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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109화 (109/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09화

붉은 물결?

그렇게 내부를 조금 정리하고 외부를 바라보니 한창 유럽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서방과 러시아의 전쟁이 슬슬 끝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 독자적으로 러시아와 협상에 들어간 덕에 전장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대신 다른 쪽에서는 피가 튀었지만…….

“왈라키아와 몰다비아가 러시아에 할양되지 않는다면 협상에 우리는 임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오스만의 땅이니 그쪽에 문의하셔야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걸 가져가면 그대들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잖습니까.”

초장부터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요구하는 러시아의 행태에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러시아가 무조건 저 두 땅은 챙겨가야겠다는 입장을 보이니 당연하게도 오스만은 이에 반대했다.

“올라키아와 몰다비아를 내어주면 러시아의 국경에서 이스탄불까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잖소!”

그들로서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거기에 전쟁에서 진 것도 아닌데, 왜 자신들의 땅을 내어주어야 하냐면서 격렬히 반발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영국과 프랑스의 대표단이 머리를 모을 수밖에 없었다.

“씁……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쪽이나 우리나 시간이 얼마 없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니 그냥 내어줍시다.”

“오스만 쪽에서 반대하잖소.”

“우리가 언제는 저들 의견을 들었습니까? 대충 을러대고 입맛에 맞는 미끼만 살살 뿌려놓으면 알아서 토해낼 겁니다.”

“……그렇겠군요.”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이 말하는 영국 대표의 말에 프랑스 대표는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프랑스였다.

“이보시오 그냥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저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서로 간에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우리가 전쟁에서 패하지도 않았거늘 어째서 땅을 넘겨줘야 한다는 말이오!”

“후우…… 이보시오 지금 머리가 굳어서 잘 안 돌아가는 모양인데, 러시아가 저 땅을 포기할 것 같소?”

“뭣?!”

프랑스 측 대표는 러시아의 영토 확장야욕과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오스만의 사정을 언급하며 그들을 압박하고 들어갔다.

“어차피 러시아는 동유럽이 모두 자기네들 땅이라 생각하고 있잖소. 그러니 당신네들과 러시아와의 대립은 피할 수가 없다는 뜻이지요.”

“그걸 지금 왜…….”

“여기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지켰다고 해봅시다.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소?”

“그야 당연히…….”

“불가능하지요. 그러니 우리 프랑스와 영국의 손을 잡고 저들에게 대항해야 하지 않겠소?”

“…….”

대놓고 그냥 땅을 내놓으라는 협박에 오스만 측 대사는 할 말을 잃었다.

“러시아는 절대 욕심을 버리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우리와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그대들을 어찌 믿고 그러겠소.”

“하하하…… 이보시오 우리는 함께 러시아에 맞서 싸워 피를 흘린 사이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동맹이 어디 있겠소?”

“으음…….”

거기에 영국 측 대표도 찾아와서는 오스만대사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잃는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그곳이 오스만에 있어 그리 중요한 곳도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럼 이렇게 하지요. 우리 연합왕국에서 오스만의 부채를 적절한 가격에 매입해 줄 것이니 그걸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손해를 메우시지요.”

“국채매입……?”

영국이 오스만의 빚을 대신 지어주겠다는 말에 마음이 혹했다.

물론 그들이 정말 순수하게 오스만을 도우려고 그런 것인지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크흠…… 일단 술탄께 말씀은 드려보겠습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집요한 설득 끝에 오스만의 술탄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러시아에 양도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와 동시에 영국은 그리스 지역의 몇몇 섬들을 오스만에게 넘기고 그들의 국채를 매입했으며, 프랑스는 군사기술단을 보내어 군대육성을 도울 것을 ‘약속’했다.

그렇게 영국과 프랑스가 허리가 반으로 접힐 때까지 오스만을 설득하여 땅을 떼어주는 것이 종전협상의 ‘시작’이었다.

영국은 총선으로 프랑스는 내부불안으로, 각자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서방은 러시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유리한 것이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서방과의 오랜 전쟁으로 허약했던 러시아의 경제는 붕괴 직전이었고, 무리하게 공장을 가동시킨 탓에 노후화된 기계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거기에 전쟁에 집중하느라고 콜레라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분명 오스트리아에서 들여온 치료제가 있었음에도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또 죽을 예정이었다.

게다가 전선의 병사들은 만성적인 보급품과 의약품 부족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삼시 세끼는커녕 하루에 한 끼를 먹기도 어려웠고 조그마한 상처로 병에 감염되어 죽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거기다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이 병영 내에서 전염병도 퍼지며 병사들을 괴롭혔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점은 하루에 수십 명씩 죽어 나가고 있음에도 파스케비치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렇다 보니 똑같이 전염병으로 고통받던 연합군은 겉으로나마 멀쩡해 보이는 러시아군의 모습에 단단히 겁을 집어먹었다.

이는 본국에서 파견 나온 외교관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이 생각하기에 러시아는 진즉에 내부의 여러 문제들로 무너져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다.

“현 상황에서 상호 간에 배상금을 논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입니다.”

“연합왕국도 프랑스와 같은 뜻이오.”

“우리는 땅도 받았으니 관대한 마음으로 넘어가 드리리다.”

양측은 겉으로는 강하게 나오면서 어떻게든 자국의 손해를 줄이는 데 집중했고 이게 또 의외의 시너지를 만들어내며 회담은 별문제 없이 잘 흘러갔다.

“하하하…… 이렇게 다들 생각이 잘 맞는 것을 진즉에 알았다면 전쟁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 중이었습니다.”

“동감하는 바입니다.”

1849년부터 1854년까지 무려 5년이란 세월 동안 계속되었던 서방과 러시아의 전쟁을 끝을 맺었다.

일단은 말이다.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경제는 폭삭 주저앉았고 그와 동시에 퍼진 전염병으로 국내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러시아군은 이전부터 서방과의 전쟁을 준비하였지만 막상 전쟁에 들어서고부터는 그렇게까지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이반 파스케비치 대공이 없었다면 전쟁에서 패배했을지도 몰랐을 정도로 무능한 모습을 보여줬다.

“내 말이 틀린가?”

이 모든 것은 기존의 구습을 때려 부수고 새로운 러시아를 만들고자 하는 황제에게 훌륭한 명분이 되었다.

“분명 내 아버지께서 전쟁을 고민하실 때, 그대들은 옆에서 그걸 부추겼지.”

“…….”

전대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것이었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서 그걸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는 내게 항상 괜찮다고 했지.”

“으음…….”

“또 누군가는 전선의 상황이 안정적이라고 했어.”

“…….”

“그런데 결국 우리가 얻은 것이라고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뿐이로군…… 그것도 이전에 아버지께서 유럽의 혼란을 이용하여 점거했던 것을 돌려받은 것이니 사실상 바뀐 것은 없는 셈이로군.”

신료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따지고 보면 전쟁을 밀어붙인 것도 황제였고 자신들은 그런 황제의 등을 살짝 밀어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황제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사실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일을 밀어붙일 수 있는 명분을 원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조금 이러다가 말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현 시간부로 그대들을 전부 해임하겠네.”

“폐, 폐하?”

“잘 못 들었습니다?”

새로운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이번 전쟁의 책임을 물어 신료들을 전부 해임해 버리는 것으로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 * *

서방과 러시아의 전쟁이 승자 없이 끝나버리자 사르데냐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다.

이번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 판단하여 앞으로 있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앞서 그들의 지지를 받으려 무리하게 참전한 것인데…….

“설마 전쟁이 그대로 끝나버릴 줄이야…….”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 카보우르는 명확한 승자 없이 끝나버린 전쟁에 당혹스러웠다.

분명 그의 계획대로라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전하고 적당히 배상금을 뜯어내어 손해를 복구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를 격파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흐지부지로 끝나버렸고 덕분에 배상금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뿐인가? 현재 프랑스는 내부안정을 이야기하며 자신들을 도울 수 없다고 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자신들과 경쟁 중인 로마공화국을 팍팍 밀어주며 간신히 국가시늉만 내던 그들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일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영국과 접촉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프로이센과……?”

어느 쪽이건 사르데냐에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영국은 대륙정세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 전쟁으로 한동안은 고립주의 노선을 탈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고 프로이센과 협력하자니 외교적 왕따 신세인 이들과 손을 잡는 것은 이쪽에도 손해였다.

“……일단은 전쟁의 여파를 잠재우며 상황을 좀 지켜봐야 할 것 같군.”

결국 카보우르가 선택한 것은 안정이었다.

어차피 로마공화국이나 오스트리아와 싸워야 한다면 지금은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하여 힘을 길러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양시칠리아로 진군하여 남부지역의 통일을 완수해야 합니다.”

“으음…….”

로마공화국의 전쟁장관인 가리발디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반동적인 전제왕권의 휘하에서 고통받는 동포들을 구할 것을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의회제를 본떠 만든 원로원의 지도자 주세페 마치니는 가리발디의 제안을 섣불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보게 친구, 나라고 양시칠리아의 악독한 왕 밑에 신음하는 인민들의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네만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에 군을 일으켰다가는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네.”

“그것이 동포를 구하는 것보다 중요합니까?”

“……동포를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받아들일 여건이 되지 않는데, 무작정 받아들일 수는 없잖은가.”

마치니는 섣불리 양시칠리아를 공격했다가 오스트리아의 지원이 끊겨 혁명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반면 가리발디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체제의 억압에 시달리는 동포들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건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지만 가리발디의 눈에 보인 마치니는 혁명의 뜻을 잃고 타락한 정치인이었고, 반면에 마치니의 눈에 보인 가리발디는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전쟁을 벌이려는 전쟁광이었다.

이렇듯 서로 의견이 맞지 않다 보니 결국 가리발디가 폭발하여 마치니에게 선언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부로 이 빌어먹을 광대놀이는 그만두겠소!”

가리발디는 그리 말하며 자신의 제복 상의를 벗어서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지금 무얼 하는 겐가!”

“집정관께서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게 무엇인가.”

“동포를 구하는 겁니다!”

마치니는 동지가 떠나려는 것을 막았다.

“이보게 가리발디, 우선 진정하고 상황을 잘 지켜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부름을 받았고 이에 응할 것이오.”

가리발디는 그 말을 끝으로 로마공화국의 전쟁장관직을 홀연히 내려놓고 로마를 떠났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던 청년들을 불러모으며 집안에 고이 보관해 두었던 붉은 셔츠를 꺼내 들었다.

“형제들이여! 나는 지금부터 남쪽 동포들의 자유를 위해 나아갈 것이다. 그대들도 함께하겠는가!”

“따르겠습니다!”

가리발디의 집결 선언에 로마공화국 전역에서 각자 생업에 종사하던 청년들이 구름처럼 붉은 셔츠를 입고 그의 아래로 몰려들었다.

로마에서 일어난 붉은 물결은 그 방향을 남쪽으로 잡고 천천히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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