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자 둘째 망나니가 연무장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채로 나와 다르게 진검을 들고 있었다.
날이 선 검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날 벨 생각은 아니겠지……?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너, 죽어랏! 이런 건 아니겠지?
머릿속으로 핏빛 가득한 생각을 하던 중 제뉴어가 손으로 콩 이마를 때렸다.
“뭐 하냐.”
자주 연무장에서 훈련하는지 햇볕에 피부가 그을려 나에 비해 까만 편이었다.
오라버니가 진검을 내려놓고는 날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속셈이야?”
“속셈이요?”
“그래, 속셈.”
역시나. 이제 카이네스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믿지 않았나 보다.
“말 그대로예요. 카이네스를 더 이상 안 좋아해서요.”
“왜?”
“……네?”
“왜 좋아하지 않아? 갑자기? 그렇게 좋아해 놓고?”
아무도 없는 연무장에 불러서는 이런 질문만 던지고 있다.
벌써 수십 번도 더 대답한 것 같은데……. 조금은 귀찮아져서 시원찮게 대답했다.
“그냥?”
제뉴어 오라버니의 시원스럽게 생긴 얼굴이 팍 구겨졌다.
“그래, 알겠어. 네가 나를 귀찮아하는 것 하나는 잘 알겠다.”
“……귀찮지 않아요. 하지만 오라버니께서 계속 같은 질문만 하시니까요.”
“의아하잖아. 네가 갑자기 검을 배운다니. 게다가 너도 알고 있지 않아?”
“무얼요?”
“내가 매일 오전에 카이네스와 검술 대련을 한다는 걸.”
“……!”
그래서 의심했던 거구나.
스스로 의심의 굴을 파고 있던 중이었다. 특히 제뉴어 오라버니는 날 이상하게 바라보는데 말이야.
이걸 어떻게 해명해야 하나. 막막한 마음에 볼을 긁었다.
“오전에는 검술을 배울 생각이 없어요. 오후면 좋겠어요.”
“……정말?”
“네, 정말요. 지금은 카이네스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카이네스 본인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믿으려면 적어도 한 달은 눈에 띄지 않아야겠지.
남주님의 귀염 뽀짝한 어린 시절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제뉴어의 표정이 의문으로 가득해졌다. 머리를 헤집다가 눈살을 찌푸렸다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숨을 뱉었다.
“그래.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반쯤 포기한 제뉴어 오라버니가 차분한 눈으로 말했다.
“일단 오십 바퀴 뛰자.”
오, 오십 바퀴요?
“저, 저를 죽이시려고요…?”
“그것도 못 뛰어?”
“다, 당연하죠!”
제뉴어 오라버니는 그걸 왜 못 뛰냐는 듯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일단 뛰어 봐. 체력부터 확인해 봐야겠네.”
정말 가르쳐 줄 생각은 맞는지 꽤나 열의 넘치는 모습이다. 덩달아 나도 의욕이 생겼다.
양손으로 혼자 ‘아자!’ 기합을 넣고는 가볍게 몸풀기를 한 뒤, 연무장을 뛰기 시작했다.
그 옆을 제뉴어 오라버니가 같이 뛰어 주었다.
같이? 아니, 제뉴어 오라버니는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뛰었다.
헉헉, 왜 저렇게 빨라?
조금은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나도 연무장을 뛰었다.
나는 열 바퀴도 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땀이 흘러 등이 축축했다. 그에 반해 제뉴어 오라버니는 아주 멀쩡한 모습이었다.
평소에 꾸준히 운동했었던 사람은 다르구나.
너무 힘들어서 모래밭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후하……. 지…… 진짜 죽겠다…….”
하늘이 핑글핑글 도는 기분이다. 혼이 나간 듯 하늘을 보던 중, 갑자기 제뉴어 오라버니가 시야에 툭 나타났다.
“벌써 쉬냐?”
“그, 그게 아니라요……. 진짜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뭐라고 한 거 아냐. 쉬어라.”
제뉴어 오라버니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시야가 가려져서 뭔가 했는데, 제뉴어 오라버니가 내 머리 위에 수건을 툭 떨어뜨린 거였다.
괜히 쌀쌀맞긴.
메이어 오라버니의 말대로 제뉴어 오라버니가 날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빙의하기 전의 에스타가 사고를 적잖이 쳤으니 질겁하긴 했으나, 정말 싫어했다면 이렇게 잘해 줄 리는 없었다.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제뉴어 오라버니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았다.
달리는 게 싫긴 했지만, 땀을 흘리니 기분이 상쾌했다.
“여기 물.”
물까지 가져다주다니.
집착광공 꿈나무 여동생을 대하는 것 치고 다정하다.
“고마워요.”
조금은 마음이 풀어져 순순히 물을 받아들었다.
시원한 물을 한 입 삼키자 절로 상쾌한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은 그만하면 충분해. 체력은…… 넌 좀 운동해야겠다.”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뉴어 오라버니가 피식 웃으며 내 옆에 같이 앉았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제뉴어 오라버니를 보니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저렇게 웃는 제뉴어 오라버니는 처음인데.’
확실히 에스타보다 나이 많은 티가 났다.
얼굴은 어릴지 몰라도 생각하는 게 조금은 어른스럽달까.
웃는 제뉴어 오라버니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비아냥댈 때랑은 차원이 다른 부드러움이었다.
“그간 미안했어요.”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카이네스를 좋아한다는 마음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게 과했고, 범법적인 행동도 많이 저질렀으니까.
그걸 다 해결해 준 것은 가족들이었다.
조용히 사과하자 제뉴어가 손으로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마치 위로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에스타는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이렇게 따뜻한 가족이 있다니.
조금 부러웠다. 현실에서 나는 고아였는데.
물 잔을 옆에 내려놓고 무릎을 가슴으로 당겨 안았다.
자세가 불편해 보였는지 제뉴어 오라버니가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앉으면 불편할 텐데.”
“저는 이게 좋아서요.”
“그래?”
제뉴어 오라버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벌렁 뒤로 드러누웠다.
땀이 전혀 나지 않은 뽀송뽀송한 얼굴로 드러누워 곁을 지켜 주는 게 퍽 좋아서 오라버니를 따라 벌러덩 드러누웠다.
“바닥 더러워! 뭐라도 깔든지!”
오라버니는 소리치면서도 황급히 수건을 머리 밑에 깔아 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웃음이 터졌다.
‘원작 소설 엔딩만 보면 좋을 것 같았는데. 이런 것도 꽤 좋네…….’
제뉴어 오라버니와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던 중, 연무장 입구에서 보이면 안 될 사람이 보이고 말았다.
내, 내가 헛것을 보나?
“……카이네스?”
조용히 카이네스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제뉴어 오라버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
그 이름을 왜 거론하냐는 의미였다.
나는 살짝 놀란 눈으로 앞을 가리켰다. 검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찬 카이네스가 입구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네가 왜 왔냐?”
당황하는 제뉴어 오라버니를 보니 약속하고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카이네스는 슬쩍 날 보고는 제 허리에 차인 검집을 들어 보였다.
“대련하려고?”
“네. 오늘 오전에 못 했잖아요.”
짤막한 카이네스의 대답에 제뉴어 오라버니는 이마를 짚었다.
오라버니가 내 진심을 믿어 주려는 이 타이밍에, 하필이면 카이네스가 나타나다니.
쯧- 제뉴어 오라버니가 혀를 차며 날 바라보았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해 보겠다는 뜻 같았다.
‘시, 시험이다…!’
난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제뉴어 오라버니 귓가에 속삭였다.
“제, 제가 부른 게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오라버니!”
오해받기 싫어서 간절하게 속삭였다. 오라버니는 조금 얼빠진 얼굴로 날 내려다봤다.
“이미 상대가 있나 보네요. 돌아갈게요.”
“아, 아니!”
나도 모르게 카이네스를 붙잡았다. 카이네스가 무심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내가 갈게. 나는 운동도 다 했으니까 네가 오빠랑 상대해 줘.”
“…….”
평소 무표정하기로 유명한 카이네스마저 살짝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봤다.
‘이제 진짜 관심 끊는다니까?’
난 오라버니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황급히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때까지도 제뉴어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또 자신들을 속이는 건 아닐까 했는데.
제 여동생이 드디어 마음을 먹었나 보다.
공허한 눈빛으로 에스타가 사라진 곳과 카이네스를 번갈아 보던 제뉴어가 중얼거렸다.
“에스타가 이제 너 안 좋아한단다.”
제뉴어가 어리벙벙한 얼굴을 하다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카이네스의 어깨를 탕탕 두들겼다.
“…….”
카이네스는 에스타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의아하다는 듯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이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카이네스는 평소 자신에게 들러붙는 에스타를 질색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제뉴어는 퍽 기쁜 얼굴로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예.”
대답하는 카이네스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다만 에스타가 사라진 빈자리를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 * *
“후아……!”
막 도망쳐 나온 뒤에 숨을 내쉬었다. 너무 급하게 뛰어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게 뛰어서인지, 아니면 보고 싶었던 카이네스를 본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잠깐 보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 얼마나 예쁜지…….
카이네스를 보기 위해 더 운동하면 안 되냐고 제 오라비를 조를 뻔했다.
“정말 위험한 외모라니까.”
뺨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쓱 닦으며 굽혔던 등을 폈다.
“너무 더워.”
일단 목이 너무 말랐다.
씻으러 가기 전에 주방에 들러 물 한 잔 마시고 가야지.
저택 일 층에 있는 주방에 막 들어섰을 때, 바쁘게 점심을 준비하는 하녀들이 보였다.
아무나 한 명을 붙잡고 물을 달라고 하자, ‘부르시지 그러셨어요!’라며 안타까워하는 말이 돌아왔다.
하지만 막 부탁하기는 좀 민망한걸.
누군가를 부리는 것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
첫날에는 높임말을 하니 기겁하며 그러지 말라고 했지…….
바쁜 주방 한쪽에 서서 어색하게 물을 마시자 주전자를 준비하던 하녀가 슬쩍 나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가 가실래요?”
“……응?”
나보고 일하라는 소린가? 나 아가씨인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재빨리 하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연무장에 페이시아 소공자님께서 오셨다기에요! 저, 절대 아가씨에게 일을 시키려는 건 아니었어요! 아시죠?”
내가 빤히 바라보자 하녀는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지 당황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화가 났다기보다 당황스러웠다. 저택의 하녀들도 다 알 만큼 카이네스를 짝사랑하고 있었다니.
“아니, 네가 가져다줄래?”
“아…….”
“이제 나한테 묻지 않아도 돼. 안 좋아하거든.”
“뭐를요?”
“카이네스를.”
“……네에?”
하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기겁하면서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