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25화
“여기서 뭐하십니까?”
“으음…….”
“할아버지 가족인가 봐!”
옷깃에 에델바이스 자수가 새겨진 제복을 입은 꼬맹이들은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키득거리며 나와 영감님을 번갈아봤다.
아니, 저놈들은 영감님이 보이는 건가?
“이 애들은 뭡니까?”
“이 늙은이가 불쌍해 보여 말동무를 해주던 착한 아이들이라네.”
“흠…….”
슬쩍 입고 있는 옷을 훑어보니 잘 정돈된 제복과 책가방으로 보이는 가죽가방까지…… 어디로 보나 유복한 군인 집안의 아이들처럼 보였다.
“집에서 부모님이 기다릴 테니 이만 돌아가렴.”
“엄마 아빠는 일 나가셔서 돌아오려면 멀었어요!”
“맞아요! 아직 엄마 일이 안 끝났어요!”
“……?”
아무래도 내 짐작이 틀린 모양이다.
영감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것인지 아이들의 말에 놀란 표정을 보였다.
“흠…… 혹시 부모님이 두 분 다 군인이시니?”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믿고 그리 물었다.
하지만…….
“아뇨! 저희 어머니랑 여기 있는 마이바흐네 아주머니는 시외에 있는 무두공장에서 일하시고 아버지는 잘츠부르크에서 목수 일을 하셔요!”
“으음…….”
내 예측은 보기 좋게 전부 빗나갔다.
영감님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시고 몸을 들썩이시는 것을 보아하니 소리죽여 웃고 계신 모양이다.
“그래도 날이 늦었는데,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리 말하며 품에서 은화 두 개를 꺼내 아이들의 손에 하나씩 쥐어줬다.
“이건 할아버지를 잘 돌봐준 것에 대한 상이다.”
“와아…… 나 은화 처음 만져봐!”
“어, 엄마가 은화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높으신 분이라고 했는데……!”
아이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실수했네.’
모르는 아저씨가 수고했다면서 손에 몇만 원을 턱턱 쥐어줬으니 아이들이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이내 두 아이는 신이 나서는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아저씨! 아저씨! 뭐하는 사람이에요?!”
“어디 사세요? 아저씨 부자예요?”
아이들의 순수한 질문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교관님이 모르는 사람이 돈 주는 건 받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아저씨가 누군지 알아야 돼요!”
“허.”
옆에서 소리죽여 웃으시던 영감님은 어느샌가 감정을 다 추스른 것인지 근엄한 표정으로 말씀하시길.
“이보시게 젊은이, 저 아이들이 곤란해하고 있으니 신사의 도리를 다하게나.”
“허, 참…….”
영감님의 말은 대충 아이들의 장단에 맞춰주며 잘 돌려보내라는 뜻이었다.
귀찮은 일을 내게 떠넘기는 영감님을 노려봤다.
‘나중에 두고 봅시다 영감님.’
‘하나도 무섭지 않구나.’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애들에게 대충 군것질거리나 쥐여주고 돌려보내려 헨리를 찾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같이 있어야 할 호위병도 보이질 않았다.
“어허…… 분명 여기 있어야 하거늘…….”
“아저씨도 길 잃어버리셨어요?”
“히히히, 그럼 아저씨고 고아네요!”
“…….”
내 본질을 꿰뚫어 본 아이의 심미안이 감탄스러워 말문이 턱 막힌 찰나.
“마이바흐, 고아가 아니라 미아야.”
“마이바흐?”
제법 익숙한 이름이 귀에 들렸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아! 너희들 혹시 에델바이스 유겐…… 에델바이스 유, 유…….”
유겐트라고 말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창피한 기분이 들어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에델바이스 유겐트요?”
“……그래 그거.”
“네! 맞아요!”
이름을 들으니 괜히 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질간질하며 베베 꼬였다.
“쓰읍…… 그래, 그…… 그건 재밌니?”
“네! 재밌어요!”
“친구도 많고, 교관님도 좋아요!”
“그렇구나.”
하긴 거기 드는 돈이 얼마인데 재미가 없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거길 담당하는 게…… 바흐였던가? 아냐 그 친구는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고 사양했었지…… 그럼 슈머링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가 가만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를 지켜보시던 영감님께서 헛기침을 하시며 나를 부르셨다.
“크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애들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았던?”
“들었지? 이만 돌아들 가라.”
“그치만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돈은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한 아이가 몸을 베베 꼬면서 곤란하다는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하긴 대뜸 자식이 바깥에서 돈을 들고 오면 부모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나는 웃으며 품속에서 다시금 은화 한 장을 꺼내 앞면을 보여줬다.
“여기 새겨진 사람이 보이느냐?”
“네!”
“이게 누구일 것 같으냐?”
“황제폐하요!”
“위대하신 황제페하요!”
“…….”
생각보다 격한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지만 그와 동시에 입꼬리도 올라갔다.
“그래…… 그렇지.”
들고 있던 동전을 손가락을 하늘 높이 튕겨 올리자 은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내 얼굴로 향했다.
“그럼 이제 내가 누군지는 알겠지?”
“……?”
“화, 황제…….”
조금 큰 아이가 놀라서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헨리도 호위병력도 없는 상황에서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딱 질색이었기에 아이의 입을 막았다.
“자! 거기까지, 새나라의 착한 어린이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그렇게 아이들을 인파 속으로 돌려보내고 조용히 영감님의 옆자리에 앉았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너무 늦게 오신 거 아닙니까.”
“허, 누가 누구보고 할 말인지 모르겠군.”
“자기 뜻대로 못한다고 가출하는 걸 보면 딱 견적이 나오지 않습니까?”
“지금 말 다 했나?!”
“아뇨!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네요!”
분명 영감님을 보면 사과하고 잘 달래서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또 조금 전의 일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말이 험해졌다.
“자네는 예전부터 그랬지. 다른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저 잘난 맛에 이리저리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제가 또 언제 그랬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그리고 제가 말을 험하게 하는 것도 다른 이들이 저를 그렇게 만들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또 다른 이들을 핑계 삼아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 드는군. 자네는 이런 것이 문제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은가!”
“아잇 씻X! 욕먹을 만한 녀석들에게 시원하게 한마디 하는 게 왜 문제란 말입니까? 황제가 돼서 그 정도도 못해요!?”
“자네는 매사에 쓸데없이 감정적이네, 이번에 프로이센과 관련된 일도 평화롭게 잘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괜히 전쟁으로 끌고 갔잖은가!”
“어차피 프로이센 놈들과는 전쟁으로 해결을 봐야 한다니까요! 지금 우리 군의 전력이 한창 끌어 올랐고 경제도 잘 받쳐주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프로이센 놈들을 무릎 꿇리겠습니까!”
영감님과의 말다툼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중간에 어느 한쪽이 굽히고 들어올 법도 했지만 나나 영감님이나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이 지루한 말다툼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 다 떠나서 자네 말이 맞다고 쳐보지!”
“이제야 영감님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거참 뭐 이리 고집을 부리셔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시는 겁니까?”
“자네 말이 맞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가정하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잖나!”
이런 식으로 답도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듯 둘 사이의 대화 역시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서로 지쳐 버린 것인지 아니면 더는 할 말이 없었던 것인지 뚝 하고 끊겼다.
“…….”
“크흠…….”
어느샌가 인적이 뜸해진 빈의 어느 이름 모를 공원 벤치에 앉아 어두컴컴한 거리를 바라봤다.
“길이 어두우니 사람들이 어디 무서워서 밤에 나돌아다니려고 하겠습니까?”
“가로등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군.”
“기왕 설치하는 김에 다른 도시에도 의무적으로 일정 간격으로 가로등을 설치하게 해야겠네요.”
머리 좀 식히겠다고 밖에 나와서까지 이런 것을 생각하는 내 모습이 우스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무엇이 그리도 재밌는가.”
“바람 좀 쐬겠다고 나와서까지 일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재밌지 않습니까?”
“원래 한 국가를 통치하는 이들은 언제나 만족할 수 없는 법이지.”
“……언제는 일만 한다고 뭐라 하셨잖습니까.”
영감님은 내 물음에 웃음을 보이셨다.
“자네는 앞만 바라보며 무작정 달려나가니 이를 문제 삼은 것이네, 모름지기 군주는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앉아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중요하지.”
영감님은 그리 말씀하시고는 밤하늘을 올려봤다.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야…… 그렇지 않은가?”
“밤이 다 똑같은 밤이지요. 언제는 아름답고 그러지 않은 것도 있습니까?”
“허허, 본인도 그리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빈의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서울에서는 별 중에서 제일 반짝인다던 북극성을 구경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말이다.
매번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하늘과 그 아래에서 형형색색으로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는 했다.
어떤 날은 X같은 민원인들 때문에, 또 어떤 날은 개X같은 민원인들 때문에…… 또 다른 날은 개X지X같은 민원인들 때문에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8평 남짓한 원룸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이 세상에는 나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는 밤늦게 잠에 들고는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과연 이런 생활 패턴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 그럼 그때 죽은 건가?’
이제야 뭔가 좀 이해가 됐다.
하긴 매일같이 추가 근무에 야근, 거기에 밤늦게까지 술이나 퍼먹으며 잠은 자는 둥 마는 둥 했으니 몸이 버텨낼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
“그때는 내 밑에 있는 이들이 나보다 못나 보이고 실제로 일도 잘 안 풀리던 시절이었지.”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할 나이에 대뜸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으니 그럴 수도 있죠.”
혁명으로 나라가 뒤집힌 상황에서 원치 않는 제위에 올라 혼란을 수습해야 했으니 어린 나이에 그걸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영감님은 내 말에 고개를 저으셨다.
“나이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네, 어찌 되었건 본인은 결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망설였고 다른 이들의 적절한 조언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밀어붙였지.”
영감님은 밤하늘을 올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당시에는 내 밑에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면 제국에는 언제나 인재가 넘쳐났고 다들 이 못난 놈을 돕겠다며 나섰지.”
“그렇습니까?”
“그럼. 회첸도르프 그 친구도 지휘는 조금 부족했지만 책상 위에서 지도를 보며 작전 짜는 것은 기가 막혔고 안드라시는 틱틱거리면서도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엉망이 된 외교관계를 정상화시켰지.”
이후 영감님의 입에서 몇몇 사람이 더 언급됐지만 그게 누군지 몰랐기에 그냥 조용히 있었다.
“……저 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이들이 나를 위해, 또 제국을 위해 힘을 썼지만 결국 나는 실패했네.”
“그래도 영감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제국이 멀쩡하다고 했잖아요.”
“내가 죽기 전까지 망하지만 않은 것이지 오래가지 못해서 그대로 주저앉았을 것이야.”
“그걸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영감님은 나를 바라보시며 씨익 웃으셨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드는군.”
“에이…… 그게 뭐예요.”
“날이 춥군. 이렇게 있다가는 몸에 안 좋네.”
영감님은 그리 말씀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좋군.”
영감님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분 좋다는 듯이 허허 웃으셨다.
그 모습에 나도 웃음이 절로 났다.
“그런데 조금 전에 그 꼬마들은 뭡니까?”
“무슨 말인가?”
“아니, 영감님이 보였잖아요.”
“허…… 생각해 보니 그렇군. 아이들이 간혹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본다고들 하던데, 그 말이 진짜인 모양이야.”
영감님은 그리 말씀하시고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시며 내게 말했다.
“이만 돌아가세 슬슬 야참 먹을 시간이네.”
“예? 아니, 허참…….”
영감님은 그리 말씀하시며 궁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늦으면 자네 몫은 없네.”
“어차피 드시지도 못하는 분이 무슨…… 같이 가요!”
* * *
빈에서 두 황제가 기적적으로 화해에 성공하던 때.
이탈리아에서는 현 상황을 타개하고자 모인 삼국협상이 불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