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00화
첫걸음
러요시 코슈트의 총리 선출이 좌절되고 열린 프란츠 요제프의 헝가리 왕국 대관식은 그 어느 때보다 조촐하고 초라했다.
이건 요 몇 달간 민간경제에 투자한다고 헝가리 왕국의 부채비율이 증가하고 전쟁으로 상당수의 재정을 소모한 것도 있었지만 단순히 헝가리인들이 새로운 왕을 싫어한다는 이유도 컸다.
물론 즉위식이 조촐하다고 해서 절차들이 생략되거나 단축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더 지루했고 말이다.
[쯧쯧……. 다들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군.]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자네 기억을 훑어보다 보니 배운 것이네.]
‘아, 진짜! 제가 그만 훑어보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래도 영감님이 있어서 지루함은 조금 덜었다.
만약 나 혼자서 이 모든 행사를 치러야 했다면 아마 지루해서 미치지 않았을까?
‘영감님.’
[왜 부르는가.]
‘저기 왕관꼭대기에 십자가가 구부러졌는데요?’
[그건 원래 그런 것이…….]
‘아무래도 주교가 상자에서 꺼내다가 실수로 저렇게 된 것 같은데, 제가 남들 안 볼 때 살짝 만져서 원래대로 할까요?’
그리 말하며 내가 왕관에 손을 대려 하니 영감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면서도 그 속에는 분노로 가득 찬 노호성을 터뜨리셨다.
[이 미친 작자야!!! 당장 왕관에서 손 떼게!]
‘깜짝이야……!’
[지금 자네가 만지려는 것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유구한 역사가 쌓인 것인지 아는가!]
‘왜 소리를 지르세요.’
[지금 자네가 미친 짓을 하려 하기에 그걸 막아준 것이 아닌가! 지금 자네가 그걸 건드렸으면 밖에 있는 헝가리 놈들이 모조리 들고일어났을 거야!]
‘에이……. 아무리 봐도 여기 십자가 부분이 망가진 것 같은데, 이거 좀 손댄다고 뭐라 하겠어요?’
[지금 자네가 손대려는 그 왕관은 헝가리 왕국의 건국자인 성 이슈트반 1세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역사가 깊은 물건일세! 지금으로부터 800년은 더 된 물건이란 말이야!]
‘오래되긴 했네요.’
언제나 점잖게 내 잘못을 타이르시던 영감님은 완전히 폭발하셔서는 와다다닷 잔소리를 쏟아내셨다.
[그냥 오래된 게 아닐세! 저건 헝가리의 역사와 권위…….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헝가리 그 자체라고 해도 될 정도의 물건이야!]
‘어, 음……. 그렇군요.’
[그뿐인가?! 대대로 합스부르크 왕실의 어른들께서도 이 왕관을 머리에 쓰시면서 그 권위에 이름을 덧붙여줬지! 그러니 이 왕관은 통합된 제국을 상징하는 상징물이라 해도 무방한…….]
영감님의 잔소리는 도통 끝날 기미가 없었다.
덕분에 즉위식 내내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영감님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고 나누려야 나눌 수 없는 존재일세! 이는 단순히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넘어…….]
브라타슬라바의 대주교가 성 이슈트반의 왕관을 들고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동안에도 영감님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나만 들을 수 있는 잔소리가 성당에 울려 퍼지는 것이 제법 우습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헝가리를 상징하는 성 이슈트반의 왕관이 내 머리에 씌워지고 미리 준비해 둔 성가대의 찬송가가 울려 퍼지며 즉위식에 참석한 이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규모는 조촐하다고 해서 이곳에 참석한 이들까지 조촐한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다 잡은 총리직을 놓쳐 똥 씹은 얼굴로 손뼉을 치는 러요시 코슈트도 있었고 어린 딸을 품에 안은 채로 웃고 있는 괴르게이도 있었다.
그 외에도 곧 죽을 것처럼 안색이 좋지 않은 바흐 남작이라던지 부올 백작과 언드라시 줄러, 이번에 총리로 선출된 라이너 대공과 이번 선거로 뽑힌 의원들도 자리했다.
거기에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와 독일 지역의 여러 소국은 물론 얼마 전까지 전쟁으로 치고받았던 러시아까지 사람을 보내어 자리를 빛내주었다.
그렇게 모든 대관식이 끝나고 신료들과 백성들, 그리고 각국의 외교관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연설할 시간이었다.
“이리 귀하신 분들이 저를 축하해 주고자 이렇게 모인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다들 이 자리를 빛내주신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이 자리에 모인 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헝가리 시민들은 손을 흔들거나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면서 나를 환영해 줬다.
내가 생각하던 헝가리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니까 무조건 나를 배척하면서 압제자는 물러가라! 같은 말을 외치면서 썩은 과일을 던질 줄 알았는데…….
“황제 폐하 만세!”
“우리의 국왕 페렌츠 요제프 만세!”
“새로운 국왕 폐하의 앞에 행복이 가득하길!”
시민들은 시궁창 냄새 풀풀 풍기는 썩은 과일 대신 향기로운 꽃을 던지며 나를 격하게 환영했다.
‘이러면 아예 헝가리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아먹어도 될 것 같은데……?’
[어허, 도대체 자네 머리는 어찌 굴러가기에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가?]
‘나라를 위하는 일에 좋고 나쁜 게 어디 있습니까?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해야죠.’
[……그래, 자네 말이 맞네! 맞아.]
영감님은 뭔가를 더 말씀하시려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시고는 입을 다무셨다.
드디어 잔소리에서 해방되니 샤워라도 하고 나온 것처럼 온몸이 개운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몸에 씐 귀신이 떨어져 나갔으니 개운한 것에 가까웠다.
[이놈!]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영감님께서 내 머리를 주먹으로 마구 때리셨지만, 그의 주먹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영감님이 허공에서 섀도복싱을 하시는 동안 나는 성 이슈트반의 홀을 높이들이며 내게 꽃가루를 뿌리는 헝가리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하나 되어 영광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페렌츠 요제프 전하 만세! 헝가리 왕국 만세!”
“헝가리는 제국에 속한 일개 지방이 아니라 제국의 일원으로서 모두 함께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이건 내가 살아 있는 한 결코 번복되지 않을 것이다!”
“와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 * *
그렇게 조촐하지만 왁자지껄했던 즉위식이 끝나고 브라타슬라바에 마련된 임시왕궁에 들어서니 곧바로 브루크 경이 따라붙었다.
“폐하.”
“오 브루크 경, 자네도 즉위식에 참석했었군. 그런데 귀빈석에서는 못 봤던 것 같은데…….”
“하하……. 평민에다가 독일계인 제가 어찌 귀빈들과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응? 신분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솔직히 여태껏 자네가 잘 해줬기에 나라가 그럭저럭 굴러간 것이지 잔 없었으면 슈바르첸베르크 공작 죽고서 결딴났을 걸세.”
내 말에 브루크 경은 멋쩍게 웃었다.
“폐하께서 그리도 저를 후히 평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하하하…….”
나와 브루크 경은 복도를 걸으며 다른 이들이 들으라는 듯이 소리 높여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브루크 경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그건 어찌 되었나?”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처음에는 헝가리 왕국의 채권을 대금으로 지급하니 거절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폐하께서 채권의 신용을 보장하고 이자도 제법 후하게 쳐주니 다들 그럭저럭 만족하더군요.”
“에이 쯧……. 부르주아 새끼들이 다들 배에 욕심과 기름덩이만 가득 차서는 말이야…….”
내 투덜거림에 브루크 경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단기간에 패권을 상환받지 못하도록 수를 써놨으니 당분간은 저들도 돈 한 푼 받지 않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니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군……. 그럼 지금 지역개발의 현황은 어찌 돼가는가?”
“일단은 폐하의 명대로 헝가리 지역에는 농업과 경공업을 중심으로 육성 중이고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에는 공장의 숫자를 늘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제국의 산업 현황은 서방과 비교하면 그리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대로 동유럽이나 중부유럽에서는 손에 꼽는 수준이었다.
물론 진즉부터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던 프로이센과 비교하자면 빛이 바랬지만……. 그래도 중부유럽의 강대국의 지위에 걸맞은 산업기반을 가졌다.
그리고 제국 내부에 헝가리라는 큰 시장을 가지고 있었으니 품질이 조악한 공산품도 그럭저럭 팔아치울 만한 여건이 되었다.
거기에 헝가리에서 나오는 곡물 덕분에 산업화로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곡물값이 뛰지 않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원래는 조금 부실했던 수요공급망이 지난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완비되었으니 이젠 외부로 시선을 돌릴 때였다.
그러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지방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헝가리 내부의 산업시설도 확충하려는 것이었다.
헝가리의 부족한 농민수요는 지난 발칸전쟁으로 인해 유입된 피난민과 남슬라브인을 동원하여 그 수요를 맞출 생각이었다.
“말로는 쉬운데…….”
“무엇이 말입니까?”
“쓰읍……. 남슬라브인을 헝가리로 이주시킨다면 헝가리 내부에서 반발이 생기겠지?”
“흠…….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특히 도시노동자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쯧……. 그렇겠지.”
모름지기 정책을 구상할 때는 괜찮지만 막상 이것을 실행하려면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뒤따랐다.
외부에서 인력을 빼 와서 다른 곳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것 자체는 좋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이 내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는 전제하에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헝가리 놈들의 입을 다물게 할 만한 달콤한 당근이 필요하다는 건데…….”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내가 뭘 쥐여주려고 해도 그들에게 독립에 따르는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는데, 여기서 뭘 더 준다는 말인가?
“골치로군.”
“그래도 급한 것은 아니니 천천히 진행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천천히 하라니?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것이야. 나중에 문제가 닥쳤을 때는 늦어.”
“그, 그렇습니까?”
“뭔가 해결책이 있을 것 같은데…….”
제국 내에서 그 누구보다 민족 정체성이 뚜렷한 헝가리인들을 다른 이들과 섞이게 할 만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괜찮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군.”
“하하……. 오늘은 대관식 때문에 피곤하셔서 그런 것일 겁니다. 그러니 이만 쉬시지요.”
“그런가?”
생각해 보니 오늘 영감님의 역대 최고의 잔소리 때문에 조금 피곤한 것 같기도 했다.
거기에 대관식을 하느라고 무거운 왕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더니 목도 살짝 뻣뻣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 같기도 하군.”
“예, 편히 쉬시지요. 폐하.”
“그래, 자네도 무리 말고 쉬게.”
“염려 마시지요.”
브루크 경과 헤어져서 임시 궁전에 마련된 내 방으로 들어오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업무나 행사 같은 것에서 해방되어 드디어 진짜 휴식을 맞이하니 오랜만에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대충 옷을 벗어서 시종에게 건네주고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폐하, 목욕물을 데워두겠습니다.”
“어, 그래.”
그렇게 잠시 목욕물이 준비되는 동안 책장에 있는 책을 하나둘씩 꺼내 보니 개중에 몇몇 책은 내가 도통 읽을 수가 없는 글이었다.
“흠……. 이건 뭐지?”
[크로아티아어로군.]
“크로아티아? 그럼 이것도 슬라브어인가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네.]
“흠……. 그래요? 헝가리 놈들은 읽지도 못할 책을 왜 책장에 꽂아놓는 것인지 원…….”
[뭐……. 그들과 섞여 살다 보면 말 정도는 통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겠지.]
“그래요?”
하긴 이웃하며 오래 지내다 보면 말을 배우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이번 선거에서 드러났던 제국의 언어문제도 골치였다.
문맹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서로 말이 잘 안 통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끄응……. 산 넘어 산이로군.”
제국의 영토는 한반도의 3~4배 정도 되었는데, 여기서 존재하는 언어는 소수민족의 것까지 합치면 수십 가지가 넘었다.
내가 죽기 전까지 이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친다고 해서 저들이 능숙하게 독일어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들의 언어를 존중해 주되……. 아예 민족별로 동원방식을 바꿔야 하나?”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사람들끼리 말이 안 통하니까 특정계층마다 쓰는 말을 제한시키는 거죠. 정치인은 독일어를 해야 하고 자본가는 헝가리어를 하고 군인은 슬라브어를 하는……. 뭐 그런 거요?”
[자네 미쳤나!!!]
결국, 밤까지 혼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