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99화
사회주의자? 사회주의자!
선거관리위원회를 맡게 된 바흐 남작은 지난 몇 년간의 공직생활 때보다도 더한 살인적인 업무량에 혀를 내둘렀다.
제국 전역의 선거구를 나누는 작업부터 그렇게 나눈 선거구에 선거위원을 배치하는 것, 그리고 유권자의 위치를 파악하여 적절한 위치에 투표소를 세우는 일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특히 이번 선거는 헌법을 개정하는 이들을 뽑는 선거였기에 선거구를 나눌 때부터 말이 많았다.
“유독 헝가리 쪽의 선거구가 많은 것 같은데……. 이건 헝가리를 밀어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오?”
“아니, 보헤미아에 선거구가 고작 3개?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30개는 돼야지!”
“빈에는 황제 폐하께서 계시지 못해도 4개 선거구를 배정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오.”
“슬라브인의 숫자만큼 선거구를 달라!”
바흐 남작은 그제야 왜 황제 폐하께서 자신에게 제한 없는 전권을 하사하였는지 깨달았다.
‘이런 놈들이 많을 것이라 예상하신 것이로구나.’
따지고 보면 황제를 대신하여 욕을 먹는 것에 가까웠지만 바흐 남작은 기꺼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제국 내 선거구에 불만 있는 이는 빈으로 오라 내가 직접 교수형 대에 목매달아 주겠다.”
실제로 격렬히 반발하는 이들의 목을 매달아버리고 이미 결정된 투표권에 대해서도 불만이 터져 나올 때마다 강압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자 반발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대신 바흐 남작을 향한 고발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황제는 선거기간만 모든 전권을 그에게 넘겨준 뒤였다.
바흐 남작에 대한 고발이 들어와도 그건 전부 무시되거나 소각장에 버려질 뿐이었다.
그렇게 선거구문제를 해결하니 뒤이어 따라오는 것은 언어문제와 문맹 문제였다.
드넓은 제국 내에는 수많은 민족이 거주했다.
당장 제국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남슬라브인만 하더라도 그 내부를 자세히 따져보면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 슬로베니아계 등등 여러 민족으로 갈라졌다.
그만큼 저마다 쓰는 말도 달랐으니 이들에게 평등한 선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여기서 바흐 남작이 선택한 방법은 당마다 고유의 문양을 지정하여 투표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각 지역의 정당들은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친숙한 문양을 고르고자 온갖 공작과 로비를 벌였지만 바흐 남작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애초에 남들에게 욕먹는 것이 익숙한 바흐 남작은 온갖 쌍욕을 들어먹으면서도 자기가 세운 기준대로 일을 처리해 나갔고, 어찌어찌 제국 내에서 투표 비슷한 것을 치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까진 성공했다.
이렇듯 강철같은 의지로 선거를 밀어붙인 바흐 남작 덕분에 제국 총선거는 고작 반년 만에 모든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다들 고생 많았네……. 이제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만 조금 더 고생하자고…….”
“예, 각하…….”
이미 바흐를 비롯한 선거관리위원회에 소속된 이들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그런데도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땅덩이가 넓은 제국의 특성상 모든 유권자가 투표를 완료할 때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위원회에서 칼같이 분리해놓은 선거구를 하루마다 번갈아 가며 6일 동안 선거를 치르고 마지막에 표를 세는 아주 단순한 구조였다.
하지만 그 내면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우선 투표소선정부터가 문제였는데, 단 한 명의 유권자가 있다면 투표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이들의 요청 때문에 선거관리위원들은 고작 두세 명의 유권자를 위해 길조차 없는 알프스와 카르파티아산맥을 기어올라야 했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아니, 나는 헝가리인민당을 찍어야 해!”
“어휴……. 그런 건 말하지 말고 찍으시라니까요? 여기 헝가리인민당은 말 모양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아, 그래?”
“아니, 슬라브 제일당은 왜 도끼 모양이야? 저기 헝가리 놈들은 멋진 말 모양이잖아!”
“그건 폐하께서 임의로 선택하신 거예요.”
“아, 그래? 도끼 좋지!”
그 외에도 이들의 고생은 전부 설명하기에는 여백이 부족할 정도로 고된 일이었지만 다들 투표라는 일념하에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개표 당일.
예상대로 새로이 만들어지는 제국의회에서 다수 석을 차지한 것은 마자르계였다.
그 뒤로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계 등이 뒤를 이었고 독일계는 고작 일곱 석 정도를 챙기는 게 고작이었다.
“됐어! 이제 됐어!”
개표결과가 발표되고 헝가리계 정당이 의회 과반수를 차지한 것을 확인한 코슈트는 크게 환호했다.
그러고는 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선거승리 사실을 널리 알렸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오늘 우리 마자르인들이 우리를 정복했던 합스부르크를 꺾고 그들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와아아아-!”
“위대한 지도자 코슈트 만세!”
“헝가리왕국 만세!”
수많은 헝가리인은 선거 승리에 기뻐했고 제국 내의 슬라브인들 역시 저마다 의석을 챙겨 각자의 목소리를 대변 할 수 있게 된 것에 기뻐했다.
반면에 독일계는 선거에서 참패했음에도 그리 불만이 크지 않았다.
그건 그들의 단결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그들의 정치 참여도가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선거고 나발이고 어차피 황제 폐하께서 독일인이신데 저놈들이 무엇을 하겠어?”
“의회랍시고 소꿉놀이나 하는 거지.”
“폐하께서 헛기침만 하시면 놀라 자빠질 녀석들…….”
애초에 황제가 독일인이니 지배민족의 지위는 보장되어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러요시 코슈트는 헝가리 정당들과 연대하여 순조롭게 총리직에 오르려 했지만 그건 그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코슈트가 총리를 한다고?”
“그놈 그거 사회주의자 아냐?”
“독일 놈들도 싫지만, 헝가리 놈들은 더 싫다!”
헝가리 혁명이라는 전적이 있는 그가 총리직에 출마하려고 하자 각계각층에서 우려의 목소리와 반대가 쏟아졌다.
특히 본국인 헝가리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여론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그가 총리로 출마한다는 소식에 순식간에 반대세력이 결집했다.
“사회주의자 코슈트가 총리가 되면 제국은 사방팔방으로 찢겨나가고 폐하께서 이룩한 모든 것은 잿더미가 될 것이다!”
지난 헝가리 혁명 동안 그가 시행했던 온갖 급진적인 정책으로 인해 대다수 지주와 귀족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그 밑에 있는 시민들도 그가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고 지난 혁명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런 불상사가 다시 생길까 우려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오! 나는 일생을 내 조국 헝가리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을 뿐이오!”
이러한 여러 음해공작에 코슈트가 직접 반박하는 성명을 내보기도 했지만 이미 그에게는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힌 뒤였다.
[공산당 선언의 저자 카를 마르크스, 러요시 코슈트를 공개적으로 지지!]
거기에 종지부를 찍듯 영국에서 날아온 마르크스의 지지성명이 더해지니 의심은 어느덧 확신이 됐다.
개헌의회의 표는 라이너 대공에게로 몰렸고 결국 라이너 대공이 차기 총리직에 오르게 되었다.
[허……. 이제는 자네가 무서워지려 하네.]
‘이번엔 또 뭐가요.’
[도대체 마르크스는 어떻게 꼬신 건가?]
영감님의 질문에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꼬시다니요.’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영국에 있는 마르크스가 러요시 코슈트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만들었느냔 말일세.]
‘아, 그거요? 글쎄요.’
[자네가 한 게 아닌가?]
‘에이……. 제가 신도 아닌데 그런 걸 어찌하겠습니까? 저는 그냥…….’
[그냥?]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영감님의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가?]
‘아니, 영감님이 그리 지켜보시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마르크스를 어찌 움직인 것인지나 말해보게.]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냥 영국으로 편지 한 통만 보냈습니다.’
[편지? 마르크스에게 말인가?]
‘예.’
영감님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셨다.
[도대체 무슨 편지를 보냈기에 귀족이라면 치를 떠는 그놈이 자네 말을 들어준 것인가?]
‘뭐……. 개인적으로 편지를 좀 썼죠.’
[개인적으로?]
영감님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연거푸 내게 설명을 요구했지만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 * *
런던 런던의 대영도서관.
정치경제학에 관한 책을 탐독하며 학구열을 뽐내는 털북숭이 중년인에게 누군가 다가와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자네 앞으로 편지가 왔더군.”
“편지? 무슨 편지?”
“늘 그렇듯이 독일지역에 거주하는 자네의 열렬한 지지자분께서 편지를 보낸 것이지.”
“흠…….”
털북숭이 중년인은 친우가 건네준 편지를 받아서는 편지지를 손에 들었다.
“인류 역사의 위대한 선구자이자 최초의…… 크흠……. 혁명가이며 노동자들의 친구 카를 마르크스 선생께…….”
편지의 내용은 과도할 정도로 마르크스에 대한 예찬과 그가 주장했던 공산당 선언에 대한 칭송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에 감정변화가 적은 마르크스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공산당 선언과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지지자의 편지에 마르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왜 그러는가? 또 편지에 자네를 욕하는 험악한 말이라도 적혀 있었던 건가?”
“아닐세, 오히려 그 반대지…….”
“그럼 좋은 것 아닌가?”
“좋네, 좋긴 한데……. 이자의 칭송은 그 정도가 심해서 내 얼굴을 화끈하게 만드는군.”
“하하하, 그런가?”
마르크스의 친우는 부끄러워하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가 도서관 사서와 경비에게 주의를 듣고 나서야 웃음을 멈췄다.
“크흠……. 아무튼……. 그 정도로 열렬한 지지자라면 답장 정도는 써주는 것이 도리 아니겠는가?”
“답장? 흠……. 뭐라고 쓰지?”
“그걸 내게 물어보면 안 되지 이 친구야.”
“흠…….”
마르크스는 다시금 편지를 훑어봤다.
그러자 낯뜨거울 정도로 자신을 칭송하는 내용 뒤에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스트리아에서 총선거했는데……. 거기서 러요시 코슈트라는 사회주의자가 총리로 나온다는군.”
“뭐?!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오스트리아의 황제나 귀족들이 그걸 내버려 두겠어?!”
“쓰읍……. 거기 조용히 좀 해주십시오.”
“아, 죄송합니다…….”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가 또 주의를 들은 마르크스의 친우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서는 말소리를 조금 낮추며 그에게 물었다.
“어디 황제나 귀족들이 그걸 가만두겠는가……?”
“현지의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지난 혁명으로 인해 숨죽이고 있던 노동자들이 총궐기하여 인민의 힘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생각 중이네.”
“그렇다면 자네가 말하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온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
그리 말하긴 했지만, 마르크스는 왠지 모르게 어딘가 찝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헝가리에서 혁명이 벌어진 것은 전해 들었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본 적은 없어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누군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악한 노림수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보게 엥겔스, 이 편지를 보낸 이가 누군가?”
“응? 그곳에 적혀 있지 않은가.”
“흐방 뷔에옹본……? 자네는 살면서 이런 기괴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없지.”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이런 가명으로 내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 수상하지 않은가?”
마르크스의 말에 그의 친우인 엥겔스는 껄껄 웃으며 친구를 다독였다.
“이 친구야 뭐 그리 의심이 많은가? 반대로 생각해 보면 자네를 열렬히 지지하는 순박한 독일 청년이 잔꾀를 부린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잖은가!”
“거기, 한 번만 더 떠드시면 쫓아낼 겁니다!”
“크흠…….”
친우의 말에 마르크스도 의심을 거뒀다.
하기야 자신이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이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말이다.
“하긴……. 자네 말이 맞는군.”
그리 생각한 마르크스는 별생각 없이 간단한 안부 인사와 함께 러요시 코슈트를 지지한다는 발언을 추가하는 것으로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보낸 편지는 오스트리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