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94화 (94/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94화

보증?

메테르니히로부터 협상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아버지로부터는 메테르니히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바흐 남작을 비롯한 몇몇 신료들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내게 조언하길.

“폐하, 메테르니히 경은 지난 빈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이후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을 이렇게 기용하심은…….”

“메테르니히 경은 막후에서 정부를 주무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인물입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 나라가…….”

“메테르니히 경의 외교적 수완을 낮잡아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늙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능력 또한 낡았을 가능성도…….”

다들 메테르니히가 복귀하여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까 봐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그를 깎아내렸다.

내가 보기엔 이들이나 메테르니히나 전부 쓸 만한 카드일 뿐이었다.

저들이 지금 땍땍거리는 것은 그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메테르니히가 지닌 이름값은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가?]

‘영감님은 메테르니히 경이 돌아오고 나서 그분의 조언을 듣고는 하셨지요?’

[그랬지.]

‘그런데 왜 그분 조언을 안 들으셨습니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분명 내가 훑어봤던 영감님의 기억 속에서는 메테르니히에게 조언을 받는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영감님은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인 메테르니히의 조언을 그냥 무시했다.

[왜긴? 그 노인네가 하도 내 일에 사사건건 끼어들어서는 자기가 총리인 것처럼 으스대지 않나.]

‘……?’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뭐 메테르니히의 말이 틀린 것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그때 당시에는 자꾸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 짜증 나더군.]

‘아, 예…….’

아무래도 영감님은 메테르니히고 나발이고 자기 할 일에 사사건건 잔소리를 늘어놓는 영감탱이가 싫었던 모양이다.

근데 그건…….

나는 영감님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영감님은 뭘 보냐는 듯이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닙니다.’

잠시 신료들의 징징거림에서 벗어나 영감님과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신료들이 입을 꾹 다문 채로 가만있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닫은 것이었다.

“흠흠……. 그래서 자네들은 짐에게 메테르니히를 끌어내리기라도 하자는 건가?”

“그, 그건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그럼 어쩌자는 것인가?”

정작 메테르니히를 찍어내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니 신료들은 몸을 사렸다.

정작 나서서 메테르니히를 찍어낼 용기도 없는 것들이 나보고 대신 처리해 달라는 모습을 보니 이젠 웃음만 나왔다.

“허, 그럼 그 건은 이만하지.”

지금 쌓여 있는 업무만 보면 메테르니히도 정권을 틀어쥐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신의 영지로 줄행랑칠 게 분명했다.

“일단……. 전후복구를 위한 자금이 필요하네, 그렇지 않은가 브루크?”

“예, 폐하.”

지난 전쟁 동안 우리의 주요 산업지대 중 하나인 보헤미아 지역이 러시아군의 침공에 피해를 보았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다거나 도시가 피로 물들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지만, 러시아 놈들이 메뚜기 떼처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것이 좀 있었다.

거기에 전쟁으로 멈춰선 산업을 다시금 돌리려면 기름칠을 해줘야 했는데, 여기에도 돈이 들어갔다.

“그뿐만이 아니라 조만간에 있을 헝가리 대관식과 동시에 치러질 전국 입헌선거에 쓰일 자금도 확보해야 하고……. 쓰읍…….”

어째 돈이 들어오는 것은 찔끔찔끔 들어오는데, 나가는 곳에서는 뭉텅이로 빠져나가니 무척 속이 쓰렸지만, 이 모든 것이 백 보 전진을 위한 기반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참았다.

그중에서도 입헌선거는 향후 오스트리아의 백 년을 책임질 중요한 일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헌법을 뜯어고치고 의회를 대대적으로 손봐서 제국 내의 각 민족이 서로를 맹렬히 물어뜯는 장소로 바꿔놓아야 했다.

[이보게 지금 제국에 필요한 건 통합과 단결…….]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예요.’

[…….]

영감님은 통합과 단결만이 제국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내게 말씀하셨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미래의 제국이 전쟁에서 패했다고 사방으로 찢어진 것이 단결이 되지 않아서인가?

아니다!

영감님의 기억을 샅샅이 훑어봤을 때,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통합되어 있고 단결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서로 찢어지기를 원했을까?

제국을 외양간이라 해보자.

그 안에는 소나 양, 염소 등등 여러 동물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집의 굴착기가 외양간을 후려쳐서 집을 무너뜨려 버렸다.

졸지에 집을 잃은 동물들은 어찌할까?

‘알아서 제 살길 찾아 떠나는 거죠.’

[그럼 결국 전쟁에 져서 그렇다는 게 아닌가?]

‘아뇨. 영감님 말대로 외양간의 동물들이 정말로 하나로 단결했다면 힘을 합쳐서 외양간을 다시 세우고 울타리를 고쳤어야죠.’

[그게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하자면…….’

외양간은 모든 동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동물들만을 위한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다른 동물들은 외양간이 무너지건 말건 제 살길 찾아서 떠난 것이겠지.

[…….]

영감님은 충격을 받으셨는지 말이 없으셨다.

나는 그런 영감님을 뒤로하며 신료들에게 찬찬히 명령을 내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급하게 자금을 끌어오되 나중에 뒤탈이 적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네.”

“그렇다면 서방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것이 가장 빠를 것입니다.”

“으음……. 브루크, 그건 이미 몇 번 써먹었잖나.”

“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요.”

이미 서방에서 들여온 차관이 상당했다.

그런데 여기서 돈을 더 빌리자고?

“서방에 고개를 숙이자는 건가!”

내가 살짝 머뭇거리자 바흐 남작이 기가 막히게 치고 들어오며 브루크를 나무랐다.

하지만 브루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말하길.

“필요하다면 고개도 숙여야지요. 지금은 저들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위에 있다는 걸 인정하시지요.”

“허, 우리가 그들보다 부족한 게 무엇인가?!”

“돈이죠.”

그의 말대로였다.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제국이라는 자부심과 오랜 역사와 전통, 그걸 뒷받침해 주는 튼튼한 기술력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지만 딱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건 돈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의 특성상 역사적으로 주변국들과 끝없는 마찰을 빚으며 전쟁이 끊일 수가 없는 곳이었다.

당장 동유럽 전통의 강대국인 러시아와 국경을 맞댔고 유럽의 병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아직은 그 기세를 유지하는 오스만과도 국경을 맞댔다.

그뿐인가?

이탈리아에서는 호시탐탐 통일 이탈리아를 노리는 사르데냐가 있었고, 독일 지역에서는 독일패권을 노리는 프로이센이 있었다.

그야말로 사방이 적으로 포위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서방은 어떤가?

섬나라인 영국은 자유무역이라면서 세계 각국에 자기 물건을 팔아치우며 대서양에서 인도양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경제블록을 만들어놨다.

프랑스 역시 스페인이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통에 사실상 적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 없었다.

거기에 영국의 뒤를 이어서 산업혁명에 뛰어들어 큰 성과를 거두었고 방대한 식민지를 바탕으로 튼튼한 경제블록까지 완성했다.

이 두 강대국이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한 오스트리아에 해외확장이니 시장확대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서방과 러시아의 전쟁이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국과 프랑스에서 추가적인 차관을 들여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당장 전쟁하는 데 쓸 돈도 없는데, 우리에게 빌려줄 돈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브루크, 차관을 제외한 다른 방법은 없는가?”

“차관을 제외하자면……. 국채를 발행하여 억지로 사업 규모를 키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돈을 더 풀자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만……. 추천해 드리는 방법은 아닙니다.”

“어째서인가?”

브루크 경은 잠시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내게 말했다.

“이미 수많은 차관과 여러 공적 사업에 전쟁까지 끼어서 국가재정이 압박을 받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부채를 더 늘렸다가는…….”

“그대로 꼬꾸라지겠군.”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채를 더 늘리는 것은 사실상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치독일에서 재무장 당시에 썼던 MEFO어음처럼 이중장부를 사용하여 억지로 경제를 활성화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내가 조절하기엔 너무 섬세한 작업이었다.

이렇게 되면 남은 방법은 증세뿐이었는데, 선거를 앞두고 세금을 올리는 것은 사실상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돈을 빌려오는 것도 안 되고 그렇다고 세금을 올리는 것도 힘들었으니 남은 것은 하나였다.

‘프로젝트 규모를 조금 줄여야겠네.’

어디부터 칼을 대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내 눈치를 살피던 브루크 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폐하.”

“무슨 일인가.”

“국채를 더 발행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에 고구마로 콱콱 막혀 있던 목구멍에 사이다를 들어붓는 듯한 청량감과 함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아니, 그런 것이 있으면 진즉에 말했어야지!”

“……하지만 조금 위험한 방법입니다.”

“얼마나 위험한가?”

“돈 문제로 제국이 갈라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 일단 말해보게.”

나중에 갈라서더라도 지금은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다.

“현재 오스트리아의 재정과 헝가리의 재정은 분리되어 각각 운영되고 있잖습니까.”

“그렇지.”

지난 혁명 이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점령되어 총독령으로 변경되어 운영 중이긴 했지만, 일단은 재정과 외교에 대한 권한은 총독에게 있었다.

그리고 총독은 아직 헝가리 왕위를 유지하고 계신 숙부님께 그걸 보고했고, 거동이 불편하신 숙부님 대신에 섭정인 내가 그것을 관리했지만……. 불필요한 절차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앞으로의 공사대금은 헝가리 총독령에서 발행한 어음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헝가리 어음으로 대체한다?”

“예, 폐하.”

“하지만 헝가리 중앙은행에 그렇게 무작정 돈을 찍어낼 만한 금괴가 보관되어 있던가?”

내 질문에 브루크 경이 눈을 빛냈다.

“없습니다.”

“뭐?! 지금 폐하의 앞에서 말장난을…….”

그러자 바흐 경이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브루크가 내 관심을 끄니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까 봐 걱정한 것이겠지.

“바흐, 지금 이야기를 듣고 있잖나.”

“아, 예……. 죄송합니다. 폐하.”

“그래서 금괴가 없는데, 어찌 어음을 찍어내겠는가? 애초에 자본가들이 그걸 받아주겠는가?”

아무리 내 권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자본가들은 본디 곧 죽어도 손해는 안 보려 하는 이들이었다.

내가 강제로 그들에게 어음을 쥐여준다고 한들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일을 대충하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 아닌가?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이 어음의 안정성을 보증해 주신다면 자본가들도 받아들일…….”

“잠깐……. 방금 뭐라고?”

“폐하께서 보증을…….”

브루크는 내게 보증을 서달라고 했다.

‘원장님이 보증은 친구 사이에도 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었는데…….’

[그 보증이 아니잖나.]

‘비슷한 거 아닌가요?’

[…….]

영감님은 말이 없으셨다.

“흠……. 보증은…… 좀 위험한 거 아닌가?”

“위험하진 않습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중장부를 작성하는 것에 가깝지요.”

브루크 경의 말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게 위험한 거 아닌가?’

하지만 브루크 경도 이런 내 걱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설명하기를.

“폐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게 완벽히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까지 위험한 일도 아닙니다. 결국은 국가부채를 조금 더 늘리는 수준이지요.”

“으음……. 그래도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

“원래 모험을 위해서는 도전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렇긴 한데…….”

브루크 경은 능력도 있고 믿을 만한 자였지만 보증이라는 단어는 갑작스레 불안감을 일으켰다.

[내가 듣기에도 괜찮아 보이는데, 그냥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 어떻겠나.]

‘하지만……. 보증 잘못 서면 망한다고…….’

[……그냥 찍게.]

결국, 영감님의 강요로 도장을 찍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