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83)

2화

<황후의 정원>

과거 밤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봤던 19금 소설이었다.

여주인공은 공작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아버지께 핍박당했다. 나이가 차서 노인에게 결혼이란 이름으로 팔려 갈 위기에 놓였지만, 그때, 황태자와 마주쳐 거래하게 된다.

“네 몸을 이용하게 해 준다면 널 구해 줄게.”

황태자의 제안에 여주인공, 헤른은 깊은 고민 끝에 받아들인다. 몸을 이용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였고, 매일 밤, 황태자와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제국 최초의 성녀였고, 능력이 발현되며 많은 이들이 그녀를 찾는다.

황후가 되었지만, 원치 않는 밤을 보내며 힘들어하던 헤른의 앞에 카이네스가 등장한다.

비밀스러운 황후의 정원에서 만난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서로의 지위를 알지 못했다.

은연중에 둘이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이 인연이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와중에 스릴 넘치는 둘의 로맨스가 매력 만점인 소설이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전부 헤른에게 홀렸으며, 악역이었던 사람들마저도 전부 그녀에게 빠져 버렸다. 19금 피폐 로맨스다운 전개로, 흐흠.

단연 이 소설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남주인공이었다! 벤츠남!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남자!

카이네스 페이시아. 흑발에 적안을 가진 남주는 서늘한 눈매가 인상적이며, 혼자서 적국의 수장 목을 베고 돌아올 만큼 강한 남자였다.

물 마법도 사용할 수 있었고, 검에 특히 재능이 출중했다. 물 마법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상처를 입어도 곧바로 치유할 수 있었다.

마법이 존재하나 흔치 않은 세계였기에 그의 위상은 날로 커졌다.

페이시아 가문은 대대로 제국을 지키는 수호 가문이었는데, 강한 핏줄을 이어받은 카이네스는 절대 죽지 않는 사나이, 혹은 인류 최강이라는 거대한 수식을 달고 있는 남자였다.

무, 물론 책에선 다른 쪽으로 무척 강했지만.

“흐, 흠!”

아무도 없는 방이었지만, 방금까지 뽀짝한 카이네스가 있었던 방이라 죄책감이 느껴졌다.

어린아이를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윤기가 흐르는 흑발에 루비를 녹여낸 것 같은 새빨간 눈동자라니, 내 취향을 너무 잘 아시는 우리 작가님…….

“햐…….”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하늘을 보고 감사 기도를 올렸다.

성덕 여기서 잠들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소설이 미완결이었다는 것. 게다가 19금 피폐물이라 세계관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뭐 어떠하리. 제일 좋아하는 원작 속에 들어와 구경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더는 목숨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귀염 뽀짝한 남주님을 좋아하지 않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내 몸은 열다섯일지 몰라도 몸속은 성인이다. 아주 까만 속내를 가진 다 큰 어른.

그런데 코흘리개 어린애를 사랑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또 그러신다. 무슨 좋은 생각을 하시길래 그래요?”

엘리가 푸스스 웃으며 물었다. 방을 정리하던 중 내 입꼬리가 승천하고 있는 걸 본 모양이다.

“별건 아니고…… 그냥 삶이 너무 즐거워서.”

소설의 완결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이야!

기분 좋아 죽을 것 같아!

“다행이네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엄청 우울해하셨잖아요. 발작하는 것처럼 소리 지르셔서 간 떨어질 뻔했어요. 아가씨께서 아프신 줄 알고…….”

엘리는 상상만으로도 무섭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악몽을 꾸는 줄 알았다. 내가 갑자기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왔다니.

게다가…… 내가 에스타 베일리라니.

난 나의 미래를 무척 잘 알았다. 그러니 기겁하며 놀랄 수밖에.

또 우울해지려 한다.

“휴우…….”

에스타는 등장만으로도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소설 속 악역이었고, 무척이나 악독해서 매번 여주인공을 못살게 굴었다.

뭐…… 남주인공을 짝사랑했기 때문이었고, 여주인공인 헤른이 사라진다면 남주의 사랑이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할 만큼 멍청한 여자였다.

소설은 여주인공의 시점으로 시작됐고, 헤른과 카이네스는 첫눈에 서로에게 강렬함을 느끼니까.

그러니 악역의 과거사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는데.

“난 정말 이렇게 알고 싶지 않았다고…….”

“아가씨, 이제 주무실 시간이에요. 머리 빗겨 드릴게요.”

어지러운 내 머리를 정리해 주려는 듯 엘리의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칼을 빗기 시작했다.

몽글몽글한 손길이 부드럽게 연이어 닿자 점점 잠이 오기 시작했다.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자, 엘리가 날 침대로 안내했다.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어 준 뒤, 켜 둔 양초까지 꺼 주고서 방을 나갔다.

더운데…….

엘리는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돌연 문을 열고는 소리쳤다.

“더워도 이불은 꼭 덮고 자야 해요! 주무세요, 아가씨.”

“으응. 엘리도 잘 자.”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이불을 홱 던졌다. 엘리가 신신당부를 했지만, 더운 건 더운 거였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식혔지만, 어째 열이 더 오르는 것 같다.

“후우…… 왜 이렇게 더운 거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은 카이네스가 사는 페이시아 저택이었다.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두 가문은 친분을 유지했다. 지금은 좀 서먹하지만, 아버지와 공작님은 어릴 땐 친했다고 한다.

가문끼리 유대가 깊은 탓에 저택도 가깝고 앞마당도 거의 공유하다시피 했다. 낮은 벽 하나를 두고는 두 저택이 근접했으니.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예 다른 사람처럼 바뀐 거야?

원작의 남주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며 한 사람에게 집착하는, 상처 많은 사람이었다.

제가 상처를 받을 것 같으면 먼저 상처를 줘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어쩌면 제일 악질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런 귀염 뽀짝이가 튀어나오니 안 놀랄 수가 없었다.

“일단 내일 생각할까?”

다시 침대에 누워 있으니 잠이 점점 몰려왔다.

‘꿈은 아니겠지?’

잠들기 직전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아침 햇살에 눈을 뜨는 아침이라니. 자명종이 따로 없지만, 창밖에서 들리는 꾀꼬리 소리가 그것을 대신했다.

누가 소설 속 아니랄까 봐.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던 중 문을 열고 등장한 이가 있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웬일이래.”

엘리가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며 세숫물을 가져다주었다.

가볍게 세수하고 뽀송뽀송한 수건에 얼굴을 톡톡 두드려 닦았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는데…….

“진짜 예쁘다. 무슨 여신인가?”

“호호. 아가씨도 참!”

그런 내 모습이 재밌다는 듯 엘리가 웃었다.

난 진심이었는데.

거울 속에 비친 에스타는 정말 예뻤다. 피부는 하얗다 못해 사라질 듯 창백했다. 흔한 금발의 굴곡진 머리였지만, 윤기가 흘러 찰랑거렸고, 또 눈동자는 옅은 금색이었다.

에스타는 전체적으로 색이 옅은 사람이었다.

‘이런 눈동자 색은 처음 봐.’

아직 남은 볼살이 에스타를 귀엽게 만들었다.

감격스러워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크면 분명 엄청난 미인이 될 게 분명해.”

“당연하죠, 누구 아가씨인데요. 베일리 가문의 막내 따님이 예쁘다는 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죠.”

“엘리……. 너 말 너무 예쁘게 한다. 조금 더 해 줄래?”

한껏 기분이 좋아져, 엘리와 함께 에스타 베일리가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엘리가 고른 에스타의 제일 예쁜 점은 눈이었다.

선한 눈매, 연한 금색 머리와 무척 잘 어울린다는 것.

“그렇구나. 눈매가 선해 보이는구나.”

나도 모르게 엘리의 말을 따라 읊었다. 에스타가 선해 보인다는 말에 놀라서였다.

에스타는 악역이어서 당연히 누가 봐도 못돼 보일 줄 알았는데. 편견이었을까?

에스타는 악역이었지만, 딱 여주 한정이었다. 카이네스가 헤른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것을 알자 곧장 없애 버리려고 한 것이다.

정말 미친 집착이었다. 누가 실연을 당했다고 사람을 죽이려고 해?

에스타의 엽기적인 행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거울로 처음 마주한 에스타는 남들보다 예쁠 뿐, 아주 평범한 영애였다.

엘리가 머리를 빗겨 주는 손길을 느꼈다. 그 뒤 드레스를 가지고 온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따스한 바람이 들어오는 봄 날씨였다. 일 층 정원에는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정원을 관리하거나 뒷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혹시나 내가 에스타가 된 게 꿈이 아닐까 싶었던 생각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아가씨, 이제 아침 식사하러 가요.”

“알겠어.”

식당으로 내려가자 아버지와 어머니, 둘째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가 이미 식탁에 앉아 계셨다.

“내려왔니.”

아버지가 먼저 온화한 웃음을 띠시고 다가와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당황스러웠지만, 나도 웃으며 아빠의 볼에 뽀뽀해 주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겠지?’

그런데 아버지는 내 뽀뽀를 받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 컸다면서 이제 하지 않겠다더니. 하하.”

기분 좋게 웃으시곤 날 자리로 데려가 주었다. 다행히 이상해 보이진 않은 것 같았다.

에스타가 누굴 닮아서 이리 예쁜가 했더니…….

가족들의 유전자가 전부 좋았다. 금발을 가진 어머니는 누가 봐도 아름다우셨으며 우아하신 분이었다.

아버지는 호탕한 매력이 있었고, 쾌남이라 불릴 만했다. 잘생긴 얼굴이 자꾸 웃으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대망의 오라버니들. 둘째 오라버니는 날 보곤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 표정마저 ‘아, 잘생겼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셋째 오라버니는 식탁 앞에서도 책을 읽고 있어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가 식당에 들어올 때 잠깐 고개를 들긴 했지만.

둘 다 어머니의 피가 짙은지 아주 눈부신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오라버니는 궁에서 일하고 있어 저택에 자주 올 수 없었다. 소문으로는 제일 잘생겼다던데.

“좋은 아침이에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의자에 앉아 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오라버니들에겐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둘째 오라버니가 의아하다는 듯 대꾸했다.

“언제부터 네가 붙임성이 좋았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