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96화
난 그런 거 몰라요
발칸에서 올라온 전투보고서를 받아들고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고는 이내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우…….”
[지금 감탄할 때인가?]
“그럼 울어야 하나요?”
러시아군과 연합군이 발칸에서 맞붙어서 연합군은 점령지의 상당수를 잃었다.
정확한 피해집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 소식 자체만으로 협상에 큰 영향을 줄 소식이었다.
“이제 러시아가 협상에 목을 맬 필요는 없겠네.”
[으음……. 이게 우리에게 호재로 다가올지 악재로 다가올지는 아직 모르네.]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건 단순한 호재가 아닌 것 같네요.”
[그럼……?]
“이건 떡상각입니다.”
[……떡상?]
이걸로 전황은 다시금 뒤집혔다.
자세한 것은 제대로 된 보고서가 올라와야 알겠지만, 러시아로서는 굳이 협상하지 않아도 연합군을 발칸에서 밀어내기만 한다면 자신들의 승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협상을 점점 미룰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올 것이 분명했다.
영국은 이런 실익이 없는 전쟁에서 하루빨리 발을 빼고 싶겠지만 러시아가 이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프랑스 역시 내부단속을 위해 대충 전쟁을 승전으로 얼버무리고 싶겠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걸로 일 년 정도는 전쟁을 더 하겠군요.”
[고작 일 년?]
“고작이라니요. 그 일 년이 우리에게는 더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줄 겁니다.”
메테르니히도 이 소식을 접했다면 금세 러시아와 협상을 맺고 돌아올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헨리, 밖에 있는가?”
“부르셨습니까? 폐하.”
“외무차관은 오늘 출근했는가?”
“예, 청사에서 업무를 보는 종일 겁니다.”
“부르게.”
헨리가 밖으로 나가고 조금 뒤에 언드라시 줄러가 들어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지난번에 조사하라고 맡긴 건은 어찌 되었나.”
“프로이센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건 조금 전까지 정리하는 중이었습니다.”
“허, 그렇게나 양이 많은가?”
내 물음에 언드라시도 씁쓸하게 웃었다.
“비밀경찰들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마음먹고 파보니 우수수 쏟아져나오더군요.”
“쯧쯧쯧……. 그렇기에 친구는 가려 사귀어야 하는 법이거늘……. 그럼 다음 독일연방의회 때는 이걸 보일 수 있겠는가?”
“아마 그때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준비해 주게.”
“예, 폐하.”
역시 프로이센을 잡을 사냥개로 언드라시를 고른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벌써 터뜨리려는 것인가?]
‘예, 지금이 적기입니다.’
[하지만 아직 러시아와의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벌써 프로이센과 척을 지는 것은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이미 그놈들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지 오래입니다.’
나는 비스마르크를 잘 알았다.
비록 실제로 본 것은 한 번뿐이지만 그놈은 절대로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통일을 포기할 리가 없다.
그러니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면서 호시탐탐 우리의 힘을 깎아 먹을 기회만 엿본 것이겠지.
‘러시아와 서방의 협상이 한번 틀어지려 하는 이때가 기회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 * *
대영제국의 총리인 존 러셀은 잇따른 패전 소식에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심지어 마지막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먼저 도주한 탓에 프랑스군의 피해가 커졌다는 이야기도 있어 프랑스 측에서 격렬히 항의하지 않았던가?
‘래글런……. 그 멍청이가 또 일을 저질렀어……!’
존 러셀은 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아니, 수습해야 했다.
여기서 수습하지 못하면 분명 보수당에서 이걸 물고 늘어지며……. 아니,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신은 총리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다음 총리직은 저쪽으로 넘어가겠지……. 그리고 나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연합왕국의 역사상 가장 무능하거나 실패한 총리라는 낙인이 찍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습해야 한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수습한다……?’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를 않았다.
래글런 남작의 후퇴를 자신이 명령한 것이라 하여 불필요한 희생을 줄인 것이라 해도 보수당에서는 동맹을 저버리는 외교라며 자신을 비난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대로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래글런 남작에게 잘못을 덮어씌운다면 저쪽에서는 현장의 지휘관 하나 통제 못 하는 무능한 이로 몰고 갈 것이다.
‘어느 쪽이건 최악이로군.’
현장의 일개 지휘관 하나 어찌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치인과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동맹국도 배신하는 음흉한 정치인.
한쪽은 자신에게는 이득이었지만 연합왕국에서는 큰 손실이 될 것이었고 반대로 다른 쪽은 연합왕국에 있어서 이득이었지만 자신에게는 손해였다.
‘총리직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연합왕국의 위신을 포기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단지 그걸 고르는 순간 자신의 정치 인생은 그대로 결딴나는 것이 문제일 뿐.
그렇다면 다른 해결책은 없겠는가?
존 러셀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분명 래글런 남작이 러시아군의 침공 기미를 눈치채고 연합군 내에 도움을 청했다고 했지……. 하지만 프랑스는 이걸 거부했고 말이야.’
러셀은 예기치도 못한 곳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잠깐……. 그렇다는 건 프랑스군은 러시아의 공격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지만 벼랑 끝에 몰린 러셀에게는 무척이나 설득력이 높게 들렸다.
프랑스와 러시아군이 서로 협상하여 영국을 이런 궁지로 몰아붙였다.
마치 달콤한 사탕이 입안을 굴러다니는 것처럼 마음이 편해지며 모든 것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기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걸 추궁했다가는 프랑스와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리겠지.’
원래 비밀은 바로 드러내기보다는 숨겼다가 기회가 왔을 때 드러내는 것이 좋다.
그래야 상대를 더욱 아프게 찌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숨겨야 한다.’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의 총리직을 잃게 된다고 하더라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숨겨야 했다.
그게 영국의 방식 아니겠는가?
이러한 영국 정부의 입장문을 파리주재 영국대사로부터 전해 들은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마는 한껏 쭈그러들었다.
“현장지휘관의 독단적인 판단?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실제로 그런 것을 어쩌겠습니까? 귀국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여왕께서도 안타까움을 느끼시며 애도를 표하셨습니다.”
“으음…….”
나폴레옹은 무척이나 화가 났다.
지금 영국대사가 말한 것은 대놓고 현장지휘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겠다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장지휘관이 무슨 권한으로 원정군을 제멋대로 물리겠는가?
분명 상부의 지침이 있었으니 그런 것이겠지.
나폴레옹은 이미 보스케 장군으로부터 사전에 래글런 남작이 런던으로부터 모종의 지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래글런 그놈이 런던으로부터 모종의 지령을 받고 연합군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도움을 청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래글런 남작은 영국군을 이끌고는 야반도주해 버렸다.
‘그 뒤에 곧바로 러시아군의 공격이 있었다. 생 아르노와 피에르가 그걸 모르고 당했을까?’
러시아군의 공격 당시 생 아르노 원수는 병으로 쓰러져 있었고 피에르 보스케는 자신이 움직여도 되는지 말지 고민하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지만 이러한 것은 보고서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폴레옹은 보고서에 빠지어 있는 부분에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국 놈들이 러시아와 거래하여 프랑스를 저들에게 팔아치운 것이로군.’
그리고 이상한 결론을 내버렸다.
그렇게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를 의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며 불편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을 때.
프랑크푸르트의 독일연방의회장에서 사건이 터졌다.
* * *
그동안 독일연방 회의는 전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가 불참하며 프로이센의 주도로 진행되는 경우가 잦았다.
겉으로는 오스트리아를 대신하여 프로이센이 회의를 주도하는 것이었지만 독일연방에 속한 이들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왜냐면 실로 오랜만에 오스트리아의 대표가 독일연방 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부올 백작은 회의장에서 담뱃불을 붙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프로이센의 대사인 비스마르크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담뱃불을 붙이자 다른 이들도 자연스레 담뱃불을 붙였다.
이윽고 회의장은 희뿌연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다들 여유롭게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부올에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스트리아는 슬슬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발을 빼신다고요?”
“서로의 이해관계가 그리되더군요.”
“허허,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모름지기 전쟁이란 것은 국가를 피폐하게 만들 뿐이지요.”
부올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과연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 부올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비스마르크는 그의 신경을 박박 긁어놓을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오스트리아의 동맹국들은 이번에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았다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으음…….”
또다시 동맹을 배신하고 너희들끼리만 전쟁에서 발을 빼는 것이냐는 조롱 섞인 말이었다.
다른 이들도 대충 뜻을 알아들은 것인지 부올의 눈치를 살폈다.
“크흠……. 정확히 따지고 보면 영국과 프랑스는 우리의 동맹국이 아닙니다. 오스트리아의 제1 동맹은 독일연방에 소속된 국가들이지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부올은 서방보다는 독일연방의 결속이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이를 계속하여 물고 늘어졌다.
“그런데 그것참 이상하군요. 독일연방을 위해서라면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러시아와 협력하여 서방에 맞서는 것이 더 좋은 게 아닙니까?”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 같은 독일계 국가들은 그동안 러시아와 친밀하게 지내오며 서로 번영을 누리지 않았습니까?”
“…….”
자꾸만 자신이 독일연방의 주인인 양 설쳐대는 프로이센 대표의 모습이 꼴사나웠지만 부올 백작은 가만히 비스마르크를 노려봤다.
그의 따가운 시선에도 비스마르크는 그에게 윙크까지 해가면서 부올을 도발했다.
결국, 참다못한 부올이 한마디 했다.
“듣자 하니 참으로 궤변이 따로 없군.”
“어떤 점이 말입니까?”
“첫째로 독일연방의 국가들이 러시아와 협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최근의 일이네, 오히려 그전까지는 러시아와 대립하며 생존을 위한 투쟁을 이어왔지.”
“그렇군요.”
비스마르크가 맞장구를 치니 부올의 말이 더욱 격해졌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 오스트리아는 서방의 동맹으로 전쟁에 참전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어!”
“그렇게도 볼 수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동맹을 배신하지 않았네, 오스트리아는 언제나 독일연방을 위해 움직일 뿐이야.”
부올 백작의 말이 끝나자 비스마르크는 말없이 담배 파이프를 재떨이에 털어냈다.
그러자 부올은 그런 비스마르크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며 그를 쏘아붙였다.
“그러고 보니 프로이센은 어떤가?”
“무엇이 말입니까?”
“그대들은 독일연방을 위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의 물음에 비스마르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그으래?”
부올 백작의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