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83)

6화

잡힌 손을 통해 순간 몸이 시원해지며 화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어라? 난 제국이 여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나만 더웠던 거다. 어쩐지 다른 사람들 옷차림은 두껍더라니.

초봄, 아직 쌀쌀한 시기에 나는 뒤늦은 시원함을 느끼고 번쩍 눈을 떴다.

카이네스의 손을 통해 푸른 기운이 내 손을 타고 온몸에 퍼지고 있었다.

카이네스는 눈을 감은 채 눈썹을 꿈틀거렸다.

곧 카이네스가 눈을 천천히 떴다. 내 시선을 뒤늦게 알아차린 카이네스가 빠르게 손을 놓았다.

나는 내게 뻗었던 손을 양손으로 덥석 잡고는 외쳤다.

“또 해 줘. 한 번만 더 하자, 우리? 응?”

갑작스러운 앙탈에 카이네스가 곤란한 듯 움찔거렸지만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내 기분을 정의하자면 이렇다. 모두가 사막에 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만 사막이었던 것이다.

모두 오아시스에 살고 있었는데! 나만 사막 한복판이라니!

카이네스를 보는 내 눈이 활활 타올랐다.

찾았다. 나만의 전용 에어컨!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이네스가 도망쳐 버렸다. 놀란 얼굴, 흠칫거리던 몸짓, 당황스러움으로 공중을 배회하던 손까지.

명백한 도망이었다.

도망가는 카이네스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어떡하지……?”

이제 카이네스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어.

정말 잠깐이었지만, 너무 행복했다. 카이네스가 주던 시원함이 벌써 그리워……!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책상에 앉아서 고민했다.

원작에서 카이네스는 물 마법사였다. 그의 마력으로 중화된다면 에스타는 불 마법사라는 소리였다.

카이네스는 마력을 다룰 수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늘 몸이 들끓고 열을 주체할 수 없던 이유. 바로 자신이 불의 마력을 타고났단 소리였다.

이제야 원작에서 에스타가 카이네스를 미친 듯이 쫓아다닌 이유를 깨달았다. 카이네스 옆에 있어야만 더위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무더위 정도였지만, 성장하면서 마력도 함께 커지면 불지옥이 펼쳐질 예정이었다.

“미쳤다. 돌았어. 땀 흘리는 것도 싫은데 불지옥이라니.”

하지만 여기서 진짜 문제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마력을 전혀 다룰 수 없단 거였다.

에스타가 마법을 쓰는 장면은 없었다. 그렇다고 마력을 다룬다는 소리도 없었으니 불지옥은 확정이었다.

다룰 수 없는 마력은 몸에 시한폭탄을 달고 있는 것과 같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제거하는 방법은 마력을 제어하는 방법뿐.

“이거 큰일이네.”

아직 에스타의 마력 증폭을 알아차리지 못한 백작가는 에스타가 병에 걸린 줄 알고 있었다.

‘병이 아니라 마력의 양이 많은 거였는데!’

마법은 아직 미개척지였고, 주인공들이 성인쯤 되었을 때나 밝혀지게 된다. 마탑이 그때서야 생기는 걸 보면, 지금 ‘마법 있어요.’라고 말해 봤자 마녀 취급이나 당할 게 뻔하다.

정작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카이네스도 본능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지, 이게 마법이란 사실은 모르니까.

원작을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 마법에 관한 영역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시기다.

“잘만 사용한다면 완전 대박이잖아……?”

내가 불 마법사라니.

얼떨떨한 마음에 손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불 마법을 쓰기 위해 낑낑거렸지만, 불 회오리는커녕 불씨 하나 튀지 않았다.

“에이!”

반쯤 포기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자연스럽게 마력을 운용하는 카이네스가 신기할 뿐이었다.

‘그게 재능인 거지. 역시 남주님인가.’

뭔지도 모르면서 할 수 있다는 게.

이대로 마력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카이네스와 마력을 주고받는 건 임시방편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성인이 된 카이네스는 여주인공을 만나러 홀라당 떠날 테니까!

“카이네스가 떠나기 전까지 마력을 다스려야만 해.”

어쩐지 살아남는 게 너무 쉽다고 했어. 계획이 완벽한 줄 알았는데 전제 자체가 틀려먹었을 줄이야.

난 카이네스와 떨어질 수 없는 몸이었다.

조심조심 다가가서 가끔만 해 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마력 운용 방법도 노력하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아직 시간은 많았다.

할 수 있어! 아자아자!

* * *

카이네스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 카이네스는 약속한 시각에 딱 맞춰 우리 집으로 방문했다.

옆구리에 책 한 권을 끼고서.

“그날 치료해 줘서 고마워.”

감사 인사를 전하자 카이네스는 날 잠시 바라보고는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남주님은 생각보다 싸가지가 없구나.’

소설은 헤른의 시점으로 진행돼서 카이네스가 퉁명하게 행동하는 것만 나왔었다.

내 여자한테만 다정한 남자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이야.

남주님은 고운 손가락으로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그날 주방에서 불났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혹시 그거 나 때문이야?”

처음으로 카이네스의 고개가 들렸다.

“큰불은 아니었습니다.”

뭐야, 이 말은…?

이것을 남주식 언어로 번역해 보자면,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으니 자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세상에….

싸가지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들어서 그런지 더욱 감동이었다.

살짝 입을 벌리고 바라보자 남주님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약속한 날엔 꼭 나를 보러 와 준다. 어쩌면 우리의 사이는 아직 괜찮은 게 아닐까?

작은 희망이 생겼다.

어쩌면 마력에 관해 더 쉽게 풀 수 있을지도 몰라.

“저기…….”

마력에 관한 말을 하려고 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 시녀, 엘리가 들어왔다.

“우유와 곁들여 먹을 쿠키예요.”

“응, 고마워. 그나저나 카이네…….”

카이네스의 눈빛이 어딘가 수상쩍다. 마치 어딘가에 시선을 빼앗긴 것처럼…….

그의 시선은 엘리의 손에 들린 쿠키 접시를 향하고 있었다.

어라?

엘리가 쿠키 접시를 들고 왼쪽으로 휙 옮기자, 카이네스의 시선이 따라오고, 오른쪽으로 돌리자 똑같이 따라왔다.

“뭐야? 쿠키가 먹고 싶던 거였어?”

초콜릿 칩이 잔뜩 박혀 맛있어 보이는 쿠키였다.

먹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손으로 쿠키 하나를 집고 쑥 내밀자, 무슨 위험한 거라도 본 사람처럼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왜 저래?

“쿠키 안 먹을 거야? 엄청 맛있는데? 초콜릿 칩도 있어서 진짜 달콤해.”

카이네스는 책을 살짝 내린 채 눈만 빼꼼 내밀었다.

“또 뭐 탄 거 아닙니까?”

가족들이랑 반응이 비슷했다. 의심 섞인 눈초리로 날 쳐다본다.

“……또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에스타는 왜 얘한테 약을 먹여서는!

“내가 먼저 먹으면 괜찮지?”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입에 쿠키를 집어넣었다.

와그작 소리가 날 정도로 바삭했다.

바삭바삭.

소리 내 큰 쿠키 하나를 다 씹어 먹고는 우유를 마셨다.

크으. 진짜 맛있네?

“너도 먹어 봐.”

좋아하는 걸 그렇게 티 내면서 먹을 생각을 안 한다.

또 약을 탄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겠지?

카이네스는 조금 꺼림칙해 보이는 눈으로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얼른.”

재촉하자 카이네스가 쿠키를 한입 베어 물었다.

“어때? 맛있지? 우리 집 주방장이 만든 쿠키는 일류라니까.”

에스타에 빙의해서 좋은 점 한 가지. 매일 먹는 식사와 간식이 기막히게 맛있다는 점이다. 

크으. 부자란 좋은 거구나.

나는 다시 쿠키 하나를 집어 아작 씹었다.

마치 굶주린 야수같이 먹는 나와 달리, 카이네스는 조용히 한입 씹고는 천천히 음미한다.

조금씩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니 단 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슬쩍 쿠키가 담긴 접시를 그에게 밀어 주자 별말 하지 않고 또 다른 쿠키를 집어 들었다.

귀, 귀여워……!

쿠키를 먹는 그는 꼭 햄스터 같았다. 귀여운 얼굴이 그렇게 보이는 데 한몫했다. 쿠키를 가득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리는 것도…….

심각하게 귀여운 남주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엘리를 불렀다.

“쿠, 쿠키 더 가져와! 다른 디저트도!”

“네!”

엘리는 밝게 대답하고는 방을 나갔다.

카이네스도 속으로 퍽 기쁜 것 같았다.

표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아 때려 맞히는 것뿐이지만.

한 가지 남주님에 대해 색다른 걸 알게 되어서 기뻤다.

남주님은 단 걸 좋아해!

“많이 먹어. 음식에 헛짓거리 안 했으니까.”

“헛짓거리?”

“약 같은 거 안 탔다고. 의심되면 내가 먼저 먹을게.”

이러니까 꼭 남주의 기미 상궁 같잖아?

오히려 찬성이다.

억지로 만날 생각은 없지만, 단 걸 먹기 위해 날 만나러 와 준다면야…….

“저택에서 단 걸 못 먹게 하나 봐?”

“……응.”

치아 썩는다, 몸에 안 좋다 그런 걱정을 해서인가?

“페이시아의 후계니까.”

“……그게 왜? 무슨 문제라도?”

타이밍 좋게 씹던 쿠키가 와그작 큰 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카이네스의 눈이 하찮은 생물이라도 본 듯 구겨졌다.

“모든 걸 조심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겨우 쿠키 하나인걸?”

내가 카이네스의 눈앞에서 쿠키를 살랑살랑 흔들자 카이네스의 고개가 쿠키를 따라 흔들렸다.

“넌 좀 조심해야겠다.”

단 걸 이렇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죄다 선물을 챙겨 널 보러 올 거야.

너무 귀엽잖아.

나 말고 다른 스토커가 생길지도 몰라. 넌 예쁘고 귀엽고 잘생겼으니까. 심지어 능력도 좋지.

“밖에서는 숨기는 게 좋겠어. 너 귀찮아지겠다.”

카이네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밝힐 생각이 없는 것일지도.

우리가 마주 앉아서 하는 거라곤 대화 한마디 없이 쿠키를 먹는 것뿐이었다.

원작에서 단 걸 좋아한다더니 진짠가 보네.

엘리가 가져다준 케이크를 본 카이네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직 애는 애구나.’

겨우 열세 살, 한창 단 거 좋아할 나이였다.

이런 거로 남주를 꾀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밖에서는 단 거 잘 못 먹는댔지? 그러면 네가 나를 찾아올 때마다 단 걸 줄게. 쿠키나 케이크, 원하는 게 있다면 미리 말해 줘.”

순간 카이네스의 눈이 반짝였다.

남주님은 단 걸 정말 좋아하나 봐.

덩달아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이제 네가 날 찾아와. 네가 오고 싶을 때.”

“제가요?”

“응. 나는 안 갈 거니까.”

카이네스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역시 귀찮은 나보다는 단 게 좋긴 하지?

“지금까지 치료해 줘서 고맙다는 의미야.”

카이네스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고민하는 카이네스를 보며, 문득 나 자신이 귀여운 아가를 간식으로 꼬시는 못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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