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93화
종전으로 가는 길
새로이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는 장례식이 끝남과 동시에 전쟁으로 골머리를 썩였다.
이대로 전쟁을 끝내자니 얻은 것도 없이 폴란드 땅만 토해내게 생겼고, 그렇다고 전쟁을 계속하자니 여력이 되지 않을뿐더러 귀족들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그의 생각은 종전으로 무게추가 기울긴 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자신이 거스르는 게 맞는 건지 하는 생각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와중에…….
“전쟁은 계속하셔야지요.”
“……?”
오스트리아의 전권대사로 장례식에 참가했던 메테르니히 후작은 그에게 전쟁을 권했다.
황제는 전쟁의 당사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전쟁을 권하는 상황에 당황하여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귀국과 전쟁 중인데……. 경께서는 내게 전쟁을 권하시는구려.”
“그 길이 러시아나 오스트리아를 위해서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간의 이득이 된다……. 어째서입니까?”
메테르니히는 가볍게 차를 한잔하며 말하길.
“어차피 지금 전쟁을 끝내봤자 러시아는 지난번에 무력으로 합병했던 왈라키아와 몰도바를 토해내는 것은 물론 폴란드도 뱉어야 할 겁니다.”
“……누가 순순히 넘겨준다던가요.”
“그리되실 겁니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힘을 모아서 압박해 오는데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메테르니히의 말에 황제는 말없이 웃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다스리게 될 러시아는 후진적이고 낙후되었으며 서방에서 말하는 문명국에서도 상당히 동떨어진 곳이었다.
인민들의 삶은 중세 시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서로 얼마 없는 자원을 가지고 다퉜다.
그러는 와중에도 수도의 귀족들은 연일 호화로운 파티를 열며 온갖 사치를 부리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나라 꼴이 두 눈 뜨고 볼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나라가 이 모양인데 군대라고 멀쩡할까?
다른 유럽국가에서는 진즉에 사라진 농노제가 계속해서 유지되는 러시아는 반란을 우려하여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도 문맹률이 유독 높은 탓에 그만한 병력을 지휘할 장교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고 군사기술은 후진적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쟁으로 경제는 파탄 나기 직전이었으며 민생은 다시금 나락으로 가버렸다.
이런 러시아가 서방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건 힘들겠지요.”
한참을 고민하던 황제의 말에 메테르니히는 방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혼자라면 말이지요.”
“……?”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황제가 당황했다.
“그럼 러시아가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오?”
“프로이센이 있잖습니까.”
“그들은 왜 언급하는지 모르겠군요.”
알렉산드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시치미를 뗐지만, 메테르니히는 여유롭게 웃으며 그를 압박했다.
“폐하,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밀월관계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밀월을 그냥 내버려 뒀는지를 생각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정말로 그리 생각하신다면 폐하께서도 조만간 알게 되실 겁니다.”
“…….”
알렉산드르는 차를 마시는 것도 잊고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메테르니히를 바라봤다.
러시아의 지배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메테르니히는 여유를 잃지 않으며 차를 들이켰다.
“향이 좋군요.”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메테르니히와 황제는 말없이 찻잔만 들었다 놨다 하며 눈치싸움을 이어갔고 결국 황제 쪽에서 먼저 백기를 들었다.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직설적이시군요. 무릇 군주는 자기 생각을 아랫사람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참 이상하군요. 제 아버지께서는 진정한 군주는 자기 뜻을 신하들에게 관철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르고.
메테르니히가 입을 열었다.
“우리 폐하께서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사이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시더군요.”
“고작 그것뿐입니까?”
황제의 물음에 메테르니히는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하기를.
“대신 다른 국가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시지요.”
“……하느님 맙소사.”
자시들과 종전 협상을 하되 서방과는 계속 전쟁을 해달라는 메테르니히의 뻔뻔한 요구에 알렉산드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이내 분노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짐을 우롱하려는 것이오?!”
“그럴 리가요.”
“그럼 오스트리아는 우리는 싸우게 내버려 두고 자신들만 전쟁에서 쏙 빠지려는 것이겠군!”
“그렇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는 메테르니히의 모습에 알렉산드르가 크게 분노하며 소리쳤다.
“도대체 그대들은 신의라는 것이 있긴 한 거요?! 전쟁 이전엔 아버지를 속여먹더니, 이번엔 서방을 속여먹으려 드는군!”
“속여먹다니요? 저희는 애초에 그들과 힘을 합친 적도 없습니다.”
“……뭐?”
메테르니히의 말에 황제의 분노가 사그라들며 허탈하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그건 또 무슨 궤변이오.”
“한번 떠올려보시지요. 폐하, 분명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난 전쟁 기간 내내 오스트리아가 서방과 손을 잡고 함께 행동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건…….”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철저하게 자신들의 영토만 지키면서 단독으로 러시아와 싸웠을 뿐이다.
“하다못해 저희가 저들에게 보급품이라도 보낸 적이 있었는지요?”
“…….”
그 또한 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홀로 러시아에 맞서 싸웠다.
당장 러시아가 국경을 뚫고 들어오는데 다른 이들을 도울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메테르니히는 이 점을 파고들었다.
“그러니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단독으로 전쟁을 벌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억지라니요? 저희는 공식적으로는 서방국가 중 누구와도 동맹을 맺은 적이 없고 힘을 합쳐 움직인 적도 없습니다.”
“그건…….”
알렉산드르는 무언가 반박하려 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곰곰이 되짚어보니 오스트리아를 먼저 공격한 것도 러시아였고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홀로 싸움을 이어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슬슬 적당한 선에서 협의를 보고 전쟁을 끝내자는 것이지요.”
“…….”
“빈의 폐하께서는 폴란드의 독립과 합스부르크계 왕족이 폴란드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바라십니다.”
폴란드를 내놓으라는 그의 말에 알렉산드르가 단호히 선을 그었다.
“폴란드는 안 되오.”
“그럼 협상은 끝이로군요.”
메테르니히는 더는 돌아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부디 폐하께서는 선대 황제와는 달리 현명한 통치를 하시길 바랍니다.”
정말 협상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알렉산드르가 흔들렸다.
‘이대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지속해서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전쟁 때문에 더욱 비대해진 군대를 유지하느라고 국고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런데도 각지에 군대를 배치할 곳이 많아서 정작 전선에 보낼 수 있는 군대는 제한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전선에 배치된 병력을 따로 빼내어 발칸 쪽으로 돌린다면……. 어쩌면 서방국가들을 상대로 승기를 잡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황제가 그를 불러세웠다.
“이보시오 메테르니히 경.”
“예, 폐하.”
“……폴란드 말고 다른 제안은 없는가?”
“없습니다. 그럼 이만.”
메테르니히는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이 새로운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홀로 남게 된 알렉산드르는 허탈하다는 듯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오스트리아가 협상을 원한다…….”
* * *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종전으로 여러 말이 오갔다.
특히 영국에서는 번번이 정권교체 각만 노리던 보수당에서 이를 집요하게 물어뜯으며 연일 총리의 퇴진을 밀어붙였다.
거기에 여왕 또한 총리를 불신하며 의심 어린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으니 존 러셀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가 닥친 셈이었다.
이쯤 되니 존 러셀은 은연중에 프랑스가 먼저 종전 협상 이야기를 꺼내길 바랐다.
그래야 자신도 그에 편승하여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종전 협상에 들어갔을 테니 말이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사정이 조금 나았다.
왜냐고?
쿠데타로 어마어마한 권력을 틀어쥔 나폴레옹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모조리 추방하거나 죽여 버린 탓에 국내에서 그를 반대하는 이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말이다.
일단 파리의 혼란은 가라앉았지만, 지방의 혼란은 여전했고 나폴레옹을 반대하는 이들 역시 만만찮은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당연하게도 지방으로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했지만 러시아 원정에 군을 파견하여 빈자리가 생기니 반대세력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프랑스의 대다수 시민이 나폴레옹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시민들의 지지라는 않는 그것은 언제든지 갈대처럼 흔들릴 수 있는 것이었기에 나폴레옹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각하, 우선은 러시아와 종전 협상을 끌어내어 전쟁으로 묶여 있는 병력을 본토로 데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 종전 협상을 사실상 프랑스의 승리라고 알리며 시민들을 달래야겠지요.”
“그렇겠지.”
하지만 그런 상황임에도 나폴레옹은 절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런 상황일수록 지도자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나폴레옹 개인의 카리스마……. 아니, 숙부인 나폴레옹 황제의 카리스마만으로 모인 이 부실한 집단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니 말이다.
“러시아로 간 대표단에서는 별 소식이 없나?”
“오스트리아도 러시아와 협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오긴 했습니다.”
“영국은?”
“그쪽은 아직 눈치만 살피는 듯합니다.”
“쯧……. 기왕 결정되었으면 빨리빨리 처리할 것이지 왜 그리 눈치만 보고 있단 말인가?”
나폴레옹은 영국이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종전 협상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없었다.
사람들은 전쟁에서 한창 승기를 잡고 있을 때 먼저 협상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고 승자의 아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창 전황이 팽팽할 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굴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시민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나폴레옹이 먼저 러시아에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상대가 먼저 내밀면 모를까.
“러시아 놈들은 절대 먼저 협상하자고 나올 녀석들이 아니야.”
“선대 황제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새로운 황제가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도 있잖습니까.”
“오스트리아가 없었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예? 오스트리아요?”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믿지 않았다.
지금이야 함께 러시아와 싸우고 있지만 그게 어디 저들이 원해서 참전했던 것인가?
“오스트리아의 황제는 이번 전쟁을 기회로 우리 힘을 빼놓으려고 한 것이야.”
“각하, 그렇다기엔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오스트리아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본토를 공격당해 제법 피해가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료들의 말에 나폴레옹은 혀를 찼다.
“쯧쯧……. 이리들 시야가 좁아서는 어디 쓰겠나?”
“그게 무슨…….”
“오스트리아가 본토를 침공당했다는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그 이후 오스트리아의 대응이 어땠는지 기억하는가?”
“대응이라시면…….”
나폴레옹은 답답하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군의 기습 침공을 눈치채자마자 병력을 동원하여 몇 달 만에 십만이 채 안 되는 병력을 그 몇 배로 불리지 않았는가.”
“아……. 그렇지요.”
“그런데 그게 왜 문제입니까? 그건 당연한 일이잖습니까.”
“쯧쯧쯧……. 만약 프랑스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 보게 우리가 오스트리아처럼 빠른 병력 동원이 가능했겠는가?”
“그야…….”
불가능했다.
당장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동원령을 내렸음에도 일 년이 지나서야 겨우 병력을 쥐어짜 내어 원정군을 보내지 않았던가?
심지어 본대는 일 년을 더 소모하고 나서야 발칸으로 보낼 수 있었다.
“지금 오스트리아는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힘을 숨기고 있네.”
나폴레옹은 확신에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