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121화 (121/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21화

결혼.

남녀가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종래에는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에 스스로 무덤으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어허, 무덤이라니?]

옛날 귀족들이나 왕족들은 서로 친목을 도모하며 양 가문이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쯧쯧…… 또 맛이 가버렸구먼.]

특히 국가 간의 결혼 같은 경우는 양 국가의 왕족들이 혈연으로 묶이게 되어 강력한 동맹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고, 일이 잘 풀린다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상대 가문의 작위를 날름 집어삼킬 수 있는 아주 우아한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내가 속한 합스부르크 가문도 이러한 방식을 아주 잘 활용하여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조그마한 지방의 약소가문에서 몇 세대 만에 전 유럽을 호령하는 대제국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자네…… 두려운가?]

‘뭐가요.’

[지난번에 엘리자베트 양이 한 말…… 그것 때문에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허허, 저는 영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요. 심심하시면 저기 노인분들하고 수다나 떠시지요.’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정원 한편에서 이를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귀족들을 가리켰다.

그들도 내가 눈치준다는 것을 알아챈것인지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그대로 자리를 떴다.

[그래? 그럼 이 새벽부터 왜 애꿎은 시종들을 괴롭히면서 정원을 뜯어고치고 있나?]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요?’

[…….]

내가 갑자기 정신이 회까닥해서 애꿎은 정원을 뜯어고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뜬금없이 정원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 역시 아니었다.

그저…….

“폐하!”

“헨리, 어찌 되었나.”

“시키신 대로 에델바이스 꽃을 본궁과 후원과 이어지는 길목에 심고 꽃이 돋보이도록 주변을 잘 정리해 뒀습니다.”

“훌륭하군, 헨리.”

“헤헤…… 폐하께서 시키신 것이니 완벽을 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잖습니까.”

헨리는 참으로 유능한 시종장이었다.

어지간한 일은 굳이 내가 시키지 않아도 슬쩍 내 눈치를 살피고는 알아서 처리했으며 내가 명령이라도 내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냈다.

이러니 그를 신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내가 정원을 좀 돋보이게 바꾸고 싶다 하니 곧장 사람을 불러다가 이리 뜯어고치지 않았는가?

“엘리자베트 양께선 지금 조피 대공비 전하를 접견하고 계시니 제가 모셔오겠습니다.”

“그래, 어머니께서 괜히 트집 잡으시면 내가 급한 일로 불렀다고 하게. 그럼 넘어가실 거야.”

“예, 폐하.”

헨리를 보내고는 초조한 마음에 정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괜히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니 영감님이 슬쩍 말을 걸어왔다.

[정신사납게 돌아다니지 말고 앉아서 기다리게.]

‘오랜만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불안해서 그래요.’

[그으래? 본인이 보기에는 아닌 것 같네만.]

‘맞거든요.’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뭔가 사람 속을 살살 긁어놓는 영감님의 화법에 살짝 감정이 요동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면의 불안함이 조금 사라졌다.

그렇게 정원 한가운데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책을 꺼내 들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 하긴 자네에게는 뒤마의 소설이 취향이겠구먼.]

‘그냥 재밌어서 읽는 거죠.’

[하하! 맞는 말일세, 본인도 늘그막에 침대에 누워 프란츠 선생의 변신을 읽을 때가 제일 재밌었지.]

‘프란츠 선생은 또 누구예요?’

[아니, 자네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대문호 프란츠 카프카도 모르는가? 에잉 쯧쯧쯧…… 그럼 변신이라는 소설은 들어봤겠지?]

‘사람이 벌레가 됐던 그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읽어봤다.

그런데 그걸 쓴 작가가 그렇게까지 유명한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늘그막에 폐렴으로 골골거릴 때 침대맡에 두고 천천히 읽었는데 말이야…… 참으로 재밌더군.]

‘재밌긴한데…… 내용이 좀 암울하지 않았던가요.’

[허허, 결국에는 가족들과 잘 화해하여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랬던가……?’

분명 내가 봤던 것은 안 그랬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감님께 물었다.

‘영감님, 끝까지 다 보신 거예요?’

[응? 허허, 몸이 좋지 않아서 끝까지 보진 못했네만…… 보통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결국엔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도 행복을 찾는 것이 당연하잖은가.]

‘그, 그렇지요.’

아무래도 영감님은 암울한 결말부를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아니, 이렇게 유령으로 붙어 다니는 것을 보면 아직은 살아 있다고 해야 하나?

[왜 그런 눈으로 보는가?]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영감님은 살아 있는 거랑 죽어 있는 것 중에서 어떤 상태이신지요?’

[흠…… 어려운 질문이로군. 내 육신으로 마음껏 돌아다니며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을 살아 있다고 부른다면 나는 죽은 것이지만 의식이 존재하는 걸 살아 있다고 하면 나는 살아 있는 것이겠지.]

‘그럼…… 반만 죽은 건가요?’

영감님은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셨다.

[쯧쯧쯧…… 굳이 따져보자면 일단은 죽은 것이네, 하지만 저세상에서 처분받기 전의…… 일종의 선고유예상태라고 해야 하려나? 아무튼 그런 것이지.]

‘오…… 그럼 영감님은 잠재적 범죄자네요?’

[자네는 어째 입만 열면 사람을 열받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군.]

‘외교석상에서 상대 약 올리기 딱 좋은 재주로군요.’

[으휴…….]

영감님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퉁명스럽게 내게 답했다.

[내게 현생은 아무런 상관이 없네.]

‘예?’

[어차피 내 차례는 끝났어. 지금의 나는 이미 죽은 지 오래라는 말일세.]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네를 지켜보며 옆에서 조언이나 해주는 게 전부이네, 기왕 따져보자면 연극 중에 옆에서 훈수를 두는 것에 가깝지.]

영감님은 회한이 서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러니 자네는 내게 어떠한 부채감이나 마음 쓸 것이 없다는 것이네, 이미 나와 내 제국은 죽었고 지금은 자네의 것이네.]

‘허허…… 갑자기 곧 죽을 사람처럼 말씀하시니 조금 당혹스럽네요.’

[이미 죽은 사람인데 무엇이 당혹스러운가? 본인은 그저 자네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한 말일세.]

‘아, 예…….’

영감님은 그 뒤로 잠시 말없이 정원에 피어 있는 에델바이스 꽃을 돌아보셨다.

[시씨나 루디도 이 꽃을 참 좋아했는데…….]

‘루디는 누굽니까?’

[…….]

영감님은 말없이 꽃만 바라보셨다.

그러고는 문득 내게 물으시길.

[……자네는 그 소설의 결말을 봤겠지?]

‘어떤 거요?’

[프란츠 카프카 선생의 소설 말일세.]

‘이크! 벌레가 되었어요 말입니까?’

[변신 말일세 변신!]

영감님은 갑갑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어 번 두들기시고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그 소설의 결말은 어찌 되는가? 결국 그레고르는 다시 인간이 되어 가족들과도 잘 지냈나?]

평소의 영감님과는 다르게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영감님의 말에 조금 의아했다.

영감님은 왜 소설의 결말에 집착하는 걸까.

생전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물어볼 정도는 아닐 텐데 말이다.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됐던 건 그냥 정신병으로 그렇게 느낀 거고 결국엔 가족들과 화해해서 다들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렇군…… 잘된 일이야. 참으로 잘된 일이야.]

영감님은 그 소설에 감정이입하고 계셨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뭐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지만…….

“바이에른의 공녀 엘리자베트 양께서 오셨습니다.”

그렇게 잠시 영감님과 대화가 뜸해진 사이에 엘리자베트 양이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는 무척 화가 나 보였다.

“오랜만이야 시씨, 그동안 잘 지냈…….”

“끔찍한 시간이었어요.”

“흠흠…… 그렇군.”

요즘 들어 어머니께서 부쩍 시씨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는데…… 항상 웃는 낯이던 그녀가 처음부터 화를 낼 정도면 아무래도 그냥 부르신 것은 아닌 듯했다.

“또 어머니인가?”

“말도 마세요. 대공비 전하께서 찻잔 하나 잘못 쥐었다고 세 시간 동안 찻잔을 들고 있게 했다니까요?”

“흠…….”

하긴 어머니께서는 옛날부터 조금 이상한 곳에 집착하시는 경향을 보이고는 했다.

모든 걸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 하고 자신의 뜻과 어긋나면 어떻게든 다시금 원위치로 돌려놓으려는 그런 사람 말이다.

마치 아침드라마에서나 흔히 볼 법한 재벌집 사모님 같은 사람이다.

[거기에 좀 복잡한 뒷사정이 섞인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아침드라마도 아세요?’

[자네 기억을 훑어보니 재밌는 것들이 많더군.]

‘그러시겠죠.’

영감님의 말처럼 내 어머니이신 조피 대공비는 악독한 시어머니이자 야심찬 여인이다.

한편으로는 아무리 좋게 표현하려 해도 온전하다고 할 수 없는 아버지와 강제로 결혼하여 딱딱한 빈의 궁전에 내던져진 소녀가 어렸을 적의 순수와 선함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어려웠겠지.

전부 이해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행동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어머니를 너무 미워하진 말게.]

‘미워하진 않습니다. 그냥 좀 귀찮은 정도죠.’

문제는 그 귀찮음의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는 거다.

“분명 이모님이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도 이모님은 뭐가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꾸……!”

“그 건에 대해서는 내가 사과할게.”

내 말에 엘리자베트 양은 하던 말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이모님을 뒤에서 욕한 것처럼 되어버리잖아요.”

“어…… 아닌가?”

“아니에요! 이건 그저 제 사소한 불만 거리를 폐하의 앞에서 늘어놓는 것일 뿐이에요.”

그녀는 굉장히 할 말 많아 보이는 얼굴로 나를 쏘아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저 꽃…… 폐하께서 하신 건가요?”

“난 명령만 했지 옮겨 심은 건 시종들이야.”

“평소에는 제가 아무리 찾아가도 아무런 반응도 없으시던 분이 왜 멀쩡하던 정원을 바꾸셨어요?”

그녀는 턱을 괸 채로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에델바이스를 어디서 이렇게 많이 구하셨대요?”

안 그래도 그녀에게 몇 번씩 꽃을 선물했더니 귀족들이나 돈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에델바이스를 뽑아갔던 탓에 알프스산맥을 이 잡듯이 뒤져서 꽃을 구해온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웃으며 넘겼다.

“당신이 좋아한다기에 조금 힘써봤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저는 에델바이스를 좋아하진 않는데요.”

“?!”

분명 영감님은 엘리자베트 양이 에델바이스를 무척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영감님을 돌아봤더니 정작 당사자는 이미 하늘로 날아간 것인지 땅으로 꺼진 것인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갑자기 어딜 보세요?”

“크흠…… 누가 지켜보는 듯한 기분 탓에 그만…….”

“궁전에서 비밀은 없다잖아요. 어느 귀여운 어린 메이드가 호기심에 폐하를 바라보는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녀는 슬슬 초겨울을 알리는 찬바람도 잠시 잊을 정도로 환한 미소를 보이며 테이블 위에 꽂혀 있는 에델바이스 한 송이를 꺼내어 향을 맡았다.

“저는 꽃이 좋은 게 아니라 폐하께서 제게 선물해 주셨던 거라 좋은 거예요.”

“…….”

“그리고 헨리 경의 말로는 폐하께서 다른사 람한테 뭘 직접 선물을 골라준 것도 처음이라면서요?”

전생에도 남들에게 선물해야 할 때, 굳이 고민하지 않고 적당한 선물세트나 사람들이 많이 사 가는 것을 선물하고는 했다.

현생에서도 매번 내 선물은 어머니께서 온갖 검수를 거쳐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선물을 주었다.

그게 아니라면 헨리에게 선물을 보내라고 하면 그가 알아서 잘 처리했다.

그러니 그녀의 말처럼 내가 누군가에게 뭘 선물하려고 직접 고른 것은 처음이긴 했다.

그녀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에델바이스를 내게 건네면서 말하길.

“폐하, 제 인생에 다시 없을 기억을 남기시려면 지금이 기회에요.”

“그렇군.”

그녀의 말에 나는 웃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국정의 복잡함이니 도무지 내 말을 들어 처먹지 않는 이들에 대한 짜증이 전부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동안 고민하던 것에 대한 내 대답이 더욱 확고해졌다.

“잠깐 눈 감아줄래?”

“이상한 짓 하시려는 거죠?”

“당신이 생각하는 건 아닐 거야.”

“좋아요. 그럼 믿어볼게요.”

엘리자베트는 두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에델바이스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 아주 오래된 기억 속에서 어떤 여인이 울면서 내게 건네줬던 그 물건을 만들었다.

내 기억 속의 여인은 눈물을 보이면서 나를 꼬옥 안아주고는 내 손에 꽃반지를 하나 만들어주며 내게 말했다.

[병권아 엄마는 언제나 널 사랑할 거야.]

그녀의 말에 나는 멍청한 건지 아직 순진했던 건지 웃으면서 여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었지.

[나도 사랑해 엄마!]

나는 그게 어머니와의 마지막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발치에 매달려서 울면서 떼쓰기보다는 그냥 보내줬다.

“이제 눈 떠도 돼.”

“뭘 하길래 성숙한 여인의 손을…….”

그녀는 자신의 약지에 걸려 있는 꽃반지를 보고는 잠시 할 말을 잊고 나와 반지를 돌아봤다.

“비텔스바흐의 엘리자베트 양,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책상에 앉아 펜이나 끄적이는 이 못난 놈과 인생을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이건 좀 새롭네요.”

그녀는 자신의 손에 있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반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흠흠…… 대답이 아직인데?”

“글쎄요…….”

“?!”

엘리자베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로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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