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방을 뛰쳐나왔다. 복도로 뛰어나오자 저 멀리 세숫물을 들고 걸어오는 엘리와 마주쳤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아침 산책!”
“아, 아가씨!”
당황한 얼굴로 나를 붙잡는 엘리를 지나쳐 곧장 뛰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꼭 봐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가씨, 약은 먹고 가셔야죠!”
“나중에 먹을게!”
엘리의 비명 섞인 절규를 들으며 저택을 벗어났다.
곧장 페이시아 공작가와 맞닿은 담장으로 걸어가서 꼼짝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자 저 멀리 걸어오고 있는 앙증맞은 자태의 남주가 보였다.
“좋은 아침이야.”
씩 입꼬리를 올려 웃자 카이네스가 시선을 피했다. 여기서 기다릴 줄 몰랐는지 당황한 듯 흠칫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여기 있습니까?”
“할 말이 있으니까?”
카이네스를 마주 보고 있던 입꼬리가 분노로 파들거렸다.
“우리, 할 말 있잖아. 그렇지?”
위협적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자, 카이네스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탓에 나무 밑에 서 있던 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카이네스에게서 겨우 한 걸음을 남겨 두고 멈춰 섰다. 그보다 조금 더 큰 내가 내려다보자 그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왜 안 도와줬어?”
카이네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손을 잡아당겼다.
“일단 다른 곳으로 가요.”
“그래, 가자.”
카이네스도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조금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카이네스가 도착한 곳은 페이시아 공작저의 어느 한 곳이었다.
“여기는 어디야?”
“……이상한 질문을 하시네요. 모르는 것처럼.”
진짜 모르는데?
하지만 원작 속 에스타는 알고 있겠지.
제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다는 듯 카이네스의 눈썹이 구겨졌다.
“제 개인 연무장이에요.”
어쩐지 휑하더라니. 모랫바닥밖에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만, 연무장이었다.
베일리 가문에 비해서 너무 단출해 보여 차마 연무장이라고 생각지 못한 건데.
공작가면 공작가답게 더 화려하고 웅장하라고!
“……알고 있어.”
뒤늦게 아는 척했지만, 카이네스의 구겨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뙤약볕 아래에서 바라본 카이네스의 얼굴은 첫 만남보다 순진한 구석이 사라졌었다.
도전적이고 불량스러워 보이는 얼굴. 이게 진짜 카이네스의 얼굴 같았다.
‘우리 남주님은 이럴 때도 잘생겼네.’
19금 피폐 남자 주인공 같은 모멘트에 내 심장이 눈치 없이 두근거렸다.
살짝 붉어진 얼굴에 시선을 피했더니 돌연 카이네스가 억울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스타야말로 왜 그랬어요?”
“뭐가?”
“제가 이상한 힘이 있다는 거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이상한 힘? 마법 말하는 건가?
카이네스는 제가 가진 힘이 마법이고 엄청나게 대단한 거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아직 제국에 알려진 바가 없으니 당연했지만.
그래도 이상한 건 아닌데.
카이네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표정에 내가 더 당황스러워졌다.
“약속까지 했으면서. 대가까지 받아 갔으면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에스타예요.”
“야, 약속의 대가라고……?”
“또 모르는 척하시네요.”
카이네스가 세모눈으로 날 째려봤다.
양심이 쿡쿡 찔렸던 난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카이네스가 푹 한숨을 쉬었다.
“약혼자라고 꼭 한 달에 한 번 만나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왜 이런 설명까지 해야 하냐며 투덜거리던 그는 손으로 제 머리칼을 휙휙 휘저었다.
더운 햇볕 때문인지, 카이네스에게 미안해서인지 땀이 주르륵 흘렀다.
뒤늦게 기억이 찾아왔다.
-거래하자. 네가 이상한 힘을 갖고 있다는 걸 비밀로 해 줄게. 대신 한 달에 한 번은 꼭 나를 만나러 와.
살짝 돌은 눈을 한 에스타가 카이네스를 붙들고 늘어졌다. 카이네스는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런 걸 협박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에스타에게 조건까지 걸고 비밀로 지키려고 했던 걸, 어제 가족들 앞에서 다 까발리려고 했다는 거지?
순간 얼굴이 싸악 식었다.
“미안해, 정말…….”
나 편한 생각만 했지 카이네스가 마법을 숨기고 있는 건 차마 알지 못했다.
왜 이놈의 기억은 들쑥날쑥해선!!
진심으로 미안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건 내가 사과해야 맞아.
“미안해. 내가 너무 어린애처럼 굴었어.”
고개를 숙인 상태로도 카이네스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딱딱히 굳어서는 가만히 말을 듣고 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그…… 약속을 깬 건 나니까 이제 거래를 없던 일로 하자.”
사과를 마치고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이자 카이네스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정확히는 불만스러워 보인달까?
‘내가 웃는 게 그렇게 불만이니?’
아직 마음이 다 풀린 게 아닌가? 그에게는 예민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미안한 마음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카이네스가 불만 섞인 눈으로 나 빤히 쳐다봤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카이네스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냥 빤히 쳐다만 볼 뿐.
어색해 숨이 턱턱 막혔다.
“……그만 돌아갈게.”
눈에 보이는 것조차 거슬리는 걸지도 몰라.
내가 에스타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오해였지만, 그는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관심받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그건 끔찍했다.
이제 정말 내 목숨 줄을 쥔 것은 카이네스였으니까. 더 잘 보여야 하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기가 푹 죽어 뒤돌아섰다.
“제가 어떻게 믿죠?”
카이네스가 날 붙잡고는 물었다.
“엉?”
뒤돌아서니 카이네스는 스스로 손을 잡았단 사실에 놀라 팩 놓았다.
허허, 이 어린놈이.
손이 아릴 정도로 던질 줄이야.
하지만 지은 죄가 있어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그냥 방긋 웃어 주었다.
그러자 불만스럽던 카이네스의 눈이 더 구겨졌다.
“누님이 또 저를 속일 수도 있는데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만나주지 않았다고 제 비밀을 폭로하고 다니시기라도 하면요?”
“안 그런다니까.”
카이네스는 내 말을 못 믿는 듯했다.
하긴, 나 같아도 안 믿을 것 같다.
난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다시 거래할까? 이번에는 네가 매달 나를 치료해 주는 대신, 난 너를 귀찮게 굴지 않는 걸로.”
“…이전과 뭐가 다릅니까?”
말하고 나니 비슷한 내용이긴 했다.
“더는 협박이 아닌 게 달라졌지. 강요하지 않아. 선택권이 너에게 있는걸.”
날 죽일 심산인 햇볕이 머리 위를 강하게 내리쬐었다. 카이네스마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눈이 부신 모양이다.
조심히 양손을 들어 햇볕을 가려주었다.
“더워, 햇볕은 너도 싫어하잖아. 더 할 얘기가 있다면 저택에 들어가서 하자.”
카이네스는 의뭉스러운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한참이나 떨어지지 않는 눈빛이 좀 난감했다.
“……왜 그래?”
최대한 차분히 물었다. 더는 카이네스와 엉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왜 그러십니까? 처음에는 단순히 변덕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습니다.”
“……뭐, 뭘?”
“너무 달라졌잖아요.”
……이래서 눈치 빠른 것들이란.
카이네스의 말이 당황스러워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뭐, 뭐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웃긴 소리를 들은 듯 크게 웃었다.
“하하! 너 엄청 웃긴 소릴 하는구나?”
연기는 처음이라 좀 과했던 걸까?
정신을 차리니 카이네스의 등을 손바닥으로 치고 있었다.
어머머.
화들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기분이 상한 건 아니겠지?
카이네스는 놀란 것 같았으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휴…….
가슴을 쓸어내리며 변명했다.
“사람은 원래 자라면서 달라지는 거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손까지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카이네스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에스타에게 얼마나 피해를 봤으면 겨우 열세 살짜리가 이런 눈을 하는 걸까…….
내가 다 미안하네.
괜히 마음이 찡해져 카이네스의 양손을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너를 더는 좋아하지 않아. 따라다니지 않을 거고, 귀찮게 굴지도 않을게……. 그러니 가끔 생각나면 와서 치료 좀 해 줘.”
은근슬쩍 본심을 얹어 진지하게 말했다.
카이네스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카이네스는 묘하게 찝찝한 얼굴로 날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습니까?”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물은 질문이었다. 이게 그렇게나 궁금했던 걸까?
“늘 쫓아다니고 괴롭히고 하지 말라 할 때는 곧 죽을 것처럼 굴더니 하루아침에 달라지셨다고요.”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아뇨, 에스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카이네스의 눈썹에 미묘한 실금이 갔다.
“에스타니까요.”
에스타가 단 한 번이라도 카이네스를 싫어한 적 없었겠지.
목숨 같은 아이인데 멀어지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카이네스가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난 에스타가 아닌걸.
내가 달라졌기에 카이네스는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는 아냐.”
단호하게 말하자 카이네스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겠죠.”
카이네스는 살벌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페이시아 공작저로 돌아갔다.
……왜 화가 났지?
화가 날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리벙벙한 눈으로 카이네스를 쳐다보다가 멋쩍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까칠한 열세 살은 대하기 너무 어려웠다. 사춘기인가?
“제안 받아들인 거로 안다?”
이미 멀찍이 걸어가는 카이네스의 등에 대고 소리쳤지만 답이 없었다.
다음 달, 늘 만나던 날에 찾아온 카이네스를 보고서야 ‘아, 받아들인 거구나.’하고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