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90화
언드라시? 안드라시?
러시아 황제의 급사로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드니 자연스레 내 업무도 줄어들었다.
그래봤자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던 것이 식사는 하고 살 수 있을 정도가 된 것뿐이지만……. 그게 어딘가?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얻은 내 귀중한 식사시간을 방해하는 이가 있었으니…….
“…….”
“……?”
집무실에서 가볍게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쳐들어와서는 말없이 내 식사를 감상하는 것이 아닌가?
“크흠…….”
너무 대놓고 쳐다보는 그의 모습이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황제가 위엄을 잃을 수는 없었기에 침착하게…….
“근위병!”
근위병을 불렀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근위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는 순식간에 이방인을 둘러쌌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열심히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었고, 말이다.
큼지막한 샌드위치를 단번에 입에 쑤셔 넣고는 기력보충용 커피를 때려 박아 대충 식사를 끝내고는 낯선 이방인에게 물었다.
“우음……. 음……. 자네는 누구기에 내 집무실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건가.”
“전하께서 절 부르셨잖습니까.”
“음……. 내가 불렀다고?”
그의 말에 잠시 기억을 뒤져봤다.
“아아……. 자네가 안드라시……. 귈러?”
“줄러 언드라시입니다.”
“그렇군. 귤러이 안드라시.”
근위병을 물렸음에도 언드라시의 표정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래, 내가 자네를 왜 불렀는지는 알고 있겠지?”
“저를 외무차관에 임명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잘 알아들었군.”
나는 구석에 쌓아둔 서류 더미를 뒤적여 임명장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름과 직위 칸이 비어 있는지라 백지수표처럼 원하는 것만 적어내면 되는 물건 말이다.
“지금 임명장을 써줄 테니 이것 받고…….”
“아뇨. 저는 전하의 제안을 거절하러 왔습니다.”
“……거절?”
새로운 노예가 생긴 것에 기뻐하며 신나게 서명하려던 내 손이 멈칫했다.
“외무차관직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저는 합스부르크를 위해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군……. 그럼 외무차관직이 싫은 건 아니지?”
“전하,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합스부르크를 위해 일하기 싫은 것과 외무차관직을 맡기 싫은 게 무슨 상관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사고방식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일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이보게 언드라시.”
“예, 전하.”
“자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네, 나도 자네들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야.”
“……?”
안 그래도 바빠죽겠는데, 괜히 안 하겠다고 투덜거리는 그의 말에 그동안 꾹꾹 눌러놨던 업무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지금 처리해야 할 서류가 몇 개인데!
“내가 마냥 자비로워서 반란을 일으킨 자네 족속들을 그냥 살려준 것으로도 모자라서 자비까지 베푼 줄 알았나?”
“전하, 그것은…….”
“이 제국에서 자네들처럼 능력 있는 사람들이 없어서 살려둔 것이야! 제국군의 고위지휘관 중에 괴르게이만 한 녀석이 단 한 놈이라도 있었으면 자네들은 전부 모가지였어!”
“…….”
“내가 그렇게도 마자르인들을 싫어하는데 왜 그들을 써먹는지 아는가? 자네들의 능력이 제국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야! 그런데 자네는 무슨 합스부르크가 어떠니 뭐니 하면서……. 으휴!”
언드라시는 숨겨진 뒷이야기를 듣고는 큰 충격을 받은 것인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렇게 한번 시원하게 질러주니 그동안 쌓인 업무 스트레스가 내려가는 것 같긴 했지만, 또 괜히 내 성질을 못 이겨서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쯧쯧쯧…….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군.]
‘뭐가요.’
[예전 같았으면 자네가 혼자 화나고 흥분한 것도 모르고 전부 언드라시의 잘못으로 돌렸겠지.]
‘에이……. 영감님, 제가 아무리 성격이 지랄 맞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할 말이 매우 많지만……. 지금은 나보다 저 친구에게 신경 쓰는 것이 좋아 보이는군.]
‘크흠…….’
언드라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입을 열 수도 없을 정도로 화가 나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가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언드라시의 입이 열렸다.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마지못해 헝가리인들을 기용하신다는 말씀이로군요.”
“으음……. 조금 전에는 내가 말이 조금 험했…….”
“폐하.”
언드라시는 그 자리에서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 * *
언드라시 줄러.
그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한 아버지 밑에서 나고 자라며 자연스레 그쪽 길로 빠져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합스부르크는 그의 적이었고 동포들을 억압하는 압제자였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는 지난 헝가리 혁명 당시에도 압제자에 맞서 헝가리 방위군에 투신했다.
하지만 혁명이 어찌 끝났던가?
정작 헝가리의 주류였던 농민들과 지주들은 혁명에 찬성하지 않았고 자신만만하게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던 혁명가들은 동포들과 싸워야 했다.
압제자들에게로 향했던 총구는 동족들에게로 향했고 독립이라는 대의로 하나 되었던 형제들은 서로를 탓하며 흩어졌다.
뜨겁게 불타올랐던 혁명의 불꽃이 불과 몇 주 만에 깔끔히 사그라든 것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에 맛본 첫 실패였다.
그날 이후로 언드라시는 합스부르크, 정확히는 현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를 증오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흥분이 가라앉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차가운 이성이 돌아오니 점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됐다.
과연 혁명이 옳았던 것인가?
헝가리는 정말 독립해야 했는가?
제국은 정말 압제자인가?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계속하던 차에 러시아가 제국을 침공하며 전쟁이 발발했다.
오랫동안 은거 중이던 언드라시는 그의 상관이자 헝가리 혁명의 영웅 괴르게이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곧장 그를 맞이하러 갔다.
분명 괴르게이 장군이라면 이 복잡한 문제에 해답을 내려줄 것이라 기대하며 말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괴르게이 역시 어딘가 예전과는 아주 달랐다.
이전에 혁명을 위해 온몸을 불 싸지르던 혁명의 횃불은 어디 가고 이제는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길 원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 각하를 이리 변하게 했는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헝가리를 지키겠다는 괴르게이의 말에 설득되어 그의 밑에서 복무했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폴란드 군단과 오스트리아군이 함께 작전을 벌인다고……?!’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들이 러시아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폴란드 군단이 어떤 이들인가 조국을 잃었음에도 독립을 위해 유럽을 떠돌아다니며 투쟁을 멈추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구국의 은혜도 저버리고 러시아, 프로이센과 함께 조국을 나눠 가지었던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은 것이다.
‘어찌……. 어찌 이런 일이……!’
그의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두 세력은 삐걱거리면서도 결국 러시아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고 아직 불확실하지만, 폴란드 독립이라는 성과까지 이뤄냈다.
이쯤 되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여태껏 내가 알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의 여러 민족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압제자였다.
그리고 그 주인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한창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즉위한 젊은 황제는 제국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서로 싸우기 바빴던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그의 상관이자 혁명의 영웅이었던 괴르게이마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지는 않지만,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던가?
심지어 자신이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축하해 줄 정도였다.
그동안 알고 있던 상식이 붕괴하며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 황제라는 인물에 관심이 생길 무렵.
황제가 자신을 불렀다.
처음에는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 자존심은 괴르게이 장군이 만들어준 핑곗거리에 사르르 녹아내릴 정도로 하찮은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황제를 직접 만났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황제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지만, 오히려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 보이는 그의 모습에 살짝 안심했다.
자신보다도 어려 보이는 젊은 황제에게서는 존경심이나 경외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합스부르크를 위해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거리낌 없이 황제를 도발했다.
이 발언으로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한번 시궁창에 처박혔던 마자르인의 자존심이 회복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황제는 분노했으나 자신에게 물건을 던진다거나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분노를 꾹꾹 눌러 담고는 어리석은 이를 가르치듯이 타이르는 어조로 말씀하셨다.
“나도 그대들이 싫네, 내가 마냥 자비로워서 그대들을 살려두는 줄 아는가? 짐이 그대들을 살려두는 것은 자네들의 능력이 제국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세.”
“……!!”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말에 망치로 머리를 수십 대는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충격이 몰려왔다.
‘능력이 있다면 반역자들도 쓰겠다는 건가……?’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그리고 얼마나 멋진 말인가!
황제는 자신에게 칼을 들이민 자들을 용서하는 것도 모자라서 능력을 인정하며 그들을 기용했다.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밑에서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전부 정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겠지……. 실제로도 그럴 능력이 있으니 저리 자신만만한 것이겠지.’
절로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의 오만함이었다.
더 무서운 점은 황제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던 혁명의 불길을 꺼트린 사람이 누구였던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젊은 황제였다.
지난 혁명에서 헝가리군이 제국군과 비교하면 모자라서 패배한 것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헝가리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온 것인가?
그것 역시 아니다. 헝가리는 그 어느 때보다 하나로 단결되어 있었다.
그럼 황제는 어떻게 헝가리를 무너뜨렸는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분명 헝가리인들은 전선의 장교들부터 병사들까지 하나로 단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황제는 무슨 수를 쓴 것인지 헝가리 시민들이 독립을 반대하게 했다.
그리고 그 황제는 자신의 적들까지 능력만 있다면 거리낌 없이 쓸 사람이었다.
개인의 감정이 어떻건 간에 상관없었다.
실제로 황제에게 온갖 몹쓸 말을 쏟아내고 그의 심복을 살해했던 코슈트나 이슈트반을 비롯한 국민정부의 구성원들이 살아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는 고개를 숙였다.
“폐하.”
“응?”
“폐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황제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언드라시를 내려다봤지만 정작 당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 * *
러시아 황제의 사망 소식으로 전선의 병사들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다만 지휘관급은 이런 평화 분위기 속에서도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오늘 아침, 새롭게 즉위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전쟁을 지속하실 생각이 없으시다고. 내게 친서를 보내셨다.”
“그럼 이대로 전쟁이 끝나는 겁니까?”
휘하 장교의 질문에 파스케비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에 했다.
“하지만 연합군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자 추가적인 공세를 해올 가능성이 있다.”
“가능성일 뿐이겠지요?”
“아니, 저들은 무조건 공격해 올 것이네.”
“…….”
파스케비치는 말했다.
“현지 정보원에 의하면 얼마 전에 프랑스군 본대가 긴 항해 끝에 이곳에 도착했다는군.”
“그럼……. 저들의 전력이 더 늘어난 것입니까?”
“그렇지.”
“아…….”
장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연합군을 아무리 물리쳐도 그들은 히드라의 머리처럼 새롭게 쑥쑥 솟아날 뿐이었다.
반면에 러시아군은 그 숫자는 많아도 전투를 치를 때마다 전력이 뭉텅이로 깎여나가고 있었다.
지금도 영국군을 크게 무찌르긴 했지만,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저들은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야.”
종전 협상을 할 때는 양측의 전황이 팽팽한 것보다는 한쪽이 유리한 것이 편했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상대는 그걸 들어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장교들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회의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암울해졌다.
“……하지만 적이 공격해 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가만있는 것은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