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05화
히틀러?
그렇게 사흘 정도 업무에 시달리니 머리가 핑 돌며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나풀거리며 춤을 췄다.
잠도 자지 못하고 이틀 동안 서류만 처리하다 보니 그리된 것이었다.
이놈의 나라는 뭐 이리 해야 할 일도 많은지 올라오는 보고서와 결재서류를 처리해도 돌아보면 또 그만큼 쌓여 있었다.
[보통은 혼자 처리하지 않고 밑에 사람들에게 적당히 일을 나눠주네만…….]
‘제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믿고 일을 맡겨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
[나름 제국 내에서 공부 좀 했다는 이들만 모여 있는데, 왜 믿질 못한다는 건가?]
‘그 사람들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닌데…….’
[그럼 왜 그러는 건가?]
‘으음…….’
영감님의 말에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저는 아랫사람들을 믿고 싶지만 그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다른 마음을 품어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아니, 자네는 고작 그런 것이 무서워서 일을 못 맡기겠다는 건가?]
영감님의 말에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 무섭다기보다는 되도록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다가…….’
[결국, 그게 두려워서 그런다는 것이 아닌가?]
‘아니라고요!’
[그렇게 따져보면 자네도 그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잖은가.]
‘그건 아니죠! 제가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인지 아시는 분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영감님은 혀를 끌끌 차셨다.
[정직? 성실? 쯧쯧쯧……. 자네는 성실한 것이 아니라 그저 무식하게 일하기를 좋아하는 것일 뿐이네, 세간에서는 이를 일벌레라고도 부른다지.]
‘이, 일벌레…….’
[아닌가?]
영감님의 말을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어마어마한 서류들도 굳이 내가 처리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서류작업을 처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제개편과 교육제도개혁을 고민하고 있었으니……. 그냥 일에 미친 놈이 맞았다.
“후우……. 일벌레……. 일벌레…….”
“폐, 폐하!? 소신은 아직 멀쩡합니다!”
“……?”
서류에 파묻혀 있던 슈머링 경이 입가의 침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이마에는 서류 한 장이 딱 달라붙어서 나풀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조금 전까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었던 듯했다.
“포, 폴란드 군단 지원예산보고서가……. 어디 갔지?”
“자네 이마에 붙어 있네.”
“아…….”
말끔했던 슈머링 경은 고작 사흘 만에 길에서 구걸하는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풍겼으며 그의 눈가는 누군가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거뭇거뭇했다.
“고생이 많군.”
“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제국의 인민들과 폐하를 위한 것인데 어찌 고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고생인 것은 변함없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나 바흐 남작을 부려먹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영감님께 일벌레 소리를 들으니 괜히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자네는 이만 돌아가게.”
“예?! 하, 하지만…….”
이만 돌아가 보라는 내 말에 슈머링 경의 얼굴에는 화색을 띠며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주변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보고는 내 눈치를 살폈다.
“폐하를 두고 어찌 저 혼자 편하게 쉴 수 있겠습니까? 저는 끝까지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여기 남아 있는 건 자네가 다 처리해 주겠나?”
순간 슈머링 경의 눈동자가 좌우로 심히 떨렸다.
“……생각해 보니 집에 홀로 있는 부인이 걱정되어 참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겠군.”
“머,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폐하께서도 무리하지 마시고…….”
“그래, 잘 가게나.”
슈머링 경은 혹시라도 내가 붙잡을까 걱정한 것인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잽싸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렇게 넓은 집무실에 혼자 남으니 조금 전까지 서류 위에 앉아서 책을 읽으시던 영감님이 내게 물었다.
[자네도 슬슬 쉬는 게 어떤가.]
나는 펜을 집어 들었다.
‘일이 남았는데 어찌 쉬겠습니까?’
[허, 그럼 슈머링 경은 왜 돌려보낸 건가?]
‘방해돼서요.’
[……방해?]
그러고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는 손을 움직였다.
눈으로는 서류를 훑어보고 손으로는 여러 가지 오류 사항을 지적하고 문제가 없다면 서명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에 집중하여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하다 보니 드문드문 실수가 있었지만 그런 것은 일을 대강 끝마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걸러낼 수 있었다.
그렇게 종일 오류를 수정하고 서명하고 검토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을 다 마치고 다시금 기지개를 켜니 날이 어두웠다.
“끄응……. 다 했다.”
[……놀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군.]
“또 뭐가 놀랍습니까.”
오랫동안 한자리에 앉아 업무를 봐서 그런지 목은 뻣뻣하고 허리가 찌뿌둥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끙……. 오랜만에 집중을 좀 했더니만 피곤하네, 다음부터는 영감님 말처럼 어지간한 업무는 아랫사람들한테 맡겨둬야겠네요.’
[…….]
‘영감님?’
영감님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서류 더미를 돌아보며 경악하셨다.
[이, 이걸 자네 혼자……?]
‘오랜만에 집중해서 빨리 끝냈어요.’
[아니, 그럼 그동안에는……?]
‘쉬엄쉬엄하는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
영감님은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 * *
의회가 내게 전권을 몰아준 탓에 업무량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황제에게 많은 권한을 쥐여준다는 것은 그만큼 운신의 폭도 넓어진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짐의 생각으로는 앞으로의 업무수행 방식을 조금 개선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
“개선이라고 하시면……?”
“그건…….”
제국의 행정부는 제일 꼭대기에 황제가 있었고 그 밑으로 총리와 내각, 그리고 제국 각 지역에 파견된 총독과 지방관이 존재했다.
“그동안은 총독과 지방관들이 각지에서 올라온 문서들을 대략 정리하여 빈으로 보내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짐이 생각하기에 그건 너무 비효율적인 처리방식인 것 같더군.”
내 말에 슈머링 경은 눈을 끔뻑이며 내게 물었다.
“그럼 폐하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하신 겁니까?”
“후후……. 그렇다네.”
내가 생각한 방법은 무척 간단했다.
제국의 총독과 지방관들이 현지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보고와 정책 건의 등을 한 번에 동봉하여 빈으로 올려보내면 내가 그걸 확인하고 지시사항과 평가서를 작성하여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업무효율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지방에 대한 통제도 강화할 수 있지.”
“어……. 그, 그렇군요…….”
슈머링 경은 영 떨떠름한 모양이었다.
“왜 반응이 그런가?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가?”
“불만은 아니옵고……. 그리되면 지방 총독들의 업무가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왜?”
“그들은 이미 현지 업무만으로 아주 바쁜데, 여기서 이런 업무를 추가시켰다가는…….”
“허허, 아니지 그게 아니야 슈머링 경.”
“예?”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 본인은 그들에게 업무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비효율적이었던 업무를 개선해 주는 것일세.”
“……?”
“그동안 이것저것 뒤섞어서 상부로 올려보내니 얼마나 복잡하였는가? 짐은 이것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업무효율을 올리려는 것이네.”
말은 그렇지만 실상은 과중하게 쏠린 업무를 총독들에게 넘겨주어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 방법이 쓸모없이 일거리만 늘리는 것은 아니었다.
각 지역의 총독들은 지방의 정보를 잘 취합하여 상부로 올려보낼 것이니 이를 분류하는 시간도 줄어들 것이고 나도 지방의 분위기나 여러 가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럼 앞으로 내가 새로운 정책을 입안할 때 그러한 정보들은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 얼마나 좋은 정책인가?”
“그건 그렇지만…….”
슈머링 경은 내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차마 내게 말할 용기는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네가 동의한다면 라이너 대공에게 말하여 이를 제국 전역에서 시행할 생각이네.”
“……지방 총독들이 폐하께서 그들을 감시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겠지, 실제로도 그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않는지 감시하려고 이러는 것이야.”
내 말을 들은 슈머링 경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폐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럼 이 건은 이렇게 하는 것으로 하고……. 다음은 제국군과 공무원 임용제도를 좀 손보려고 하네.”
“지, 지금 말입니까?”
공식적인 각료회의도 아니고 총리를 만나는 것도 아니라 그 밑에 있는 국무장관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군대와 임용제도를 뜯어고치겠다고 말하니 슈머링 경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슈머링은 그동안 내가 일하는 것을 옆에서 봐왔기에 내가 정말로 그리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이, 이런 자리에서 말할 주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폐하…….”
“허허, 제국 인민들의 손으로 뽑은 제국의회의 대표들이 내게 모든 권한을 떠넘겨줬는데 자리가 무슨 상관인가?”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다음에 의회에서 이를 문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의회에서 내 독단적인 행동을 비판하며 권한을 수거해 가는 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것이다.
“상관없네.”
“……알겠습니다.”
슈머링 경도 반쯤 포기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공무원 임용제도는 기존의 것을 살짝 바꿔서 아예 시험을 봐서 뽑고자 하네만.”
“시험이라고 하시면…….”
“전문직이나 사무직이나 업무 전문성을 따져서 사람을 뽑는 것이지.”
듣기만 해도 무척이나 복잡할 것 같아 보였기에 슈머링 경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그럼 그건 어떻게 진행하실 생각입니까?”
“별거 있나? 한 달 안에 후딱 처리하지.”
“…….”
“대답.”
“알겠습니다…….”
슈머링 경은 울상을 지었다.
황제의 말은 또 그와 같이 한 달간 집무실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 * *
관리인이 된 요한 게오르크는 발전하는 빈의 풍경처럼 나날이 승승장구하였다.
요한은 노동자들을 친절히 대우하면서 그들의 불만 사항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들어줬기에 평가도 무척이나 훌륭했다.
거기에 매사에 근면·성실하였으니 정부의 여러 가지 토목사업이 벌어질 때마다 공무원들은 그를 불러서 관리직을 맡겼다.
이렇게 공무원이 하는 일에 눈을 뜬 요한은 그들의 업무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던 차에 정부에서 기존에 추천제와 선출제로 돌아가던 공무원 임용제도를 능력 위주로 개편한다고 하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이 되면 알로이스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요한은 어린 아들을 위해 공무원에 도전했다.
그는 무언가를 새로 배우기엔 나이가 많은 나이였지만 그가 공무원이 되겠다고 나서니 주변 사람들도 자기 일처럼 도와줬다.
“뭐? 요한 씨가 철도청에 들어간다고?”
“그라츠에 사는 우리 삼촌이 서점을 하시는데, 교재 같은 건 내가 싸게 구해줄게요!”
“요한 씨, 사과가 머리에 좋다기에 몇 개 챙겨왔으니까 공부할 때마다 드슈.”
“허허, 자네가 공무원이 된다면 나야 환영이지! 어려운 것이나 모르는 것이 있다면 언제나 내게 물어보게나.”
낮에는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알로이스를 재워두고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던 요한은 제국에서 처음으로 치러진 임용시험에서 당당하게 합격했다.
그의 나이 쉰한 살의 일이었고 임용시험의 합격자 중에서는 최고 연장자였다.
영광스러운 임명식에서 신임 대표로 뽑히게 된 요한은 황제의 앞에 서게 되었다.
“뵙게 되어 여,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그……. 지난번에……. 하수구 물?”
“그, 그것은…….”
요한은 아들의 일을 떠올리고는 땀을 뻘뻘 흘렸다.
긴장한 그의 모습에 황제는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덕분에 제국에 숨어든 쥐새끼도 잡고 이것저것 제법 이득을 봤으니 그리 걱정하지 말게.”
“아, 알겠습니다.”
“그래, 이번에 시험을 통과했다고?”
“예, 폐하!”
“열심히 하게, 그리고 자네 아들에게도 내 안부를 전해주고 말이야.”
그렇게 말한 황제는 임명장과 함께 그의 가슴팍에 그가 수석임을 증명하는 훈장을 달아줬다.
“행운을 비네 어……. 이름이?”
“요한 게오르크 히틀러입니다!”
“어……. 히틀러?”
자신의 이름을 들은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웃으면서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단상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