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제뉴어.”
어머니가 낮게 으름장을 놓으셨다.
“말도 못 하나요?”
뺀질거리며 대답하는 것이 어째 꼭 말썽꾸러기 아들 같았다.
그가 배시시 웃으며 어머니께 말했다.
“죄송해요.”
“사과는 에스타에게 하렴.”
제뉴어 오라버니가 고개를 홱 돌렸다.
“미안.”
이렇게 바로 사과할 줄이야. 오히려 내가 당황스럽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제뉴어 오라버니가 눈을 깜빡거리며 날 바라봤다.
“오라버니? 너, 야, 제뉴어, 이렇게 부를 땐 언제고.”
“헉, 제가 그랬나요?”
“너 어제부터 정말 이상하다.”
제뉴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의심하는 눈길에 등에서 땀이 뻘뻘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금방 의심을 살 줄이야!
“제뉴어, 그만하렴. 에스타가 당황하잖니.”
“미안.”
제뉴어의 사과는 무척 빨랐다. 야생 재규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머니에게 잘 길들여진 집고양이였다.
사나운 눈매가 어머니를 향할 때마다 곱게 휘며 웃는다. 어머니가 원한다면 발라당 누워서 재주도 부릴 것 같다.
어머니는 그런 제뉴어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제뉴어 오라버니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동생을 너무 괴롭히면 안 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메이어, 너도 책 그만 보렴.”
“네, 어머니.”
메이어 오라버니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낮았다. 차분한 분위기에 반쯤 감긴 눈매가 꼭 세상을 통달한 것 같았다.
관심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메이어 오라버니의 눈이 내게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그럼 이제 식사하지.”
아버지가 싱긋 웃으며 식사를 제안했다.
시녀들이 메인 디쉬를 꺼내 오고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많이 먹으렴.”
아버지는 날 다시금 챙기며 식사를 이어 갔다.
이런 따듯한 가족이라니. 오라버니들과 썩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지만, 뭐 어떤가! 앞으로 친해지면 될 일이다.
나는 웃으며 샐러드에 손을 뻗었다.
한참 식사하며 소소한 대화를 이어 갔다. 제뉴어 오라버니는 특히 어머니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메이어 오라버니는 대화 도중에도 책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다.
마치 안타깝게 헤어진 전 여친을 바라보는 것처럼 애틋함이 가득했다.
“요즘 에스타가 방에서 잘 안 나온다던데.”
아버지께서 돌연 대화 주제를 나로 돌려 버렸다.
온 가족의 시선이 몰려 조금 난감했으나 유연하게 대처했다.
몸은 열 다섯이지만, 정신적으론 이미 성인이었으니까.
“별일은 아니고요. 이제 카이네스에게 관심 끄고 새로운 취미 생활이나 해 볼까 해서요.”
“네가?”
제뉴어 오라버니가 버릇처럼 빈정거렸다.
그래 봤자 현생의 나보다 어리다.
슬쩍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께서 검을 잘 다루시죠? 시간 되시면 제게 가르쳐 주실래요?”
대놓고 나를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제뉴어에게 묻자 퍽 당황한 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검을? 아니, 그것보다 카이네스에게 관심을 거두겠다고?”
“네.”
거절할 것이라 여겼다. 식당에서 마주친 내내 불편한 기색을 보였으니까. 그런데 제뉴어 오라버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의외였다.
“좋아.”
……어라? 거절할 줄 알았는데?
“검을 배우면 네 썩어 빠진 정신도 좀 나아지겠지.”
“제뉴어!”
어머니의 노한 음성이 제뉴어 오라버니에게 향했다.
제뉴어는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이번에 정신머리를 싹 고쳐야죠. 저번에 약을 탄 지 얼마나 됐다고 어제 또 쿠키를 먹였대요.”
“쿠키?”
어제 다과상에 쿠키가 나오긴 했었다. 카이네스는 책만 보며 쿠키는커녕 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다소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렸을 때였다. 머릿속에서 기억 한 조각이 스쳐 지나갔다.
일명 ‘사랑의 물약’. 제 딴에는 카이네스가 먹으면 자신을 사랑하게 될 줄 알고 먹였겠지만, 그건…… 미약이었다.
열세 살의 남자아이가 먹을 만한 건 결코 아니었다.
약을 마신 카이네스가 기절하자 베일리 백작저와 페이시아 공작저에 큰 파문이 일었다. 약혼 파기를 논할 만큼 심각한 일이었다.
공작은 무척 화를 내며 에스타를 별관에 일주일 동안 가둬 놨었다. 그냥 못 나오게 한 것이었지만, 에스타는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카이네스를 볼 수 없었으니까.
‘하아……. 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기한테 그런 걸 먹인 거야?’
“쿠키는 카이네스가 손도 대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어제 일이 떠올라 짤막하게 말하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날 쳐다봤다.
“정말 그랬니?”
“그게 쿠키를 먹긴 했는데요. 약은 타지 않았어요.”
옅은 의심이 섞여 있는 시선이었지만,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으셨다.
“정말이지?”
“네.”
“후우…….”
“여보, 화내는 건 좋지 않아. 몸도 좋지 않으면서…….”
아버지가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등을 다독였다. 제뉴어도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가 낑낑거리듯 달랬다.
분위기가 난장판이 났는데도 메이어 오라버니는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볼 뿐이다.
이거…… 나 때문인 거 맞지?
그간 카이네스에게 지독한 집착을 한 탓에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가 보다.
“저기…… 할 말이 있는데요.”
조용한 분위기 속에 손을 살짝 들며 말했다.
“저 이제 정말 카이네스 안 좋아하고요. 쫓아다니지도 않을 거예요.”
“하하……. 또 거짓말을 하는 거야?”
이미 한 번 했었니?
“그래 놓고 일주일도 안 돼서 또 쫓아다닐 거잖아.”
제뉴어 오라버니의 입 속에서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제지하려는 듯 제뉴어 오라버니의 왼손을 붙들었다.
조금은 힘들어 보이는 어머니의 시선을 마주하고 단호히 말했다.
“당장은 믿지 못하시겠지만, 정말이에요. 카이네스를 좋아하지만, 단순히 소꿉친구로서요. 그 이상의 감정은 느끼지 않아요. 더 이상 걱정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게요.”
제뉴어 오라버니는 여전히 나를 의심하는 듯했고, 부모님은 조금이나마 믿어 보고 싶다는 듯 날 쳐다보았다.
메이어 오라버니의 반응이 제일 의외였다.
슬쩍 펼쳐 두었던 책을 덮고는 날 빤히 직시했다.
“그래. 그러면 정말 다행이구나…….”
어머니의 음성이 조금 떨렸다.
카이네스를 향한 에스타의 집착이 도를 넘기 시작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
하나뿐인 딸을 강하게 뜯어말리기도 힘들었을 거다. 에스타의 집착은 병적이었으니까.
“믿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식사가 다시 이어졌다.
분위기는 참담할 정도로 어색했지만, 그래도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혹시나 부모님이 날 포기한 건 아닐까 걱정했다.
답 없는 딸이었으니.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려던 때, 아버지가 날 부르셨다.
그리고 따뜻하게 안아 주더니 이마에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해 주었다.
“생각을 바꿔 주어 고맙구나.”
부끄러워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해 주었다.
“착한 우리 딸.”
착하다뇨? 어딜 봐서 에스타가 착해 보이셨을까?
의문에 차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뉴어.”
“…….”
대놓고 싫다는 표정을 한 제뉴어 오라버니가 내 앞에 섰다.
왜 저런 표정을 하는가 했더니, 제뉴어 오라버니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자, 잠깐만!
“나도 원하는 건 아니야.”
제뉴어 오라버니는 못마땅해하면서도 입을 쪽 맞췄다.
살짝 당황해 고개를 들자, 제뉴어 오라버니의 귓가가 붉다.
“왜……?”
“우리 가족 전통이잖아.”
“……네?”
메이어 오라버니는 고민도 없이 가볍게 입을 맞추곤 감흥 없는 얼굴로 곧장 책으로 향했다.
이, 이런 게 가족 전통이라니…… 너무 화목해……!
남매들끼리 지지고 볶고, 서로 쳐다도 안 보고 하는 거 아니었어?
얼이 빠져 멍하니 있으니, 아버지가 귀엽다는 듯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는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셨다.
그 뒤를 제뉴어 오라버니가 총총 뒤따라갔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나도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메이어 오라버니와 동시에 일어난 탓에 문에서 애매하게 마주하고 말았다.
나는 최대한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메이어 오라버니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 무감각한 눈이 날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괜히 땀이 뻘뻘 났다. 그러던 중 나보다 조금 더 큰 손이 머리에 툭 올라왔다.
머리를 이리저리 흩트리는 바람에 엉망이 됐지만, 머리보다 눈앞에 있는 메이어 오라버니가 더 당황스러웠다.
“걱정할 것 없어. 둘째 망나니도 널 좋아하니까.”
“……네?”
“너도 좋은 하루 보내.”
메이어 오라버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방으로 올라갔다.
당황스러워 이 층 방으로 올라갈 생각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이 집안 뭐지……?
이렇게 화목한데 에스타 인성이 그 꼬라지인 게 의문이 들 정도였다.
* * *
“야.”
다음 날, 메이어 오라버니 피셜 ‘이 집안 둘째 망나니’가 날 찾아왔다.
불량스러워 보이는 눈빛에 맞지 않는 옷은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 단정하게 입었다.
왠지 저것도 어머니가 시켜서 저러고 다니는 것 같달까……?
“왜 그러세요?”
“이거 받아.”
“……검이잖아요?”
“옷 갈아입고 나와.”
그러고는 휙 방에서 나갔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둘째 망나니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엘리가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검을 가르쳐 주시려나 봐요.”
“그……거 농담이었는데.”
난 편히 놀고먹으며 살 궁리나 했단 말이야.
생각보다 적극적인 제뉴어 오라버니의 행동이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가야겠지……?”
이미 날 싫어하는 둘째 오라버니에게 더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식당에서 들었던 메이어 오라버니의 말이 떠올랐다.
-걱정할 것 없어. 둘째 망나니도 널 좋아하니까.
그러면 순전히 걱정이라는 건데…….
방에 쳐들어와서는 목검부터 던져 주는 모습이 너무 저돌적이라, 오늘 하루 제뉴어 오라버니에게 굴려질 내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