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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92화 (92/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92화

노인을 굴리는 나라는 없다

공공연하게 종전 협상 이야기가 오가고 있으니 행정부 내에서도 슬슬 전쟁 이후를 논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었다.

“폐하, 전후 헝가리의 자치권 문제에 대해…….”

“전후의 산업체계 개편은…….”

“국제무대에서 오스트리아의 역할은…….”

나는 벌써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이 심히 아니꼬웠다.

[또 심술부리는 건가?]

‘심술이라니요? 원래 정치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는 겁니다.’

[허허허, 최악의 상황이랄 것이 뭐가 있겠나? 어차피 러시아의 새로운 황제는 전쟁을 지속할 생각이 없을 텐데 말이야.]

‘글쎄요……. 저 같으면 이제까지 전쟁한 게 억울해서라도 전쟁을 계속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영감님은 오랜만에 활짝 웃으시며 나를 타이르셨다.

[하하하……. 자네는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 많군. 알렉산드르가 왜 전쟁을 이어가겠는가? 그놈은 귀족들과 눈치 싸움하느라 정신없을 텐데 말이야.]

‘왜 황제가 귀족이랑 눈치싸움을 해요?’

[전쟁으로 제국이 흔들리니 당연하게도 전쟁을 밀어붙였던 황제의 권력도 흔들릴 수밖에 없지.]

영감님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분명 전쟁을 결정한 것은 황제가 맞았지만, 그 밑에 있는 귀족 놈들도 동의했기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어차피 그건 죽은 전대 황제의 실책이잖습니까.’

[어허,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요. 내가 한 게 아닌데 왜 그 책임을 후대가 책임져야 합니까?’

[그게 정치의 본질일세, 내가 한 것이 아니라도 책임은 후임자가 지어야 하지.]

‘…….’

참으로 엿 같은 상황 아닌가.

내가 한창 공무원 일을 할 때도 그랬다.

실수한 것은 내가 아니라 과장이나 팀장, 혹은 다른 부서인데 비난의 화살은 내게 쏠리는 것 말이다.

지금이야 그런 일이 익숙했기에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처음에는 어떻게 했더라……?

그 순간 머리에 번개가 내려치는 기분이 듦과 동시에 목덜미가 섬찟했다.

‘……영감님.’

[왜 부르는가.]

‘러시아는 전쟁을 계속하려고 할 겁니다.’

[어허, 내가 그리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거늘 자네는 도저히 들을 생각이…….]

나는 영감님의 말을 중간에서 잘라먹었다.

‘전쟁이 전대 황제의 실책이라면……. 반대로 이번 황제의 성공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

‘그러니까 이번에 즉위한 황제가 이대로 전쟁을 끝내는 것은 집권 초기부터 실책을 떠안고 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지.]

‘그런 부담감을 떠안기는 싫으니 조금이라도 전쟁을 더 이어나가다가……. 이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영감님은 잠시 말이 없으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채신 모양이지.

[……전에 없는 강한 권력을 손에 쥐겠지.]

‘가만히 있으면 손안의 모래는 전부 빠져나가 버립니다. 저라면 그전에 뭐라도 해서 남아 있는 것을 지키거나……. 그 모래를 반짝이는 유리로 만들겠지요.’

[으음……. 비약이 너무 심하군.]

‘제가 러시아 황제라면 그랬을 겁니다.’

전대 황제가 병으로 급사하고 허겁지겁 왕위에 오른 젊은 황제는 당연하게도 주변의 신료들이나 귀족들의 기대를 안게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기대를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둘째 치고 말이다.

이렇듯 많은 이들의 관심과 기대를 한몸에 받는 젊은 황제에게는 그들을 만족시킬 성과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게 전쟁이지요.’

[으음…….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나 원래 알렉산드르는 즉위하자마자 전쟁에서 발을 빼버렸다네.]

‘바로 그건 어떤 전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크림에서 싸웠던 것을 말……. 아!]

영감님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말씀하시길.

[아직 러시아 본토를 공격한 적이 없군!]

‘대부분의 전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와 폴란드, 그리고 발칸 쪽에서 벌어졌지요. 사실상 러시아는 남의 땅에서 싸운 게 전부입니다.’

[……그러니 서방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저들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다…… 고 봐야 하나?]

‘피해가 전혀 없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평소에도 영국과의 대립으로 온갖 종류의 봉쇄와 제재에 익숙해진 러시아에는 그럭저럭 버텨낼 만한 수준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으음…….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로군……. 러시아가 전쟁을 더욱 지속하는 것이라면 우린 큰일 아닌가?]

영감님의 말에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뇨 우린 원하는 것만 챙기고 빠질 테니까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서방과 러시아가 격렬히 치고받으면 우리야 좋지요.’

[으, 으응?]

어차피 우리와 러시아와의 전쟁은 서로 동맹임에도 뒤통수칠 궁리만 하던 두 세력 간의 충돌이었다.

그런데 그 이해당사자인 전대 황제가 죽었고 우리는 영토를 수호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모자라 폴란드 땅까지 한입 베어먹었다.

그 말인즉.

우리는 이쯤에서 빠지는 게 이득이라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영감님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나는 영감님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브루크.”

“예, 폐하.”

“당장 군비로 들어가는 자금을 공장설립 지원금과 공적 사업확충에 돌리게.”

“……폐하?”

내각의 무역장관인 브루크는 방금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다시금 물었다.

다른 이들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폐하, 아무리 종전 분위기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군비를 축소하면 서방에서도 말이 나올 겁니다.”

“부올, 그런 군소리를 줄이라고 자네가 거기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내 말이 조금 억지인 것은 잘 알았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러시아와 서방이 신나게 치고받는 동안 제국은 산업혁명의 후발주자에서 선발주자로 뛰어올라야 했다.

현재 제국 전역에 경공업 시스템을 육성하고 있지만, 고작 몇 년 안에 모든 것을 끝낼 수는 없었다.

거기에 전쟁까지 겹쳤으니 경제발전이나 성장은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기 뒤에는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러시아제국의 황제 니콜라이가 죽고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르가 새로운 황제가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파릇파릇한 영계가 냉혹한 국제외교에 발을 들여놨다 이 말이다.

[……새로운 황제가 자네보다는 열 살 정도는 더 많다는 것은 알고서 하는 말인가?]

‘어허, 저는 전생까지 합치면 마흔 살은 거뜬히 넘겼으니 상관없습니다.’

[살아온 날로만 따지면 새로운 황제보다 어린 것이 사실로 보이네만.]

영감님이 또 뭐라고 하셨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러시아와 종전 협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서방의 종전 협상을 훼방 놓으며 저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이걸 해결해 줄 만한 능력자를 한 명 알고 있었다.

* * *

전선에서 지지부진한 논의가 오가며 파스케비치가 전투를 결심하고 있을 때쯤.

한창 니콜라이의 장례식이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각국 외교관들의 치열한 눈치싸움이 오가고 있었다.

“흠흠……. 각하.”

“음? 아, 자네로군.”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허허, 세상사를 다 내려놓고 지내는 노인이 평안하지 못할 게 무엇인가? 나는 언제나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네.”

메테르니히가 러시아의 젊은 황제와 대화를 나눴던 날 이후부터 각국의 외교관들은 하루가 멀다고 그를 찾아왔다.

다들 그의 안부를 묻는 척하며 은연중에 오스트리아의 내부정보를 하나라도 더 듣거나 오스트리아의 젊은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떠보려 했다.

하지만 메테르니히가 누구인가?

나폴레옹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유럽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이후에도 빈 체제를 완성하여 유럽의 국가 질서를 재편한 사람이며 수십 년간 유럽외교를 쥐고 흔든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런 메테르니히에게 정보를 빼내려는 외교관들의 모습은 어린아이의 재롱과도 같았다.

“음? 아, 미안하군……. 나이를 먹다 보니 몸이 좋지 않아 꾸벅꾸벅 졸게 되는군.”

“아, 그것 말인가? 음……. 뭐였더라?”

“그런 것이 있었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허허.”

메테르니히는 다른 이들의 민감한 질문에 때로는 기억이 안 나는 척, 피곤하여 잠든 척, 못 알아들은 척하며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개중에 몇몇은 강경한 어조로 메테르니히를 압박했지만, 그는 유럽을 거의 정복할 뻔한 나폴레옹 앞에서도 당당히 자신의 할 말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지 말고 좀 속 시원히 말해주십시오!”

“지금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인지 알고서 그러는 것인가?”

“이젠 다 늙어서 은퇴하신 퇴물이시지요.”

“허허허…….”

자신을 퇴물이라고 부르는 한 젊은이의 말에 메테르니히는 껄껄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다 늙어빠진 퇴물은 슬슬 낮잠이나 잘 생각인데, 이만 돌아가 주는 게 어떤가?”

“……각하!”

상대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이자 메테르니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돌아가라고 했네.”

“……그런다고 제가 돌아갈 것 같습니까?”

젊은이의 대답에 메테르니히는 다시금 방긋 웃으며 고집을 부리는 젊은이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어찌할 건가? 나는 자네가 알고 있는 이들보다 더 많은 이들을 알고 있네, 자네 뒤에 누가 있지? 웰즐리? 러셀? 필? 아……. 필은 재작년쯤에 죽었군.”

갑자기 평소에는 얼굴도 보기 힘든 까마득한 거물들의 이름이 언급되자 메테르니히의 맞은편에 앉은 젊은이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정도는 심하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가 두려워한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런던의 양복점에서 자네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

“모르긴 몰라도 자네가 런던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자네의 총리는 경질되고 새로운 인물이 그 자리를 대신에 하고 있을 걸세, 어쩌면 자네 자리도 다른 이가 대신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

“물론 내가 연합왕국의 총리를 떨어뜨리고 자네의 자리를 앗아가는 것은 아닐세, 나는 그저 런던에 있는 내 친구들에게 몇 가지 소식을 알려줄 뿐이지.”

메테르니히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자네라면 공손하게 사과하고는 조용히 돌아갈 것 같은데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제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메테르니히는 쩔쩔매는 젊은이에게 나가보라는 듯이 손짓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마지막 손님이 떠나자 황제의 아버지이자 전대 황제의 동생인 프란츠 카를 대공이 그를 찾아왔다.

“메테르니히 경,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이오?”

“허허, 제가 또 뭘 꾸몄다고 그러십니까?”

“요즘 이리저리 서방의 외교관들을 만나러 다니는 것이나 러시아 측과 접선하며 뭔가를 꾸미는 것 같은데……. 아들놈에게 무슨 명령을 받은 것이오.”

“그런 것 없습니다.”

메테르니히의 말에 프란츠 카를 대공은 말없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그렇다니 그런 것이겠지, 그럼 나는 가서 말 좀 타고 올 테니 자네는 적당히 일 좀 보게~”

“예, 전하.”

“흥흥~”

대공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메테르니히는 대공이 나가자마자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며 한참 동안 문을 노려봤다.

그리고 문밖에서는 프란츠 카를 대공이 말없이 벽에 기댄 채로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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