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95화
책임자는 누가 책임 져 주는가?
파스케비치는 생각과 동시에 움직이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적이 먼저 공격하기 전에 적을 공격한다.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이 수십만 대군을 동원한 일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인간이 움직이려면 충분한 식량과 물, 그리고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길이 필요했다.
그 사람들의 숫자가 수십만에 말과 대포, 거기에 화약과 탄환 같은 보급품이 합쳐진다면 그 행렬을 어마어마하게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부대를 여럿으로 나누고 개인 간의 행장은 최소한으로 유지한다.”
“그럼 보급품은 어찌 운반하실 생각입니까?”
여기서 파스케비치는 다른 장군들이라면 하지 않았을 결정을 내렸다.
“필요한 만큼만 챙기고 나머지는 버린다.”
러시아의 장교들은 그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보급품을 버리자는 말씀입니까?!”
“각하, 그것도 안 될 일입니다.”
“차라리 병사들에게 보급품을 나눠 들게 하여서라도 그건 다 챙기시는 것이…….”
장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보급품을 챙겨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것이 정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파스케비치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보급품은 전투를 딱 한 번 정도 치를 수 있는 양이면 충분하네, 나머지는 버리게.”
“각하!”
“어차피 이번 공격이 실패하면 보급품이 얼마나 더 남아 있건 간에 전쟁의 승패를 뒤집을 수는 없네.”
“하지만…….”
파스케비치는 언제나 유하게 다른 이들을 대했던 것과는 달리 장교들을 다그쳤다.
“그만! 더는 아이처럼 징징거리지 말게, 이번 전투에서 패배하면 모두 끝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전투에 임하여 적을 무찌를 생각이나 해!”
“……알겠습니다.”
“좋아, 지금부터 작전을 설명하겠다.”
* * *
러시아군의 움직임은 얼마 가지 않아 연합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러시아군이 움직였다고?”
“슬슬 본토로 돌아가려는 모양이로군.”
“슬슬 전쟁이 끝나가기는 한 모양이야.”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이 움직였다는 소식을 저들이 본토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생각했다.
“러시아군이 움직였다고?!”
“예, 각하.”
“젠장……. 젠장……! 지금 프랑스군은 무얼 하느냐?!”
“그야……. 철군 준비를 서두르고 있겠지요.”
“이런 아둔한 자들 같으니……!”
반면에 래글런 남작이 지휘하는 영국 원정군은 러시아군이 움직인다는 말에 등에 불붙은 소처럼 화들짝 놀라서는 여기저기 지원을 구하고 다녔다.
“생 아르노 경!”
“무슨 일이시오.”
“큰일 났소! 러시아군이 움직였단 말이오!”
“그건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리도 태평하게 있단 말이오!”
래글런 남작의 말에 프랑스의 육군 원수 생 아르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태평이라니요? 래글런 남작께서는 지금 제가 치료받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처럼 생 아르노는 요즘 들어 부쩍 몸이 좋지 않아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런 탓에 지휘소를 비우는 일도 잦았고 말이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들을 우리가 왜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오?”
“저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하하하!”
래글런 남작의 말에 생 아르노 원수의 웃음이 터져 나오더니 그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래글런 경, 듣기로는 영국에서도 러시아에 외교관을 보냈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지요.”
“그럼 당신도 러시아의 황제가 각국의 외교관들과 협상에 나섰다는 것쯤은 들었을 것 아니요?”
“그건 그렇지만……. 저들이 움직이는 것 역시 사실이잖습니까!”
생 아르노는 래글런 남작의 말에 반박하려다가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끄응……. 그건……. 일단 나중에 말하지요.”
“러시아군은 지금 오고 있단 말이요.”
“나중에 하자고 했잖소!”
결국, 래글런 남작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군영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사르데냐군영과 오스만군영도 들려봤지만 그들 역시 조만간 협상이 벌어질 텐데 괜한 군사행동으로 협상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아 했다.
“허……. 어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분명 러시아군은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
정찰병들의 보고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결과를 정해놓고 과정을 거기에 끼워 맞추고만 있었다.
그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사실에 탄식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영국군만으로 러시아군을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당장 이곳으로 지원 올 수 있는 부대가 있는 것도 아닌데…….’
래글런 남작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어떻게 하면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말이다.
뿔뿔이 흩어진 러시아군이 발칸 곳곳에서 모습을 보인 가운데 래글런 남작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밖에 없군.’
래글런 남작이 영국군, 나아가 연합군의 미래를 결정짓는 위대한 결단을 내린 바로 다음 날.
프랑스 원정군 선봉대의 사령관이자 현재는 부사령관을 맡은 피에르 보스케 장군이 래글런 남작을 찾아왔다.
아무래도 러시아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것이었다.
하지만…….
“다들 어디 간 것인가.”
“화, 확인해 보겠습니다!”
영국군의 군영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다급하게 무언가에 쫓겨 도망치기라도 한 듯이 영국군의 군영은 천막을 비롯한 각자 물자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던 것은 물론 짐수레를 끌던 말과 병사들이 기르던 개와 고양이도 남아 있었다.
그야말로 몸만 빠져나간 현장에 보스케 장군은 할 말을 잊었다.
마치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것 같은 난민촌과 같은 풍경을 둘러본 보스케 장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래글런이 먼저 선수를 쳤군.”
“각하! 각하! 인근 주민의 말에 따르면 영국군은 어젯밤에 다급히 어딘가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겠지.”
래글런 남작은 러시아군이 연합군을 공격하러 온다는 것을 대충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어떻게든 협조를 구해 이를 막아보고자 했던 것이고.
“쓰읍…….”
보스케는 이마를 짚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도 러시아군이 정말 공격해 올지 말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상황을 보면 정말 러시아군이 공격해 올 것이 확실해 보였지만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러시아군이 공격해 오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럼 자신은 본국에서 겁쟁이에 쓸데없는 짓으로 협상에 악영향을 끼친 패배자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거기에 지금 원정군에서 자신의 직급은 사령관이 아니라 부사령관이었다.
그 말인즉 모든 결정권은 생 아르노 원수가 살아 있는 한은 자신에게는 그 무엇도 결정할 권리도 책임질 수 있는 권리도 없다는 뜻이었다.
다만 지금 원정군을 지휘하는 생 아르노 원수도 지병으로 인해 앓아눕고 정신 차리기를 반복하는지라 지휘권이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후우…….”
“각하,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쩌긴 돌아가야지.”
“어디로……?”
보스케 장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군영으로 돌아가지.”
이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느니 가만있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저 러시아군이 본국으로 돌아갔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 *
메테르니히는 평소처럼 러시아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와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지난번에는 프랑스 측에서 몰도바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겠다더군.”
“그렇군요.”
“그런데 영국 측에서는 뭐라 했는지 아나?”
“왈라키아라도 준다고 했습니까?”
“맞네.”
알렉산드르는 메테르니히에게 자국의 민감한 외교안건을 거리낌 없이 풀어놓았다.
어차피 숨긴다고 해봤자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 메테르니히도 어느 정도 예상할 테니 폴란드를 어떻게든 온존하고자 떡밥을 던진 것이었다.
봐라. 우리와 서방세계의 협상이 잘 흘러가고 있으니 너희도 순순히 협조해라.
뭐 이렇게 말이다.
하지만 메테르니히라는 대어는 좀처럼 떡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폴란드는 포기해도 되겠군요.”
“……이야기가 어찌 그렇게 되는가.”
“왈라키아와 몰도바라면 폴란드를 대체하기엔 충분한 곳이 아닙니까?”
메테르니히의 말에 황제는 얼굴을 찌푸렸다.
폴란드 땅은 러시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지역 중 하나였다.
러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자 유럽대륙과 러시아를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는 폴란드를 포기하면 러시아는 다시 얼어붙은 동토로 돌아가야 했다.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러시아는 유럽대륙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유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저 스스로 버리라는 메테르니히의 말에 황제는 무척이나 화가 났다.
“도대체가 오스트리아는 우리와 협상할 마음이 있기는 한 것이오?”
“폐하께서 폴란드만 포기하시면 됩니다.”
“그건 안 될 일이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메테르니히는 찻잔을 들어 단숨에 차를 전부 마셔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저도 슬슬 폐하의 안위가 걱정되는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이틀 전에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국경지대에서 오스트리아군이 결집했다는 모양이더군요.”
메테르니히는 그 말만을 남기고는 알렉산드르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자리를 떴다.
“허……. 이젠 협박이로군.”
오스트리아가 국경에 군대를 배치했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협상하든가 하지 않을 거라면 러시아를 공격하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알렉산드르는 무척이나 속이 갑갑했다.
“쯧……. 키셀료프를 불러오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셀료프가 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앉게.”
키셀료프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황제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언가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기분이 심히 언짢아 보였다.
“메테르니히 경을 만나신 모양이로군요.”
“그래, 또 폴란드를 내놓으라더군.”
“음…….”
키셀료프는 황제가 분노한 이유를 알고서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지금 말해봤자 황제의 분노만을 살뿐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폴란드는 되찾을 수 없는 땅이거늘……. 폐하께서는 왜 모르신다는 말인가.’
멘시코프가 보헤미아에서 오스트리아군대에 패배한 뒤로 폴란드군단이 폴란드로 입성하여 독립을 선포해 버렸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폴란드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면 그때 무리해서라도 군대를 동원하여 폴란드를 재점령해야 했다.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어. 지금 와서 어찌어찌 폴란드를 되찾는다고 해도 폴란드인들은 한번 맛본 달콤한 독립의 꿈을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다.’
본디 인간이라면 한번 성공한 것은 두 번도 가능하다고 믿기 마련이었다.
러시아가 다시 폴란드를 점령한다고 하더라도 폴란드인들은 끝없이 저항하며 러시아의 국력을 깎아 먹을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그럴 것이라면 그냥 오스트리아에 내어주고 우호를 다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인데…….’
문제는 이걸 황제에게 조언하기엔 키셀료프의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아껴주며 지지해 주던 전대 황제가 죽고 새로이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는 지지기반이 무척이나 연약했다.
물론 그렇다고 황제의 권위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귀족들이 귀찮게 들러붙었을 때, 현 황제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키셀료프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황제는 투덜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정말 오스트리아에 폴란드를 내어줘야 한다고 보는가?!”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폴란드가 중요한 것은 맞지만 현 상황이 너무 어려운지라…….”
키셀료프는 대충 어물쩍거리며 대답을 피했다.
“으음……. 그렇다는 말이지…….”
하지만 막상 황제가 정말 폴란드를 계속 가지고 있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안절부절못하며 저도 모르게 말을 덧붙였다.
“지키고자 하면 지킬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전쟁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폴란드인과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손을 잡기는 했지만 둘의 동맹 관계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째선가.”
“폴란드는 독립에 만족하지 않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면서 옛 영토를 되찾으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도 틀어질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키셀료프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렇지! 시간은 어차피 우리 편이지!”
“예…….”
“자네 말대로 지금은 전쟁과 내부단속에 신경 써야 할 때고 말이야.”
황제는 어느 정도 마음을 굳힌 듯했다.
그리고 그때.
발칸에서 희소식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