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27화
세찬 혁명의 바람이 유럽인들의 마음속을 한바탕 뒤집어놨을 때, 그 한가운데 폴란드 군단이 있었다.
조국을 잃고 끝이 보이지 않는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그들은 자신들처럼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을 도왔다.
그들이 그리 행동하는 이유는 무척 단순했다.
“나폴레옹이 떠난 후로 우린 언제나 혼자였다. 사방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누구도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고 손을 잡아주지도 않았지.”
그들은 조국을 되찾겠다는 열망하에 들고일어난 동지들이 압제자들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유럽 전역을 방랑하며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도왔다.
비록 그것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고 오히려 쓸데없이 피를 흘리는 일임에도 폴란드군단은 다른 이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이 폴란드군단의 구호였고 이는 분할 이후 수십 년 만에 독립한 폴란드군으로 이어졌다.
수십 년 전 아무것도 모르는 치기 어린 젊은 시절 고향에서 도망쳤던 청년들은 이젠 머리가 새하얗게 세고 배는 불룩 나온 할아버지가 되었으나 폴란드의 청년들이 그들의 뜻을 이어받았다.
용맹한 폴란드의 청년들은 그들의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이탈리아의 자유를 위해 한 목숨을 불태울 것을 결의했다.
출정식 당일에는 다들 이탈리아가 하나로 합쳐지거나 죽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이탈리아로 왔는데…….
“마르코, 네 커피는 몇 번을 먹어도 매번 똑같이 맛 없을 수가 있냐? 너 진짜 커피 못 탄다.”
“씨…… 그럼 왜 매번 나보고 끓이라고 해! 앞으로는 너희들이 끓여 먹어!”
“알프레도, 너도 지난번에 파스타 하겠다고 설치다가 홀라당 태워 먹지 않았냐? 내가 그때 너 때문에 우리 쪽 소위 병조림 빼돌리다가 걸려서 등짝이 아주 걸레짝이 됐잖아.”
“허허, 그건 다른 놈들은 전부 잽싸게 도망쳤는데 너 혼자 뒤뚱거리다가 늦은 거잖아 멍청아.”
그들이 만난 로마공화국의 군대…… 아니, 이탈리아인들은 참으로 태평하기만 했다.
“그런데 저 친구는 누구야?”
“오…… 네 동생이냐?”
“하나도 안 닮았는데?”
“시끄러 새끼들아! 여기 있는 이 친구로 말하자면 저어기 동쪽에 폴란드에서 온…… 어…… 이름이?”
어느 날 부대에서 조금 안면을 익힌 한 로마 병사에게 초대되어 야밤에 어느 모닥불 앞으로 끌려온 폴란드군의 로만스키는 자신의 앞에 있는 병사들을 보고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는 그들의 적인 사르데냐 군복을 입은 병사들과 오스트리아 총독령, 그리고 로마 병사들이 줄지어 앉아서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얀 폴란스키인데…… 여기는……?”
“아, 여기? 그냥 이리저리 놀기좋아하는 놈들이 모여서 쉬는 곳이지.”
“……?”
* * *
“나폴리에서 군대를 물리시지요.”
“그럴 수는 없겠군요.”
“지금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저희는 언제나 평화를 사랑하지만…… 싸움을 걸어온다면 도망치진 않을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가서 깃펜이나 잘 준비해놓으시지요. 조만간 항복문서에 서명하셔야 할 테니까요!”
사르데냐와 로마 공화국 간의 회담은 좀처럼 합의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남부 이탈리아를 손에 넣었으니 이를 어떻게든 유지하고 싶어 했지만 사르데냐가 반대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만약 로마공화국이 남부까지 석권한다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개입으로 유지되던 이탈리아의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균형이 무너진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전쟁뿐이었다.
두 국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고대 로마제국 이래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로마 공화국은 로마의 후예를 자처하며 나라 이름을 로마로 짓고 공화국을 통치자의 호칭을 집정관이라고 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인민에게 권력을 나눠주자는 주세페 마치니와 모든 권력을 국왕에게로를 외치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국왕은 서로 대화도 안 통할 정도였다.
“각하, 오스트리아 쪽은 이른 시일 내에 우리와 저쪽과 원만한 협의를 바라는 눈치입니다.”
“……그쪽 지원이 끊기면 어찌 되겠는가.”
그의 말은 많은 뜻을 포함했다.
여차하면 로마공화국을 살려준 오스트리아와도 척을 질 수 있다는 뜻과 그들의 지원 없이 공화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것.
보좌관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상당히 힘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미 경제는 저쪽과 한 몸이 된 지 오래이고 국방에 관해서도 국내에는 총기를 생산하는 공장이 없어 저쪽에서 전량 수입해 와야 하는 형국입니다.”
“생각했던 것을 뛰어넘는구먼.”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일개 총독령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정도입니다.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라면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보고를 올리지 않는다는 것뿐이겠지요.”
“그리되었군…….”
마치니는 어느덧 주름이 하나둘씩 보이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이탈리아 반도라는 물리적 공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하나 된 공동체로 모두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국가를 만들겠다던 꿈을 꿨던 청년은 이젠 반 백 살의 중년이 되었다.
흘러간 세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새로운 것을 배웠다.
때로는 평생 얼굴도 마주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증오하던 이에게 머리를 숙이기도 했고 과격한 발언으로 동지들과 등을 돌리기도 했다.
하지만 마치니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선택은 내가 했지.”
“각하?”
오늘날의 로마공화국이 오스트리아 2중대가 된 것 역시 자신의 선택이었다.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오스트리아 황제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지금의 공화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참을 수 없는 일이지.”
“예?”
왕이니 황제니 단순히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것은 옳지 못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황제를 위해 왜 이탈리아인이 피와 땀을 흘려야만 하는가?
왜 이탈리아의 거주민들은 언제나 가난하고 굶주려야 하는가?
왜 이탈리아는 강대국의 노리개가 되어야 하는가?
젊을 적의 마치니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탈리아 통일과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대의에 몸을 던진 것이다.
지금이라고 그 뜻을 접은 것은 아니다.
단지 방향성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그는 총과 폭탄 대신 펜을 들었다.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 그리고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거창한 뜻을 이루려던 독기에 찬 청년은 어느덧 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중년의 정치인이 됐다.
“자네가 황제를 설득해 주게.”
“시간을 더 달라고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사르데냐와의 마찰은 피할 수 없으니 기왕 이렇게 된 것 최대한 피해를 줄이면서도 저들의 콧대를 꺾어놔야겠어.”
“……너그러우신 황제 폐하께서는 한 달 정도는 시간을 더 주실 겁니다.”
“남쪽의 가리발디와 주력이 돌아오고 폴란드군단에 합류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지.”
마치니는 자신의 꿈을 되돌아봤다.
젊었을 적과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그가 꿈꾸는 미래에 오스트리아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조금 오만하고 불편한 이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두에게 외면받는 로마공화국의 유일한 친구였다.
* * *
빈의 어느 후미진 술집.
중년의 남성이 젊은이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돈이 더 필요하다고? 내가 기억하기론 한 달 전쯤에 헨리에게 지원금을 받아갔잖은가.”
“폐하, 그것이…….”
“여기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네.”
“……당을 운영하며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이리저리 도움을 줘야 할 이들이 많아서 그들을 모두 돕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일을 했는가.”
“돈이 없어 부서진 집을 고치지 못하는 이들에게 목수를 붙여줬고 거리에서 굶주려 구걸하는 사람들에게는 당분간 지낼 곳을 마련해 줬습니다.”
“흠…….”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쏟아붓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 모든 것이 인지도를 쌓기 위함이라 생각하니 이해가 되긴 했다.
“이틀 후에 여기서 헨리에게 받아가게.”
“감사합니다 폐…… 빅토르 동지.”
“빅토르 동지? 허, 재밌는 이름이구먼.”
제국의 황제가 사회주의자에게 동지 소리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애초에 코슈트 이놈도 가짜이니 상관없지.’
가짜이긴 해도 유럽 유일의 사회주의 정당 지도자와 황제의 밀회라.
참으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닌가?
또 이런 날에 술이 빠질 수도 없지.
“자, 코슈트 동지 한잔하시지요!”
“무, 물론입니다 빅토르 동지…….”
퀴퀴하면서 찌르르한 냄새를 풍기는 맥주잔을 높이 들고는 코슈트와 잔을 부딪혔다.
“이렇게 좋은 날에 번번이 일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네만…… 지난번에 그 일은 어찌 되었는가?”
“……빅토르 동지와 함께한 것이 많아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렇군! 그럼 이리 말하지.”
이상한 냄새가 났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했다.
“공단의 노동자들을 모아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은 어찌 되었는가?”
“계획대로 진행 중입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진행되었지?”
“……노동자들이 조합을 꺼려 하며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괜한 짓으로 피해가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구체적으로 얼마.”
“공단에서 근무하는 노동자 중에 5~6% 정도를 끌어들인 것 같습니다.”
“허허허허…….”
코슈트와 그의 동지들에게 수백만 굴덴을 쏟아부었지만 그들은 노동조합을 만들라는 내 뜻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이 코슈트가 무능해서라거나 사회주의자들이 열정이 없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폐, 폐하 소인도 억울합니다. 전단지를 나눠줘도 읽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인지라 결국 일일이 만나서 설득해야 하는데, 이는 무척이나 비효율적인 방법이잖습니까.”
“그렇지.”
“그리하여 광장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일장연설을 하려 해도 자본가들이 경찰을 불러 방해하는 탓에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거참 큰일이로군.”
이렇게 온갖 악재가 끼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규모를 불린 코슈트는 상당히 유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긴…… 지난번에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란에서도 폴란드 군단을 끌어들이고 괴르게이를 기용한 게 코슈트였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내가 일을 맡긴 것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코슈트는 위로 올라가려는 상승욕구와 자신의 민족인 헝가리를 위한다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으니 불안요소도 적었다.
[결국엔 시간이 해결해 주겠군.]
‘시간을 조정하는 게 제 역할이지요.’
결국 문제는 문해율이다.
도시의 상황도 이럴진대 시골은 어떻겠는가.
참으로 골치 아팠다.
“쓰읍…….”
“…….”
착잡한 마음을 달래고자 씁쓸한 얼굴로 맥주잔이나 홀짝이고 있으니 내 옆에 앉은 코슈트가 내 눈치를 살피며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그렇게 불편한 시간이 조금 이어지다가 주점의 문이 열리며 말쑥한 차림의 중년인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코슈트를 찾았다.
“코슈트 동지! 여기 있었구먼!”
“블랑 동지? 아니 여긴 어떻게…….”
“하하, 동지들이 말하기를 자네가 후원자를 만나러 갔다고 하기에 나도 그분의 얼굴을 보러 왔지!”
코슈트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나와 자신의 동지를 번갈아 봤다.
“허, 참으로 잘하는 짓이로군.”
“폐…… 빅토르 동지, 이것은…….”
“아니 되었네, 굳이 변명은 필요 없네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것이지.”
몸을 빙글 돌려서는 코슈트의 동지와 눈을 마주쳤다.
“반갑네 블랑 동지, 나는 여기 있는 코슈트 동지와 오랫동안 함께 일한 블라디미르 빅토르라고 하네.”
“오오…… 빅토르 동지!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