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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97화 (97/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97화

쓰디쓴 실패

부올 백작과 비스마르크의 대립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져 갔다.

독일연방의 정기회의는 어느샌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대사의 100분 토론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오스트리아의 외교정책은 자국 우선주의 풍조가 깔려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기서 자국보다 타국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아니, 있다 치더라도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계속되는 비스마르크의 도발에 침착함을 유지하던 부올 백작의 포커페이스가 와장창 깨져 버리면서 둘의 말싸움이 점차 격해져만 갔다.

“부올 경, 그만 진정하시고…….”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허허허, 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왜 이리도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군요.”

“오냐 좋다. 오늘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한번 끝을 보자꾸나. 이 건방진 애송아!”

흥분한 부올 백작이 아예 끝장을 보겠다는 듯이 비스마르크에게 결투를 신청하려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회의장에 모인 독일 소국 대표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올 경, 진정하시지요.”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잔뜩 흥분한 부올 백작의 모습에 결국 작센과 하노버의 대표가 비스마르크를 데리고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는 마지막 뒷모습에 꽉꽉 눌러 담은 욕을 쏟아내던 부올 백작은 정작 비스마르크가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크흠……. 제가 잠깐 실수를 했군요.”

“부, 부올 경……?”

부올은 조금 전의 난리로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쓸어올리며 회의장에 남아 있는 이들을 확인했다.

‘작센과 하노버, 그리고 메를렌부르크는 완전히 프로이센 편으로 붙은 모양이로군.’

판단을 마친 부올 백작은 품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어떤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모시는 황제 폐하로부터 받은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흠흠……. 다들 눈이 있다면 나를 보시고 귀가 있다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시려고…….”

“이젠 프로이센 놈이 아니라 우릴 괴롭히려는 건가?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이나…….”

회의장에 모인 대표들은 부올의 말에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경악했다.

“지난 러시아와의 전쟁 동안 우리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러시아 간에 모종의 관계를 포착하여 이를 조사했고……. 결론을 내렸소이다!”

부올 백작이 손짓하자 옆에서 대기 중이던 이가 낑낑거리며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오더니 그대로 회의장 테이블에 쏟아냈다.

그러자 상자 안에 담겨 있던 수많은 서류뭉치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며 테이블을 가득 메웠다.

대표들이 당황하며 부올 백작을 올려봤다.

“이게 무슨 짓이오!”

“한번 읽어들 보시지요.”

그의 권유에 다들 마뜩잖아하면서도 천천히 서류들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이것이 사실이오?”

“어찌 이런 일이…….”

“하나님 맙소사…….”

회의장에 흩뿌려진 문서들에는 프로이센과 러시아 간의 군사적 교류와 무기거래 정황과 증거,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군의 오스트리아 침공 당시에 협력을 제공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독일연방 내의 소국 대표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다는 건…….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배신하고 러시아에 길을 열어줬다는 말입니까?”

“바로 보았군.”

“맙소사…….”

그래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다툼이 단순히 독일연방 내의 정치적 다툼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프로이센은 정말 독일통일이라는 명분으로 같은 형제인 오스트리아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였다.

“이래도 저 독사의 혓바닥을 믿으시겠소?!”

“…….”

다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부올이 내놓은 서류들은 충격적이었다.

프로이센이 러시아를 돕는다.

간단히 생각해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했지만 여기서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럼 이번 전쟁도 프로이센의 공작인가?’

‘러시아가 단순히 동맹국이 참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급작스레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던 것도 프로이센의 공작인가?’

‘독일 지역에 전염병이 돌았던 것도 프로이센의 공작이란 말인가!’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란들을 잠재워야 할 당사자는 지금 부올 백작과의 다툼으로 인해 잠시 회의장을 나가 있는 탓에 의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말처럼 독일연방에서의 일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유럽 외교가에 퍼졌다.

당연하게도 프로이센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음해라면서 이를 수습하려 했지만 부올 백작은 영리하게도 프로이센이 반박을 내놓을 때마다 증거자료를 하나씩 찔끔찔끔 풀어놓으며 프로이센 정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프로이센 정부에서는 그때마다 발작하며 오스트리아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의 평화를 해치려 한다!]

[명백한 가짜자료로 독일연방의 평화를 헤치는 오스트리아가 과연 연방의 맹주인가?]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아무 연관도 없다!]

이렇게 독일연방이 시끄러워지니 전쟁에 집중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에 관심을 가졌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에 영국과 프랑스는 의심의 눈초리로 프로이센을 지켜봤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적인 러시아를 도운 프로이센보다는 동맹으로서 전쟁에 참전했던 오스트리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프로이센 놈들이 도우지 않았으면 러시아는 진즉에 항복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어……. 이놈 봐라? 단순히 무기거래만 한 게 아니라 식량에 여러 공산품까지 거래했어?’

아직 영국과 프랑스는 말을 아꼈다.

상황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기도 했거니와 현재는 러시아와의 협상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도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붙은 의혹을 떨쳐내며 오스트리아의 주장을 음해공작으로 몰고 가려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제국 간의 평화협정 소식과 러시아 황제의 전쟁 속행 소식에 프로이센의 마지막 희망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 * *

러시아와의 정전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메테르니히가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오스트리아제국의 수도 빈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인파가 동원되어 러시아와의 협상을 성공시킨 메테르니히와 프란츠 카를 대공을 칭송했다.

[은퇴한 퇴물 노인네에게 이렇게 거창한 환영식을 열어줄 필요가 있는가?]

‘그 은퇴한 퇴물 노인네가 러시아에서 평화를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경제성장에 신경 쓸 여력이 생겼으니 이 정도는 챙겨줄 만하지요.’

나는 여름 궁전의 테라스에서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메테르니히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늙은 정치 괴물은 자네를 잡아먹고 자기가 실권을 틀어쥐려 할 게 분명하네.]

‘누가 잡아먹혀 준답니까?’

[으음……. 그건 그렇지만……. 저 노인네는 자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그러니 너무 가까이하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두게.]

영감님은 내가 메테르니히에게 먹히지는 않을까 경계하는 듯했다.

물론 현 오스트리아 정계에서 메테르니히의 영향을 받거나 그의 도움으로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제법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메테르니히가 저를 먹어치우고 정계를 장악할 수나 있을까요?’

[충분히 가능하지.]

‘허허허……. 영감님, 그거 잊으셨습니까?’

[그거? 무엇을 말하는 건가.]

‘조만간에 선거가 있잖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메테르니히가 날고 기어도 소수민족 보호법으로 의회에 제 사람을 꽉꽉 채워 넣으면 제까짓 것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 말에 영감님도 헛웃음을 지으시더니 나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원래 늙으면 걱정이 많아진다고들 하지요.’

나는 그리 말하며 메테르니히에게 손을 흔들었다.

메테르니히는 뭐가 그리도 좋은 것인지 웃으며 내게 인사를 올렸다.

* * *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간의 정전 협상 결과 러시아는 폴란드의 독립을 인정했고 폴란드왕국의 왕으로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의 즉위를 허락했다.

이로써 폴란드는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이 멸망한 지 58년 만에 바르샤바 공국이 사라진 지로는 38년 만에 다시금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합스부르크 왕을 모시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향 안에 들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독립을 반쯤 포기하고 있던 그들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합류 덕분에 독일계 민족의 분포가 더욱 줄어든 내게는 더더욱 큰 기쁨이었고 말이다.

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투표문제로 무척 바빴다.

투표라는 게 사람들이 표를 던지면 그것만 세는 게 끝이 아니라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유권자는 몇인지, 그리고 그 유권자는 어디 살고 있고 모든 유권자가 투표하기 위해서는 어떤 곳에 투표소가 설치되어야 하는지 등등…….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제국에서는 처음으로 선거관리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이 위원회의 수장은 바흐 남작이 맡았다.

황제는 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기간 동안 제국 내의 공무원과 군대, 그리고 마차와 말 등의 가축을 징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쥐여줬다.

뭐…….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상 선거 관련 업무는 바흐 남작에게 전부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지금 헝가리지역에서는 어떻게든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러요시 코슈트를 비롯한 혁명세력들이 여성투표권을 주장했지만 제국 내 특권층들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초반부터 난항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뭘 하냐고?

“폐하, 이 꽃 이름이 뭔지 아세요?”

“시씨, 그대가 보기에는 내가 한가롭게 꽃 이름이나 외우고 다닐 사람처럼 보이는가?”

“네.”

“……제충국이로군. 정원사가 벌레를 쫓으려고 기르는 모양이지.”

내 약혼녀이자 바이에른의 공녀인 엘리자베트 폰 비스텔바흐 양과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쟁도 끝났겠다, 지금은 선거 때문에 굵직굵직한 업무를 제외하고는 일이 없었고 그나마도 바흐와 부올, 그리고 브루크 경이 전부 처리하니 정작 내가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기왕 쉬시는 김에 여행 다녀오는 게 어때요?”

“여행? 생각해 둔 곳이라도 있어?”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요.”

“그게 뭐야.”

그러니 이렇게 엘리자베트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오랜만에 업무에 치이지 않고 따사로운 햇살을 듬뿍 받아먹으며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늘어졌다.

“여행……. 여행 좋지.”

“어디로 가실래요? 지난번에 네네 언니가 파리에 다녀왔는데, 거기가 그렇게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고 하던데…….”

“파리?”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엘리자베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웃으세요?”

“…….”

딱 두 마디 말이었지만 그녀의 말에 분노가 서려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내 기준에서는 파리보다는 빈이나 부다-페스트, 프라하 같은 곳이 더 아름답고 멋있는 도시라고 생각해서…….”

“그래요? 그럼 이번에 같이 여행 가는 건 그곳으로 가볼까요?”

“그건 좀…….”

이곳에 떨어진 뒤로 빈을 떠나서 어딘가로 가봤던 것은 헝가리혁명 당시에 친정하겠답시고 전쟁터를 가봤던 것이 전부다.

그리고 내 성향상 어딘가를 싸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집에 틀어박혀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간단하게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을 선호했기에 여행은 영 취향에 맞지 않았는데…….

“혼자 가면 심심하단 말이에요.”

“나는 혼자가 편…….”

“뭐라고요?”

엘리자베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다시금 물었다.

“결혼하면 여행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닐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같이 다녀주시는 게 어때요?”

나는 황제다.

이 제국의 주인은 나라는 뜻이었다.

내가 여태껏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부탁을 들어왔지만 내 이익과 맞지 않으면 전부 거절해 왔다.

이것도 그것들과 다를 게 없다.

나는 피곤하게 여행이랍시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시원한 여름 궁전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그녀에게 당당하게 내 의견을 밝힐 것이다.

“……그러지 뭐.”

젠장, 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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