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22화
“요제프.”
“예, 어머니.”
“소식은 들었다.”
아무래도 어머니께서는 조금 전 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내가 말씀드리기도 전에 다른 누군가를 통해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대뜸 나를 불러서는 이렇게 무거운 분위기로 나를 압박하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뻔뻔하게 나가야 했다.
“바쁜 사람 불러놓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오며 가며 시녀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네가 정원에서 엘리자베트 양에게 청혼했다더구나.”
“제 주인에 대해 떠들고 다닌다는 것은 시녀들이 궁정의 법도를 무시하고 제 주인을 업신여긴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대놓고 시녀들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해도 되겠냐고 한번 쓱 찔러봤지만 어머니께서는 표정 하나 바뀌는 것 없이 담담하게 맞받아치셨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로구나. 이참에 궁내부를 대대적으로 한번 손봐야 할 것 같은데…… 한번 내게 맡겨보겠느냐?”
“그럴만한 돈이 있었으면 진즉에 필요한 자들에게 적절히 돌아가도록 했겠지요.”
“이상하구나. 그 돈은 국가의 것이 아니라 가문의 것인데…… 어찌 네가 전부 결정한다는 말이더냐?”
“가문의 주인이 결정했으니까요.”
어머니께서는 나를 비웃으셨다.
“가문의 주인이라고 가문원들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란다 요제프.”
“하나같이 어디 나사 빠진 사람들이 제게 반발하면서 나설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애석한 일이지만 가문 내에서 그나마 정신이 멀쩡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합스부르크의 오랜 유전병으로 정신에 문제가 생겼거나 몸이 불편하거나 아니면 몸도 불편하면서 정신도 온전치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놈들은 내가 여기저기 요직에 앉혀놓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고 있으니 결국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어머니께서 가문의 재산을 내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말씀하신 것은 내부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게 전달하는 것이다.
겸사겸사 내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덤이고.
“결혼식은 정확히 두달 뒤에 성 어거스틴에서 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시 생각해 볼 수는 없겠니?”
“이미 몇 번이고 생각해 본 끝에 결정한 겁니다.”
“그렇구나…….”
어머니께서는 잠시 말이 없으셨다.
그저 답답하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래, 네가 좋다면 그걸로 충분하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두달 후에 성 어거스틴에서 결혼식을 열 수 있도록 준비해 주마…… 그 정도는 내가 해도 되겠지?”
“물론이죠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의외로 순순히 내 말에 동의하셨다.
[순순히 넘어가 주시니 다행이로군.]
‘어머니께서 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런 것이겠지요.’
어차피 내가 결혼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서면 어머니께서는 이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가 없다.
아무리 궁정 내에서 어머니의 입김이 강하다지만 지난 세월 동안 오스트리아라는 국가를 정상화시키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내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허허……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네만 엘리자베트 양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계획한 건가?]
‘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게 몇 년 전인데 그걸 하나하나 다 계획했겠어요?’
[하긴…… 그렇겠지.]
그냥 주어진 재료들을 잘 다듬어 여러 상황에서 잘 버무려서 이용한 것뿐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으니……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영감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끄으으…… 아!”
어머니의 방을 나서며 기지개를 켰다.
오랫동안 책상 앞에서 펜이나 끄적거리는 통에 몸이 굳은 모양이었다.
“또 일이나 하러 가볼까.”
이렇게 머리가 아픈날에는 총독들이 보내온 문서에 시원하게 욕이나 해주는 게 최고였다.
[사람들은 그걸 보고 폭군이라고 부른다네.]
* * *
사르데냐와 로마공화국의 국경지대에선 연일 사르데냐 왕국군이 연일 강도 높은 군사훈련에 맞서 로마공화국군대도 사열식을 하며 맞불을 놓고 있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속령 중 하나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군 역시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계속해서 증파하고 있으니 국경지대의 긴장감은 나날이 올라만 갔다.
“마르코, 너 커피 진짜 못 탄다. 이딴 걸 어떻게 마시라고 줄 수 있냐?”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이 새끼야!”
“푸하하핫.”
뭐, 그건 어디까지나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지 밑에 있는 병사들은 슬그머니 국경을 넘나다니며 저들끼리 어울리고는 했다.
말도 통하는 데다 이탈리아라는 동질성을 가진 그들에게 전쟁은 멀고 새로운 친구는 가까웠으니 말이다.
“마르코, 네 여동생이 그렇게 이쁘다며?”
“사르데냐 촌놈한테는 소개 안 시켜줄 건데?”
“야! 내가 지난번에 어렵사리 장교용 버터 하나 빼돌려 줬잖아!”
“지난주에 내가 보급용 돼지고기 한 덩이 슬쩍해 온 건 잊었고?”
“아니!”
서로 형형색색의 각기 다른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에게서 군기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들 오랫동안 이어진 대치 기간 동안 자기네들 지휘관보다 적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을 더 많이 본 사이였다.
거기에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싸운다거나 다툰 적도 없고 그렇기에 원한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으니 다들 어렵지 않게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할 수는 없는 법.
“조만간 베르살리에리가 온다던데…….”
“우리는 붉은 셔츠단이 온대.”
다들 싸움이 격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한숨 쉬고 있을 때,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병사는 별생각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
“뭐가 그렇구나야. 너희는 뭐 안 온대?”
“폴란드 용병이 온다던대?”
“뭐?!”
“폴란드 놈들이 온다고!”
막상 다들 놀랐다는 듯이 반응했지만 부모님을 도와 시골에서 밭을 갈고 나귀나 끌던 이들의 머릿속에 있는 폴란드는 공포의 존재였다.
“폴란드 사람은 말을 그렇게 잘 탄다던데.”
“사람 죽이려고 태어난 족속들이잖아.”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고 다니면서 독일 사람들을 사냥하고 다닌다던데…….”
“그놈들이 타타르 아니야?”
이탈리아의 수많은 프란체스코와 마르코들의 머릿속의 폴란드인은 입에서 불을 뿜어내고 강철을 고기처럼 즐기는 족속들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런 괴물 같은 이들이 온다고 하니 병사들 사이에서도 스멀스멀 불안감이 꽃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그놈들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싸워? 아서라…… 그러다가 괜히 눈먼 총알에 죽지 말고 여차할 때 우리 쪽으로 쓱 넘어와.”
“지금 심란하니까 헛소리할 거면 돌아가.”
“섭섭하게 이럴 거야? 어차피 너희 쪽이나 우리 쪽이나 군복만 바꿔입으면 아무도 모르잖아.”
그렇게 다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근무를 마친 로마공화국의 병사가 들어왔다.
“다들 뭘 그리도 재미있게 떠들고 계시남?”
“아니 글쎄…… 폴란드 놈들이 온다잖아.”
“폴란드?”
“그래! 그 사람 잡아먹는다는 타타르 놈들 말이야!”
“으잉? 아니, 그놈들이 사람을 왜 잡아먹어?”
폴란드군단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로마공화국의 청년들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줬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아.”
“사람이 어떻게 입에서 불을 뿜어?”
“그런가?”
모닥불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청년들의 목소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 * *
베네치아 총독 막시밀리안의 요청으로 파견된 폴란드 원정군의 지휘관은 전 폴란드 군단의 지휘관이자 현재 폴란드군 사령관을 맡고 있는 헨리크 뎀빈스키였다.
폴란드에서 이 정도로 대규모 군대를 지휘해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이 그뿐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전하를 뵙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소.”
“폴란드인은 은혜를 잊지 않지요.”
“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말이로군요.”
이탈리아 총독이자 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의 가슴속에서 이런 듬직한 군대를 보내준 동생에 대한 고마움과 한숨 돌렸다는 안도감이 가득했다.
‘좋아…… 이제 형님께 괜한 소리 듣지는 않겠지.’
막시밀리안 대공은 괜히 사르데냐 왕국과 적극적으로 싸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형님께서 이탈리아의 일에 관심을 끊을 때까지 적당히 사르데냐 왕국과 싸우는 척만 할 생각뿐이었다.
이는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 상층부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고 로마 공화국과 사르데냐 왕국의 지휘부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다.
‘어차피 저놈들이랑 싸워봤자 좋을 게 없는데…….’
‘로마 놈들이나 오스트리아 앞잡이 놈들과 싸운다고 해서 쉽게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있는 병력만으로는 절대로 사르데냐 녀석들을 막을 수가 없어.’
이들의 생각이 일치함은 한 지붕 아래 살아가는 가족들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간지러운 부분을 살살 긁어주는 것과 같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르데냐와 로마, 그리고 롬바르디아-베네치아는 이탈리아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탈리아의 지식인들이 본다면 로마제국의 영광이 부활하여 이탈리아에 강림했다고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보다 더 높은 이들은 이탈리아인들의 화목함을 그리 좋아 하지 않았다.
“분명 로마공화국을 공격하라고 한 게 언제인데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는가.”
“폴란드군이 개입하여 현장에서도 어찌 대응할지를 의논하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오스트리아에서 폴란드군을 파견한 것인가?”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요.”
사르데냐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폴란드군이 개입했다는 소식에 반색했다.
그들이 전쟁에 끼어들었다는 것은 오스트리아가 이번 이탈리아 내부항쟁에 끼어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사르데냐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프랑스에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카보우르!”
“예, 폐하.”
“오스트리아 녀석들이 이탈리아의 일에 개입하려 하고 있다. 내 말이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도 지원군이 필요하지 않겠나?”
에마누엘레의 의미심장한 말에 카보우르는 비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쌕쌕거리며 숨을 들이켜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자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겠네, 그러니 가서 프랑스 황제의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게 만들게.”
“……예, 폐하.”
카보우르는 제 몸뚱이만큼이나 무거워진 마음을 뒤로하고는 에마누엘레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는 한편 로마공화국의 가리발디는 휘하의 붉은셔츠단과 함께 나폴리시 내를 행군하는 중이었다.
수많은 환영 인파 속에서도 가리발디와 붉은셔츠단은 질서를 잃지 않았다.
환호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줄 맞춰서 행진하는 병사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정예병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앞에서 이끄는 가리발디 역시 장군이란 이런 것임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반면에 그들을 따라오던 로마공화국의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시민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던가 주변을 둘러보느라고 정신없었다.
개중에 몇몇은 아예 자신이 군인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인지 아니면 축제 분위기에 젖은 것인지는 몰라도 자연스레 현지인들과 어울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목적지인 나폴리 궁전에 도착할 쯤에는 병력의 절반이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중간에 습격이라도 당한 건가?”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럼 병사들이 어딜간 건가?”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부관의 말에 가리발디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굳이 입 아프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흉포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대업을 위해 여기까지 왔네, 그런데 우리가 이탈리아인들에게 민폐를 끼쳐서야 되겠는가?”
“시, 시정하겠습니다.”
“한 놈도 빠짐없이 데려오게.”
“예, 각하!”
그리고 가리발디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을 때는 그나마 남아 있던 병사들도 붉은셔츠단을 제외하고 전부 사라진 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