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26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가?
누군가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명예를 외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돈을 말할 것이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는 인생에 하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사랑 같은 소릴 할 수도 있지.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겐가.]
“공교롭게도 저는 셋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한 것이지만 자네는 입만 열면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군.]
“흔히들 말하기를 사람의 감정을 조종한다는 것이지요.”
사람의 목숨부터 감정까지 조종할 수 있는 내게도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이 새끼들은 좀 적당히 하고 그만두라니까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이러는 건지 원…….”
[이탈리아의 일을 말하는 겐가?]
“예.”
프랑스군이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부올이 파리에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성공적으로 나폴레옹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는 게 분명했다.
그럼 이탈리아 쪽에서도 뭔가 성과를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막시밀리안 이놈은 내가 폴란드군대 끌어다 쓰는 것도 눈감아줬는데 왜 이리 힘을 못 쓰는 거야.”
둘째 놈이 어렵사리 셋째에게 군대를 빌려 현상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이탈리아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아니, 애초에 서로 싸울 마음이 없는데 외국에서 용병을 데려온다고 한들 달라질 것이 없잖은가.
[원래 그쪽 사람들이 평화를 사랑하잖나.]
“누가 들으면 제가 전쟁을 부추기는 악당인 줄 알겠군요.”
[맞잖은가.]
“아니거든요.”
나라고 저기 북쪽에 있는 북괴…… 아니, 프로이센 놈들처럼 전쟁이 좋아서 눈이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기왕 로마 놈들이 칼을 뽑았으면 양시칠리아라도 확실하게 정리하라고 이렇게 힘을 실어준 것인데, 정작 상을 다 차려놓으니 로마 놈들이 주춤거리며 수저도 뜨지 않고 도망가려는 것이 아닌가?
“그냥 눈 딱 감고 시칠리아만 밀어버리면 되는 건데 왜 그걸 안 하겠다는 건지 원…….”
참으로 갑갑했다.
* * *
“배가 없습니다.”
“한 척도 없는 건가?”
“예, 전부 저쪽에서 끌고 가 버렸습니다.”
“……지난번처럼 공화국과 오스트리아의 함선을 총동원하면 되잖은가.”
“배 주인들이 삯을 세 배로 올려 버리는 바람에 총독도 앓는 소리를 내고 있더군요.”
베네치아 상인은 그 명성에 걸맞게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았고, 이는 가리발디의 얼굴을 그가 두른 붉은 망토보다도 더 붉게 만들었다.
비록 신대륙의 발견과 대영제국의 부상, 나폴레옹 전쟁 등의 영향으로 베네치아의 상업이 몰락하긴 했지만 상인들의 노하우까지 모조리 실전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자신들만의 가치를 매겼다.
다만 그들은 선조로부터 한 가지를 배우지 못했다.
“이 망할 상인 새끼들을 전부 잡아들이고 배를 압수해 와! 당장!”
힘이 없으면 알아서 기어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상식을 알지 못했다.
그에 대한 수업료는 참으로 비쌌다.
“이 새끼들 전부 잡아들여!”
“오…… 이거 금인가?”
“배에 뭐 이렇게 식량이 많이 실려 있다냐?”
“전부 팔아치우려고 했나 본데?”
“오늘 저녁은 배불리 먹겠네.”
다들 피 튀기는 전쟁터에서 적당히 털어먹어 한몫 단단히 챙겨보려 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털릴 줄은 상상도 못한 듯했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고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듯 베네치아의 상인들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해보게.”
“……아직 배를 빼앗기지 않은 상인들이 자신들이 보유한 상선들을 모조리 자침시켜 버렸습니다.”
“허허…… 이래서 돈 세는 놈들과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자신들이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남 좋은 일을 시키지 않겠다는 선조의 유훈을 충실하게 따랐다.
물론 돌아오는 것은 분노한 가리발디와 붉은셔츠단을 몽둥이찜질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자존심은 지키지 않았던가?
“쯧…… 오스트리아 함대는 어찌한다던가.”
“그들도 프랑스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라 마음 편히 움직일 상황은 아닌 듯합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양시칠리아의 도움 요청을 받은 프랑스 황제가 함대를 보내 그들을 도와주고자 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렇기에 오스트리아의 함대도 프랑스와의 마찰을 우려해서 몸을 사리는 것이겠지.
“쓰읍…… 딱 한 번만 건너면 되거늘…….”
가리발디는 저 멀리 보이는 시칠리아섬을 바라보며 통일된 이탈리아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멀고 험하다는 것과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이것을 이뤄내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집정관의 방법이 옳았군.’
주세페 마치니는 이탈리아 공화국의 완성을 위해 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리겠다고 했다.
이전의 자신은 모두가 평등한 공화국을 위해 모든 이의 위에 서 있는 제국을 끌어들이겠다는 그의 말을 비웃었지만 지금은 그를 비웃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자신이 이곳까지 진군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은 로마도 사르데냐도 아닌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개 총독령의 힘이었잖은가.
“후우…….”
괜스레 머리가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그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적과 싸워서 깨부수며 나아가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정치라는 것도 고려해야 했다.
“예전이 그립구먼.”
기분 좋은 햇볕과 따스하면서도 쾌적한 지중해성 기후가 만들어낸 산들바람에 몸을 맡긴 가리발디는 그대로 모래사장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년 전 소속된 국가도 민족도 모두 달랐던 이들과 함께했던 어떤 전투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집정관인 주세페 마치니의 권유로 움직인 것이지만 그는 그곳에서 노장의 노련함과 나라 잃은 이들의 절박함과 처절함, 그리고 강대국의 힘을 목도했다.
어느 것 하나 그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경험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고 보니 북쪽에 폴란드군이 왔다고 했지.’
어차피 이곳에 죽치고 있는다고 해서 바닷속에 수장된 배가 다시금 솟아오를 일은 없었다.
어차피 저쪽에서도 바다를 건너올 병력이 없을 테고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가리발디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는 자신의 뒤편에서 부동자세를 유지하던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제 나폴리는 질렸으니 이만 돌아갈까?”
그의 말에 병사들도 미소를 띠며 우렁찬 목소리로 호응했다.
* * *
오스트리아의 제국의 유일이자 유럽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는 공식적인 사회주의 정당인 범유럽 사회주의 제국 노동자당의 당수 코슈트 러요시는 얼마 전에 통과된 사회보장법과 노동법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자신의 지지계층을 결집시켰다.
“황제 폐하께서는 언제나 그대들과 함께하시며 그에 대한 증거로 제국의 여러 인민들에게 불의에 저항할 권리를 주셨소이다!”
“와아아-!”
“근데 불의에 저항할 권리가 뭐야?”
“난들 알겠어? 그냥 적당히 맞장구쳐주는 거지…… 일단 재밌잖아?”
“그건 그래.”
코슈트는 열심히 노동자들의 권리와 황제를 설득한 자신의 업적을 설명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 했으나 애초에 법과 거리가 있는 노동자들은 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지도자 동지, 아무래도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소만.”
“그런 모양이군요.”
“허허, 자본가들에 맞설 칼자루를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아갈 길이 멀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코슈트는 저 멀리 영국에서 날아온 프랑스 출신 동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두들겨주며 그를 위로했다.
“어찌 되었건 시작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황제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곧 사람을 쥐어짜 내는 이 사회질서도 바뀔 것이네.”
“그걸 내가 죽기 전에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허허, 자네가 죽으면 또 다른 이들이 뒤를 이어받지 않겠나? 세상에 자본가와 노동자가 존재하는 한은 우리의 뜻은 꺾이지 않을 것이네.”
그의 말에 동지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아, 이렇게나 사회정의를 위해 힘쓰시는 코슈트 동지의 모습을 보니 걱정에 잠겨 있던 제가 다 부끄러워지는군요.”
“그럼 자신을 다시금 채찍질하라는 의미에서 나를 대신하여 여기 모인 노동자들에게 이 전단지를 나눠주겠는가 루이 동지?”
“하하, 맡겨만 주시지요!”
코슈트는 전단지를 들고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동지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담뱃불을 붙였다.
‘도대체 저놈들은 무엇을 믿고 저렇게까지 열심히란 말인가.’
코슈트 본인도 헝가리 독립을 위해 분연히 들고일어난 혁명가이지만 어떠한 사상을 위해 저리 열심히 움직이는 혁명가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자신이 사회주의자를 연기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몰락하기 전에 마지막 끈을 붙잡은 것에 불과하지 않던가.
‘지금은 잘 풀렸지만…… 앞으로도 잘 풀리리라는 보장도 없는 법이지.’
그렇기에 마음에 들지 않지만 황제의 사냥개를 자처하며 그를 대신해 자본가들을 물어뜯고 있잖은가.
왜 지난번에 통과한 노동법만 해도 그렇다.
겉으로는 노동자들의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며 그들에게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지만 고작해야 글 읽는 법이나 깨우친 무지렁이들이 그게 무슨 뜻인지 어찌 알겠는가?
‘결국엔 내가 일선에서 자본가 놈들이 헛짓거리 하지 못하게 견제하라는 게 아닌가?’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자본가도 늘어났고 그들이 정치에 끼치는 영향도 점점 늘어났다.
아무리 제국에 신분제가 있다지만 결국 돈이 없으면 아무리 고매하신 귀족이라도 비웃음당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의회에서 한자리 하는 이들도 자본가들의 지원을 받거나 본인들이 직접 당선된 경우가 적잖으니 황제도 살짝 불편함을 느낀 것이겠지.
‘그러던 중에 황제 놈의 눈에 내가 든 것이지.’
어떻게든 정계에 복귀하려고 발버둥 치는 자신과 자본가를 조련하려는 황제.
둘의 이해관계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황제는 내가 진심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자신에게 일을 맡겼다.
‘여러모로 짜증 나는 애새끼야.’
덕분에 그는 유럽 유일의 공인된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자이자 황제의 사냥개가 되었다.
“코슈트 동지, 전부 나눠주고 왔소이다!”
“수고하셨소 블랑 동지. 다음은 빈 외곽의 무두공장 단지의 여성동지들을 만나기로 했소.”
“앞장서시지요!”
헝가리를 위해서 뭐든 하겠다고는 했지만 그게 황제의 사냥개 노릇까지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혁명가이기 전에 정치인이다.
“후우…….”
코슈트는 마지막으로 담배를 한 모금 하고는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꽁초를 바닥에 떨궜다.
“춥구먼.”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봄바람이 제법 쌀쌀하여 사람들이 감기에 걸린다고들 합니다.”
“흠…… 그럼 무두공장의 여인들은 차가운 물과 약품을 만지작거리니 몸이 차겠군요.”
“그럼 따뜻한 차를 준비하는 게 좋겠군요.”
“기왕이면 간단한 요깃거리도 좋겠지요.”
코슈트는 제법 눈치가 있는 자신의 동지를 마음에 들어 했다.
다른 이들은 그저 젊은 혈기에 노동운동이니 사회주의에 뛰어들거나 머리에 먹물이 가득 들어차서 다루기가 껄끄러웠는데, 그의 프랑스 동지는 혈기가 넘치지도 너무 꽉 막히지도 않아 마음에 쏙 들었다.
오히려 사상적인 부분에서는 겉 무늬만 사회주의 혁명가인 자신보다도 훨씬 뛰어났으니 이따금씩 대답이 곤란한 상황에서는 크게 도움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코슈트 동지.”
“그게 무엇인지요 블랑 동지?”
“전단지를 인쇄하느라 활동비를 다 써버린 탓에 차와 요깃거리를 준비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아직 제법 남아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흠흠…… 이번에 빈의 노동자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준다기에 준비하다 보니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
다만 여느 혁명가들이 그러하듯 경제 관념이 조금 모자라는 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