내셨다.

평소에도 울컥하시는 경향이 있긴 하셨지만 이처럼 화나신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영감님만 바라봤다.

[흠흠……. 잠시 흥분했군……. 무튼,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자네의 권위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이들이란 것이네.]

‘권위요?’

[그래, 권위 말일세.]

‘흠……. 그게 먹힐까요?’

[이번 전쟁에서 저들은 연달아서 실책을 저지르면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반면에 자네는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오던 러시아군을 요격하는 것도 모자라 폴란드까지 해방했네, 이쯤 되면 저쪽에서 말이 나오는 게 이상한 것이야.]

영감님의 말을 들으니 그럴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친정은 좀…….’

[어째서인가?]

‘지금 제가 자리를 비우면 제 자리를 대신에 해서 행정업무를 처리해 줄 사람이 없잖아요.’

[허허……. 바흐 남작과 브루크, 그리고 막시밀리안과 카를까지 있는데 무슨 말인가.]

‘그놈들을 믿으라고요?’

물론 그들을 못 믿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내게 충성을 바치는 신하들이었고 한 가문 아래 묶여 있는 형제들이었으니까.

다만 그들이 나를 중심으로 개편된 행정체계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당장 신료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던 슈바르첸베르크 공작도 살인적인 업무량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뒤를 이은 바흐 남작은 공작과 비교하면 조절된 업무량도 견디다 못해 쓰러지기 일쑤였고 말이다.

그 말인즉.

지금의 제국 행정에서 내가 빠진다면 당장 제국의 모든 것이 멈추어 설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친정은 불가하네.”

“폐하, 때로는 직접 현장에 가시는 것…….”

바흐 남작은 살짝 답답하다는 듯이 내게 친정을 권하려 했다.

나는 그런 남작의 말을 잘라먹으며 물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자네가 나를 대신하여 이 서류들을 전부 처리할 수 있겠나?”

“……은 폐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안전한 빈에서 업무를 처리하심이 좋을듯합니다.”

그러자 바흐 남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안전을 걱정해 주며 친정을 반대했다.

[그만큼 자네 업무량이 살인적이라는 뜻이지……. 그러지 말고 이번에 자네에게 과도한 업무가 몰리는 행정체계를 개편하는 것이 어떻겠나?]

‘에이……. 저는 성격이 특이해서 제가 직접 처리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자요.’

[그래도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냅다 달리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쓰러지고 말걸세.]

‘그럼 쓰러지기 전에 일을 다 처리하고 쉬면 그만이지요.’

[지금 그런 말이 아니라……. 후우……. 됐네, 자네가 그렇다니 내가 뭐라 하겠는가?]

영감님의 걱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내가 한창 공무원 일을 할 때도 주변에서 비슷한 말을 많이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면 나는 이런 강행군 속에서도 단 한 번도 과로나 스트레스로 쓰러진 적은 없다는 것이다.

“흠……. 그래도 친정이라는 카드를 버리기엔 조금 아까운 것 같은데…….”

바흐 남작의 친정카드는 제법 쓸 만했다.

러시아군이 다시금 전황을 뒤집은 상황에서 오스트리아가 주도하여 분열된 연합군을 수습하여 러시아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다?

이건 더 볼 것도 없었다.

“아버지라도 보내볼까?”

“프란츠 카를 대공 전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어차피 아버지는 평소에 사냥이나 다시면서 소일거리나 하시면서 시간을 보내시잖나.”

“그렇다고 해도……. 어찌…….”

어찌 자식이 아버지를 전쟁터로 밀어 넣냐는 말을 하려던 바흐 남작은 입을 다물었다.

굳이 그가 말한다고 해서 황제가 들을 것 같진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억지로나마 웃으면서 황제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뿐이었다.

“괘,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그렇지?”

[그렇지는 무슨……. 어휴…….]

* * *

한편 발칸에서의 승전소식을 전해 들은 러시아제국의 황제 니콜라이는 크게 기뻐하며 파스케비치와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이반이 전 제국민의 소망을 이뤄냈도다!”

“경축드리옵니다. 폐하.”

“실로 통쾌한 승리옵니다!”

오랜만에 들려온 승전소식은 니콜라이와 신료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영국놈들은 제 놈들이 유럽 제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육지에서는 우릴 당해낼 수가 없지요!”

“맞습니다. 섬나라 해적 놈들의 육군이란 것은 결국 제 놈들의 해군이 쏘아낸 포탄 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지요!”

하지만 키셀료프는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파스케비치 전하의 작전으로 흑해함대는 재기불능에 빠졌고 발칸 전선군도 큰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까?”

“허, 지금 그게 중요하오?!”

“중요하지요. 지금 분노한 영국함대가 도나우강을 틀어막고 아군의 보급을 끊는다면 파스케비치 전하의 부대는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

흥겨운 분위기에 시원하게 찬물을 끼얹는 그의 말에 그를 바라보는 신료들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키셀료프는 그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라도 수도에 준비된 예비병력과 보급물자를 파스케비치 전하께 보내어 고립된 군대를 구원하거나 지원해 줘야 합니다.”

“으음……. 옳은 말이로다.”

황제는 키셀료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공을 세운 이에게는 상을 줘야겠지! 지금 당장 파스케비치를 지원할 지원군을 편성하도록 이번에는 짐이 직접 그들을 사열할 것이야!”

때는 아직 찬 바람이 부는 초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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