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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129화 (129/129)

망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29화

아름다운 도시 파리.

그곳에 사는 이들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길거리에는 온갖 오물과 쓰레기가 넘쳐났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뿐.

그나마 사람이 많이 다닌다는 대로가 이럴진대 신조차 내려다보지 않는다는 파리 슬럼가의 사정은 굳이 입 아프게 말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고약한 냄새…….”

“조금만 참으시지요.”

“쯧…… 그래야지.”

그런 곳에 부올 백작과 안드라시 줄러가 있었다.

“이쯤이면 되겠군요.”

안드라시는 뒤따라오는 이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한숨 돌리며 부올에게 물었다.

“쓰읍…… 요새 프랑스 놈들도 마음이 점점 급해지는 모양입니다.”

“그러게나 말일세, 이젠 조용히 대화를 나눌 곳이 마땅치 않아 결국 이런 곳까지 오게 될 줄이야.”

안드라시는 골목에서 조용히 걸어 나오는 호위병들과 눈을 한 번씩 마주치고는 궐련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쓰읍…… 후우…… 이쯤 되면 저쪽에서도 전쟁을 꺼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난 전쟁에서 적잖은 돈을 써야 했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지.”

나폴레옹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올도 얼추 눈치채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전쟁을 원했다면 자신이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 해도 진즉에 프랑스군이 움직였을 테니 말이다.

“본국에서는 이렇다 할 명령 없이 무조건 시간만 더 끌라 하니 아주 죽을 맛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거긴 거기대로 바쁠 걸세.”

“그건 또 그렇겠군요.”

안드라시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더러운 곳에 있으니 괜스레 온몸이 가려운 듯한 기분에 그리한 것이다.

“쯧…… 다음에는 이런 곳 말고 어디 한적한 살롱을 통째로 빌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만한 돈은 있고?”

“아직 활동비는 충분하잖습니까.”

“안 돼. 그걸 다 쓰면 폐하께서 나를 뭘로 보시겠는가? 이런 때일수록 아끼고 아껴서 활동비를 남겨가야 점수를 따는 걸세.”

“아, 예…….”

안드라시는 아주 질렸다는 얼굴로 부올을 바라봤지만 정작 당사자는 엄한 얼굴로 그를 훈계했다.

“폐하께서 자네를 특별히 기용한 만큼 나 또한 자네의 출신 성분을 크게 따지지 않고 일을 하려 하네, 그러니 자네도 내 뜻에 따라줬으면 좋겠군.”

“예, 명심하지요.”

정작 듣는 이는 매번 똑같은 말만 듣다 보니 질려 버렸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난번에 말씀하신 이탈리아 조약 건을 정말 폐하께 보고드릴 겁니까?”

“아니, 그렇게 하지 않을 걸세.”

“프랑스 놈들은 정말로 밀어붙일 것처럼 보이던데, 만약 저쪽에서 폐하께 이 사실을 먼저 아뢰면 큰일 날 것 같은데…….”

“그럼 저놈들은 제 꾀에 넘어가는 셈이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요.”

부올은 그의 질문에도 아무 대답 없이 조용히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만. 슬슬 돌아가세.”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올은 여유롭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굳이 입 아프게 대답까지 해줘야 하나?”

퉁명스레 대답하고는 저 혼자 가버렸다.

졸지에 깜깜한 어둠 속에 남게 된 안드라시는 황당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갔다.

* * *

전제군주의 삶은 무척 피곤하다.

황제에게 권력이 쏠리면 쏠릴수록 그에 비례하여 일거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예를 들어 여기 있는 이 보고서를 보자.

내용은 대충 빈으로 몰려드는 독일계 이민자들 때문에 시외곽 거주단지의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이니 새로운 하수도관을 설치하겠다는 내용이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동안 열심히 빨간펜을 놀려서 관리들을 갈구다 보니 다들 보고서 정도는 사람처럼 만들어왔으니까.

하지만 내용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가 생겼다.

“……입찰받은 회사의 사장과 입안자의 성이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건가?”

“음? 하하하…… 콘라드 경이 믿을 수 있는 친척에게 일을 맡긴 모양이로군요.”

내 옆에서 함께 갈려 나가는 슈메를링이나 라이너 대공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이 내게 묻는다.

보통 이런 식이다.

아는 사람이 자기 아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겠다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는 그런 것 말이다.

귀족…… 그러니까 보통 상류층에서 자주 보이는 이런 모습은 아랫것들은 돈이라면 환장하고 남 등쳐먹기를 업으로 삼는 놈들이니 믿을 수 있는 같은 상류층에게 일을 맡긴다라는 생각의 일환이다.

“다른 말로는 사다리 걷어차기라고도 하지.”

“사다리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폐하?”

내가 예전에 한창 지랄 맞은 팀장 밑에서 개같이 굴려질 때 매번 당하던 게 하나 있었다.

“슈메를링.”

“예, 폐하!”

“잠깐 오게.”

그리고는 그대로 보고서를 하늘로 흩뿌렸다.

“공무원이 사업을 배정할 때 감정이 들어가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가족이라 믿을 만하다고? 그럼 둘이 입을 맞춰서 중간에 돈을 빼돌릴 수도 있잖은가.”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내일 내 책상 위에 다시 올리게.”

손을 휘휘 저으며 가보라고 신호를 보냈다.

슈메를링의 얼굴은 펄펄 끓는 물 주전자보다도 더 붉어진 얼굴로 집무실을 나갔다.

[너무 심하게 군 것 아닌가?]

‘허허, 저는 저 친구에게 합법적으로 아랫놈들을 조질 기회를 준 겁니다.’

[자네 말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되질 않는군…… 지금 저 친구는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하여 분노하며 나가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그 분노를 프란츠인지 콘라드인지 하는 녀석에게 전부 쏟아붓겠지요.’

영감님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가?]

‘없죠. 적당히 돌려 말하면서 그 새끼를 조져 버리라고 말할 수도 있었죠.’

[그런데 어째서 그리하지 않았는가.]

‘귀찮잖아요.’

[흠…… 고작 그런 이유로 슈메를링의 명예에 흠집을 주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네만.]

영감님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괜찮습니다. 돌아오면 적당히 칭찬도 해주면서 집에 일찍 보내주면 그만이지요.’

[허, 거참…… 이번에는 당근과 채찍인가?]

‘뭐 그런 셈이죠.’

모름지기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병행해야 훌륭한 군주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영감님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듯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참 신기하군.]

‘또 뭐가요?’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화를 내야 할 때는 감정을 숨기지 않잖는가.]

‘아 그거요? 그게 말이죠…….’

그때,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폐하, 용무가 있어서 왔는데요.”

“지금은 업무시간이네만.”

“아리따운 약혼녀가 찾아왔으니 십 분 정도는 내어주실 수 있잖아요.”

“십 분이라…….”

대충 내가 서류 하나를 처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1분 내외로 서류를 처리하니 중요한 보고서 열 개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 내게 십 분이나 내어달라고?

한 시간도 내어줄 수 있다.

[쯧쯧쯧…… 모지리 같은 표정 짓지 말게.]

“크흠…… 잠깐 쉬었다가 하지요 라이너 공.”

“그리하시지요 폐하, 소인은 잠시 급한 일이 있어 조금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눈치 빠른 라이너 대공이 슬쩍 자리를 비켜줬다.

“헨리, 여기 찻주전자가 식었으니 새로 끓여오고 간단하게 먹을 것도…….”

“아니 괜찮아요 헨리 경.”

“음?”

평소와는 다르게 오래 있지 않을 거라는 분위기를 내뿜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또 어머니와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로군.]

‘아…….’

그러고 보니 시씨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보일 것처럼 촉촉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애써 모른 척하며 웃었다.

“아무리 내 얼굴이 보고 싶다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는 건 조금 삼가줬으면 좋겠…….”

“…….”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라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나를 놀려먹었을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치마폭에 파묻더니 두 어깨를 들썩이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야.”

“……요즘 좀 힘들어요.”

“궁정 생활이 조금 빡빡하긴 하지…….”

“그런 게 아니에요…… 매번 불려가서는 아무런 설명도 안 해주시고 옆에 가만히 세워 두시질 않나…… 지난번에는 자기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지 않는다고 얼마나 야단치시던지…….”

그리 말하는 그녀의 두 어깨가 잔잔하게 떨렸다.

무언가 겁에 질린 듯한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그 피가 머리까지 뻗쳤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이젠 한판 붙자는 건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나 마나 어머니께서 신부수업을 시키겠다며 잡도리를 한 게 분명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원…… 나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헨리! 어디 있어! 당장 튀어나와!”

“예, 폐하!”

“지금 가서 어머니…… 아니, 조피대공비께 후원에서 내가 뵙자 했다고…….”

머리에 열이 뻗쳤다.

이번에야말로 어머니를 궁에서 내보내든가 그게 아니라면 아예 그리 좋으시다던 바이에른으로 보내버릴 참이었다.

“당장 가서 전하게!”

“아, 알겠습…….”

“푸흡…….”

그때, 뒤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남들 모르게 장난을 친 개구쟁이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틀어막는 듯한 그런 소리 말이다.

“시씨……?”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그렇게나 분했던 건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었다.

“장난이었네요!”

“…….”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이제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하! 너무 순진하신 거 아니에요?”

“…….”

시씨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냥 농담이라고?”

“그럼 제가 이모님께 구박이라도 받을까 봐요?”

“…….”

그녀는 며칠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야위었고 눈가에는 눈물 자국 위에 화장을 덧칠한 흔적이 보였다.

이런데도 그냥 농담이라고?

“헨리.”

“부, 부르셨습니까 폐하…….”

“가서 조피 대공비께 내가 보자 했다고 전하게.”

“폐하, 단순히 농담이었다니까요.”

그녀는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말렸다.

시씨의 그런 행동은 내게 마음 쓸 거 없다고 잠깐 눈감고 지나가라는 것처럼 들렸다.

“가벼운 장난이었는데 폐하께서 이렇게까지 나오실 줄은 몰랐네요…… 제가 경솔했어요.”

내 눈치를 살피면서 어딘가 겁먹은 듯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시씨, 당신이 장난친다는데 나도 좀 어울려줘야 하지 않겠어? 안 그래도 집무실에 틀어박혀서 서류나 처리한다고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거든.”

“폐하.”

“헨리? 가서 조피 대공비께 내가 보자 했다고 말씀드리고 후원으로 모셔.”

내 말에 헨리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아뢰옵기 송구스럽지만…… 밖에 한창 비가 오고 있는지라 조피 대공비 전하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후원보다는 대면실에서…….”

“헨리.”

나와 헨리 사이에 굳이 얼굴 붉혀가며 말을 길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면 대충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챘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폐, 폐하…… 아무리 그래도 이모님을…….”

나는 불안에 떠는 시씨에게 웃어줬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 마.”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항상 다음에 큰 사건이 터졌잖아요.”

그녀의 걱정 어린 말에도 나는 여전히 웃었다.

“화약 더미 위에서 태평하게 담뱃불이나 붙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언젠가는 처리해야 할 일이었지.]

그동안 잠깐 미뤘을 뿐이다.

어머니도 그걸 잘 알고선 나를 도발하신 거다.

아니, 대놓고 궁정 안에서는 자신이 황제라고 선언하신 거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원래 당찬 분이었지…… 자존감도 높으시고 자신의 눈에 차지 않는 사람은 기를 쓰고 궁전에서 쫓아내시고는 했지.]

‘그래서요?’

[……어머니는 쉽게 바뀔 분이 아니라는 걸세.]

좋게 말하자면 자존감이 높은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누구도 못 말린다는 거다.

‘오…… 그것참 우연이네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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