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카이네스가 왜 화가 났을까?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 약혼 때문에 그런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혜안에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쳤다.
그럴 법했다. 카이네스라면 에스타와 엮이는 것 자체로도 질겁하니까.
‘파혼도 하지 않았으면서 안 좋아한다니요! 어불성설입니다!’ 뭐 그런 건가?
‘하지만 그건 알아서 파기될 텐데…….’
이제 목숨 걱정해야 할 판에 카이네스와 파혼할 궁리까지 하기는 귀찮았다.
어차피 성인이 되면 파혼하게 될 테니까.
괜히 찾아가서 따진 탓에 카이네스의 기분이 너무 상하지만 않기를 바랐다.
그의 손아귀에 내 목숨 줄이 잡혔다니.
“에스타로 사는 건 참 힘들구나…….”
날 도와줄 다른 마법사를 찾을 때까지 남주님의 비위를 잘 맞춰 살아 봐야겠다.
곰곰이 카이네스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생각하던 중, 저 멀리 베일리 가문의 마차가 정원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마차에서 내리는 길쭉한 기럭지의 장본인.
서, 설마……!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휘며 웃는 잘생긴 남자는 베일리 가문의 첫째, 페뷰어 오라버니였다.
“에스타.”
어머, 어머!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잖아!
분명 아버지도 잘생겼고, 어머니도 예쁘시고, 제뉴어, 메이어 오라버니도 눈알 빠지게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두 분은 부모님, 두 명은 아직 미성년자였다.
페뷰어 오라버니는 완벽한 남주상을 가진 남자였다.
각진 어깨, 떡 벌어진 가슴, 태평양 같은 등, 단단한 근육이 감싼 몸, 마차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키!
완벽한 몸의 소유자가 얼굴까지 잘생겼다.
베일리 가문 특유의 순한 눈매에 굉장히 깨끗한 피부를 가졌고, 촉촉해 보이는 입술까지 완벽하다.
게다가 햇볕 밑에서 보는 찬란한 금발이라니…….
시, 신인가요……? 내 눈앞에 남신이 재림했다!
“으, 으악!”
너무 놀라 비명을 질러 버리자, 페뷰어 오라버니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는 단번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렇게나 홀리한 미남이라니.
장신이라는 건 보자마자 알았지만, 코앞에 서니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다.
“어디 아픈 거니?”
오라버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이마를 짚었다.
코, 코피가 날 것 같아……!
내가 미남에 취약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코가 시큰거리는 탓에 급하게 손으로 코를 틀어막자 페뷰어 오라버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오라버니를 만난 것이 너무 기뻐서요.”
“정말 오랜만이구나.”
페뷰어 오라버니는 바보 같을 정도로 환히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한쪽 팔로 번쩍 나를 안아 들고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페, 페뷰어 오라버니!”
품에 안긴 것은 좋았으나 이 자세는 무척 수치스러웠다.
몸은 열다섯일지 몰라도 몸 안에는 속이 새까만 성인 여자가 들어 있다고요……!
“내, 내려 주세요, 오라버니!”
“오랜만에 안아 주고 싶어서 그래. 불편하니?”
예쁜 말투, 잘생긴 얼굴, 아픈 여동생을 보러 단번에 달려오는 다정함까지.
지, 진짜가 나타났다……!!
“저 커서 오라버니와 결혼할래요.”
페뷰어 오라버니는 내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뉴어가 달라졌다더니 진짜구나.”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낮게 쿡쿡거리며 웃는다.
어머, 웃는 얼굴도 잘생겼어.
“네, 저는 다시 태어났어요. 크면 오라버니와 결혼할래요.”
“그래, 그러자.”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약속을 받아 냈다. 그때마다 오라버니는 그러자고 약속했다.
하지 못한다는 건 21세기 현대인인 내가 제일 잘 알았지만, 대리 만족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진달까.
“너, 너무 잘생겼어…….”
페뷰어 오라버니 품을 비집고 들어가 안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렇게 새까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페뷰어 오라버니는 그저 예쁘다는 듯 안아 줄 뿐이었다.
* * *
“왜 하필 꼬맹이 몸에 빙의해서 이 고생이냐고……”
소설에 들어왔으면 자고로 현실에 없는 멋진 남자랑 심장 떨리는 연애를 한번 찐하게 해 봐야 하는 거 아냐?
눈에 보이는 거라곤 다 코흘리개 아기들뿐이다.
망할!
심지어 몸이 안 좋아서 외출도 어렵다.
연애는 꿈도 못 꾼다는 소리다.
“그 전에 나랑 연애할 사람은 있을까?”
명색에 페이시아 공작가의 하나뿐인 아들, 카이네스의 약혼녀인데.
……망했는데?
파혼하기 전까지 멀쩡한 연애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파혼하면 카이네스가 굳이 나를 치료하러 와 줄까?
으으…… 목숨이냐, 연애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일단 살고 봐야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라버니!”
“일찍 일어났구나.”
환히 웃는 얼굴이 아침 태양보다 밝구나.
내가 이렇게 남자 얼굴을 밝히는 여잔 줄 몰랐다.
페뷰어 오라버니를 따라 비실비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아, 살맛 난다.’
페뷰어 오라버니는 까만 제 속도 모르고 그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더, 더……!
순간 눈에 옅은 광기가 스쳤지만, 페뷰어 오라버니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가증스럽게 씩 웃으며 대꾸했다.
“이른 아침 기상은 레이디의 기본 소양이죠.”
그 소리에 옆에 서 있던 엘리가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서 언제 일찍 일어나셨죠? 오후 열두 시가 언제부터 이른 아침이었죠?’
엘리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엘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페뷰어 오라버니의 찬란한 얼굴만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침부터 오라버니를 볼 수 있다니, 저는 정말 행복해요.”
어떻게 방금 일어난 얼굴도 잘생겼지?
살짝 삐친 머리칼이 잘생긴 얼굴을 만나니 귀엽기만 하다. 부드러운 눈꼬리와 짙은 눈썹, 뚜렷한 이목구비에 오뚝한 코, 치명적인 붉은 입술.
어떻게 보나 소설 속 남주상이 분명했다.
왜 페뷰어 오라버니가 주인공이 아닌 거지?
페뷰어 오라버니가 주인공이었다면 스테디셀러 각인데.
아쉽게 입맛을 다시자, 페뷰어 오라버니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어머.
“말도 예쁘게 하고. 이제 정말 철이 들었구나.”
“헤헤. 언제 돌아가세요?”
“금세 갔으면 좋겠니?”
“아뇨? 계속 곁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러고 싶어.”
헤벌쭉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페뷰어 오라버니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식당으로 내려가던 중, 중앙 계단에서 제뉴어 오라버니와 마주쳤다.
계단을 내려오고 있던 제뉴어 오라버니는 페뷰어 오라버니와 사이좋게 손을 잡은 걸 보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얼씨구.”
“제뉴어. 형과 동생을 봤으면 인사를 똑바로 해야지.”
와……. 카리스마까지 있어.
여동생 에스타에게는 부드러운 모습만 보였지만 베일리 가문의 첫째 아들의 위엄도 갖추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하자 제뉴어 오라버니가 그제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형님.”
페뷰어 오라버니가 인사를 받아 주었다. 저보다 다섯 살은 어린 동생이 귀여운지 눈에는 다정함을 묻히고는.
“요즘 수도는 어때?”
“비슷해. 최근 들어 외곽 지형에 문제가 좀 생기긴 했지만, 금방 잠잠해지겠지.”
“또 출병하는 건 아니지?”
“…….”
“다음은 내 차례야. 알지? 저번에 약속했잖아.”
“출병할 일 없게 할 거다. 너는 걱정하지 말고 가족들이나 잘 지켜.”
어머머, 뭐야.
둘의 형제애에 눈을 반짝였다. 투덜거리며 형을 걱정하는 제뉴어와 그런 동생이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 페뷰어.
둘의 외모에 놀라 어버버 소리를 내며 구경하던 중, 페뷰어 오라버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에스타 앞에서 괜한 소릴 했구나.”
“넌 신경 쓰지 마.”
뭔 얘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두 사람의 얼굴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걱정 안 해요.”
속 편한 소리에 두 오라버니는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왜 둘이 죽을까 봐 걱정해?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원작에서 죽은 건 에스타 단 한 명이었으니까.
* * *
식사를 마치고 페뷰어 오라버니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러 나섰다. 오라버니는 곧 수도로 돌아가야 해서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 오늘뿐이라고 했다.
“아쉬워요.”
“나도 아쉽구나.”
“오라버니는 수도에서 무슨 일을 하세요?”
“재무부에서 일하고 있어.”
재무부?
문득 소설 속 쓰레기 서브남이었던 황태자도 재무부에서 일을 배웠다는 게 떠올랐다.
“그럼 황태자님도 일하고 계세요?”
“그렇지.”
왜 하필이면 그 쓰레기 밑에서!
순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니?”
“그…… 오라버니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그만….”
“하하. 우리 에스타가 못 본 새 애교가 많이 늘었구나.”
이런 모습까지 좋게 봐주시다니.
부끄러워서 볼이 살짝 붉어진 것도 잠시, 오라버니가 걱정되었다.
황태자는 소설 내에서 알아주는 쓰레기 캐릭터였고, 워커 홀릭이었다.
일에 미쳐서 여주까지 이용해 먹으려고 한 자인데 그런 놈 밑에서 일하고 있다니….
“오라버니, 혹시 상사분께서 괴롭히시면 꼭 저한테 알려 주세요! 제가 대신 혼내 드릴게요!”
양손까지 불끈 쥐자 오라버니는 고맙다는 듯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셨다. 그 손길이 좋아 배시시 웃음이 터졌다.
우리 오라버니 울리기만 해 봐. 다 죽었어.
그 뒤, 오라버니는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재밌는 오페라 공연이 곧 영지에 내려올 거란 얘기를 하며 같이 가자고 약속했다.
“좋아요!”
얼굴만 보고 있는 것도 좋았지만.
뒷말을 속으로 쑥 삼키며 환히 웃었다.
페뷰어 오라버니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자 의도치 않게 자꾸 페이시아 공작저가 눈에 아른거렸다.
“요즘 카이네스와 사이는 어떻니?”
“사이야 똑같죠.”
“이제 그만 좋아하기로 했다면서.”
“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칼처럼 깨끗이 자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힘들겠구나.”
페뷰어 오라버니가 안쓰러운 눈으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힘들기는요. 오라버니가 곁에 있으면 하나도 힘들지 않을 거 같아요.
눈을 반짝이며 잡은 손을 꼭 붙들었다.
“오라버니, 저 파혼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