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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1/83)

10화

“……진심이니?”

오라버니는 화들짝 놀라서는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맞췄다.

“너무 갑작스럽지 않겠니?”

“그렇긴 한데, 계속 붙들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이만 각자의 인생을 살아야죠.”

“그…….”

페뷰어 오라버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귀족들의 약혼과 결혼에 애정만 엮이는 게 아니다. 심지어 결혼할 사이에 애정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카이네스와 에스타 사이가 아무리 나빠도 크면 당연히 결혼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가족들은 소공작인 카이네스가 불편해하니 에스타를 자제시키는 것 같고.

그 와중에 당사자인 내가 먼저 파혼을 말하니 당황스러운 것 같다.

“전 진짜 깔끔하게 정리했어요. 카이네스와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걸요.”

“그래……. 좋은 친구도 좋지…….”

“페뷰어 오라버니에게 제일 먼저 말한 거예요!”

나름 짓궂게 웃으며 말하자 페뷰어 오라버니의 눈이 처연하게 내려앉았다. 안쓰러워하는 모습이 선명했다.

혹시 공작가와의 연이 끊어지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는 걸까?

페뷰어 오라버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걱정됐다.

“혹시 몸이 많이 안 좋은 거니? 그래서 걱정돼서…… 헤어지려는 건 아니지?”

역시 홀리한 사람.

속물적인 고민을 한 내가 부끄러웠다.

페뷰어 오라버니의 걱정 가득한 눈동자에 권력, 속세, 욕망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걱정이요?”

설마 카이네스의 약혼녀가 죽으면 좋지 않을 꼬리표가 달릴 걸 에스타가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페뷰어 오라버니는 생각보다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내가 카이네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아직 믿지 못했다.

“진짜 안 좋아해요. 몸은 앞으로 나아질 거예요.”

“그래. 네가 확신하고 있으니 더는 말하지 않을게. 네 선택이 우선이니까.”

페뷰어 오라버니는 어설프게 웃으며 내 볼을 쿡 찌르셨다. 정말 귀여운 여동생 취급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미리 언질을 드리마.”

* * *

현실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카이네스와의 약혼은 빨리 깨면 깰수록 모두에게 좋았다.

카이네스는 싫어하는 나와 엮일 일이 사라지고, 훗날 여주인공과의 만남에도 문제가 없겠지.

나는 그를 좋아한다는 오해를 더 이상 받지 않을 것이고, 치료도 편히 받을 수 있었다. 운 좋으면 마력을 다루는 법도 배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직은 나이가 어렸으니, 파혼한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태중 약혼이 끝까지 이어지는 사례는 거의 없었으니까.

“그래, 하자.”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오히려 안 하면 손해인 일이었다.

특히 며칠 전 카이네스를 봤을 때, 파혼하지 못해서 무척 아쉬워했으니 이 얘기를 해 주면 무척 좋아할 것이다.

“언제 오려나.”

오늘은 그가 오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건만 예정된 날이 다가오자 카이네스가 방문하겠다고 시종을 통해 알렸다.

카이네스는 여전히 내가 진심으로 말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면 파혼하자고 얘기해 줘야지. 그럼 좋아하겠지?

히죽거리며 웃자, 케이크를 준비하던 엘리가 덩달아서 피식 웃었다.

“카이네스 소공작님을 뵙는 게 그렇게 좋으세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기는요. 얼굴에서 다 티 나세요!”

하하 웃던 엘리는 케이크를 내려놓고 홍차를 가져오겠다며 도로 나가 버렸다.

“오해인데…….”

오히려 파혼한다는 생각에 설렌 건데. 단단히 착각한 것 같다.

오랜 시간 동안 짝사랑했으니 더 이상 그를 안 좋아한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뭐 상관은 없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났을 때, 문을 두드리는 앙증맞은 소리가 들렸다.

필히 남주님이 방문한 거다.

“남주…… 아니, 카이네스?”

그임을 확신하고 문을 열었더니 정말 카이네스가 문밖에 서 있었다. 늘 들고 오던 책은 어디에다 뒀는지 오늘따라 옆구리가 휑했다.

“오늘은 책 안 들고 왔네?”

“책을 다 읽어서요.”

“그래?”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카이네스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역시나 카이네스는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조각 케이크에 시선을 두었다.

그렇게 좋니?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여러 종류의 조각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그에게 살짝 밀어 주었다.

“특별히 준비했어. 주방장 특제 케이크.”

“…….”

카이네스는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포크를 들었다. 한참이나 먹을지 말지 고민하던 카이네스를 보며 가만히 기다렸다.

거참, 의심 많네!

“내가 먼저 먹을게.”

내가 먼저 한입 푹 떠서 먹었다. 내가 고른 생크림 케이크의 맛은 시트가 아주 폭신해 구름을 씹는 것 같았고, 생크림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입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부드러운 생크림을 위해 희생된 주방장의 팔이 걱정될 만큼의 맛이었다.

카이네스는 그제야 안심하고는 입에 떠 넣었다. 괜히 마음을 졸이며 조심스레 먹는 그를 쳐다보았다.

볼을 귀엽게 움직이는 카이네스를 보며 물었다.

“맛있지?”

카이네스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살짝 달아오른 귓가는 숨기지 못했다.

귀엽기는.

“다 먹어. 모자라면 말하고.”

카이네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포크질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잘 먹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대?

페이시아의 후계라는 이유로 왜 참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카이네스도 카이네스만의 사정이 있겠지.

조용히 카이네스가 케이크를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카이네스는 마치 익숙하다는 듯 쳐다보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이네스, 나 할 말이 있는데.”

그제야 카이네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케이크에서 처음으로 남주님의 시선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하세요.”

입 안에 있던 걸 꿀꺽 삼킨 그가 말했다.

“우리 파혼하자.”

“…….”

카이네스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들고 있던 포크를 얼마나 꼭 쥔 건지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고작 열세 살, 열다섯 살이 나누는 대화 주제가 파혼이라는 사실이 웃겼는데 카이네스의 입장은 다른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놀랄 줄이야.

“카이네스?”

걱정스레 묻자 카이네스의 얼굴이 차분해지며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놀랄 정도의 변화였다.

“왜 그렇게 놀라?”

“놀란 적 없습니다.”

그럼 바닥에 떨어뜨린 저 포크는 뭔데.

바닥에 쓸쓸히 누워 있는 포크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카이네스는 계속 무표정이었다.

“네가 싫어하니까 더는 괴롭히기 싫어. 오늘도 억지로 온 거잖아.”

“…….”

카이네스는 빈말로라도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파혼하면 좋은 친구로 돌아갈 수 있어. 오래 봤으니까.”

가끔 마력으로 치료해 주는.

뒷말을 꿀꺽 삼키곤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속 보이는 말이 아닌가 싶어 민망해졌다.

좋은 친구라는 말에 그의 눈동자가 더 싸늘해졌다. 무척 의외였다.

역시 에스타와는 친구조차 싫은 건가?

빙의한 지 한 달 차, 벌써 목숨이 위태로운 듯했다.

그가 아니면 당장 넘쳐나는 마력을 어떻게 잠재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네, 네 의견을 존중할게!”

덜컥 겁이 나서 소리치자, 카이네스가 빤히 날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속셈이냐는 듯.

첫날 마주했던 눈처럼 의아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거짓말 아니었습니까?”

“아직도 그 소리야? 파혼하자는 게 거짓말 같아?”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사람들이 믿어 줄까? 내가 더는 남주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네가 잘생기고 멋지고, 귀엽고 예쁜 건 사실이지만, 더는 좋아하지 않아.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남주님일 뿐. 그 남주님이 예쁘게 보이는 거야 사실이지만 딱 그뿐이었다.

내 게 아닌데.

카이네스는 충격받은 얼굴로 날 쳐다봤다.

마치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목격한 듯한 눈이었다.

“…파혼하겠습니다.”

빤히 쳐다보던 카이네스는 생각을 모두 정리했는지 곧 대답했다.

“진심인 것도 잘 알았습니다.”

역시 열세 살치고 너무 성숙하다. 피폐물 남주라서 떡잎부터 다른 건가?

단 거 좋아하는 걸 보면 애 같긴 한데. 이럴 때면 도무지 열세 살처럼 보이지 않았다.

“으응…….”

어눌하게 대답하자 카이네스가 싸늘한 눈으로 쓱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도착한 지 겨우 십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화도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저기 카이네스, 진짜 헛소리라는 거 아는데……. 혹시 화났어?”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찜찜했다. 오늘 굳이 찾아왔다는 건 그 나름대로 생각해 줬다는 건데, 내가 먼저 파혼 얘기를 꺼내서 공작가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것일까?

“난 네가 파혼하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제가 언제 파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까?”

온몸으로 그러지 않았니……?

만나러 와서는 책만 보고, 대화를 이어 갈 생각도 없었으며, 가끔 적선하듯 치료해 주었잖아.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지만!

에스타의 행동에 질린 것처럼 보여서 이제 그만 만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는 건데, 왜 이렇게 날카롭게 구는지 모르겠다.

“아니었어?”

“제 대답이 필요합니까? 에스타의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그는 차가운 대답만 남긴 채 내 손을 뿌리치고 방을 나가 버렸다.

“역시 열세 살은 대하기 어렵다, 어려워.”

역시 사춘긴가?

카이네스와 틀어지면 안 되는데. 내겐 그의 마력이 꼭 필요했다. 성인이 되기 전에 몸이 터져서 죽지 않으려면 말이야.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에 드니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걸 어떡하면 좋지?”

아무래도 카이네스에게 미움받아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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