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카이네스는 자신이 화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왜 화가 났는지는 몰랐다.
에스타가 더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도 전부 거짓말인 줄 알았다. 여태껏 그래 왔듯 자신의 관심을 받기 위해 한 거짓말인 줄 알았으니까.
거짓말로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걸 알면 평소대로 돌아올 줄 알았다.
그래서 더 눈길을 주지 않고, 피해 다녔다.
‘그런데….’
마음이 빈 것 같은 이상한 상실감이 들었다.
아마도 늘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에스타가 말도 없이 떠나 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이겠지.
카이네스는 이상하게 마음이 욱신거렸다. 짜증이 솟구치고, 열이 났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를 감정이 소용돌이가 되어 마음속에 불어닥쳤다.
“하아…….”
도망치듯 공작저로 향하던 길, 공작저와 백작저를 나누는 경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 앞에 도착하자마자 깊게 눌렀던 한숨이 툭 튀어나왔다.
며칠 전 여기서 에스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평소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나름 기뻤었는데.
그건 순전히 착각이었다. 에스타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얼굴로 파혼을 요구했다.
평소에는 자신도 파혼을 바란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적어도 에스타는 자신을 좋아해야 했다.
못된 심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카이네스는 책 대신 품속에 넣어 두었던 오페라 연극 표 두 장을 꺼냈다.
오늘 백작저로 향할 때만 해도 에스타에게 주며 할 말까지 연습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는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가 된 표를 갈가리 찢은 뒤 미련 없이 버렸다.
* * *
파혼 얘기는 빠르게 퍼졌다. 이미 카이네스와 페뷰어 오라버니에게 뱉어 버린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결국 아버지의 호출이 있었다.
“왔니.”
서재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홍차를 찻잔에 따르고 계셨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문 닫고 들어와 여기 앉으렴.”
차분하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았다. 괜히 긴장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의자를 빼 조심스럽게 앉아서는 아버지의 눈치를 봤다.
페뷰어 오라버니는 수도로 돌아가기 전날 찾아와 아버지께 잘 말했다고 했다.
오라버니는 파혼을 응원한다고 했지만, 백작인 아버지의 입장은 다를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 딱히 재능 없는 딸이 가문을 드높일 일은 결혼밖에 없을 텐데, 에스타에게 카이네스보다 좋은 결혼 상대가 있을 리가 없다.
“저기, 아버지……. 저 파혼하고 싶어요.”
그래서 먼저 선수 쳤다.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도 못하게.
“카이네스에 대한 마음은 접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서요. 저는 아직 어리고, 카이네스도 어려요. 서로에게 더 잘 맞는 짝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조금 놀란 얼굴로 들고 있던 홍차를 내려놓고는 수심 깊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셨다.
“진심이니?”
그게 다인가?
변명을 길게 한 나와 달리 너무 짤막한 대답에 살짝 얼이 나갔다. 하지만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그거면 됐지.”
“……네?”
“네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구나.”
아버지는 홍차를 가볍게 머금으며 여상한 얼굴로 대꾸했다.
너무 태연한 목소리라 되레 내가 당황스러웠다.
조금은 반대하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할 타이밍 아닌가?
어린 딸의 선택을 이렇게나 존중해 준다고?
오히려 의아해져서는 물었다.
“왜 안 말리세요?”
“내가 말리길 바라니?”
아버지는 뜬금없는 소릴 들었다는 듯 픽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으셨다.
호쾌한 웃음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네가 행복하고,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게 나의 의무란다.”
아버지는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시며 웃으셨다. 멋진 미소라고 생각했지만, 이 모습이 아픈 에스타를 위한 모습이라는 걸 알았다.
부모님은 정말 에스타가 무슨 사고를 쳐도, 아프지만 않기를 바라는 거였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이였으니 더더욱 잘 대해 주고 싶었던 걸까?
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카이네스였다. 카이네스와 잘 지내야 했기에 파혼해야 했다.
“그동안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괜찮단다.”
가문끼리의 약속인 파혼을 깨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심지어 여긴 계급 사회 아니었던가.
우리 집은 백작가, 카이네스 가문은 공작가였다. 우리 가문 쪽에서 파혼을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픈 딸의 선택을 존중하기 위해 리스크를 감수하는 쪽을 선택했다.
울컥 감정이 치솟아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 정말 좋은 딸이 될게요.”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말하자 아버지가 내 눈가를 조심스레 쓸어 주었다. 손가락은 부드럽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못나도 괜찮아.”
이런 말을 해 주는 아버지가 또 어디 있다고.
“아빠!”
벌떡 일어나 아빠의 품 안에 안겨 펑펑 울어 버렸다.
몸속의 성인은 어디로 가고 어린아이의 몸에 동화된 것처럼.
* * *
아, 쪽팔려.
그다음 날 아침부터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현실적인 문제가 찾아왔다. 그렇게 펑펑 울며 눈물 콧물 빼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며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당분간 방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문제는 내가 ‘아프다’라는 핑계를 댔다는 것이었다.
“아프다고? 뭘 했다고 그래? 최근 운동도 쉬었잖아? 혹시 밤에 잠 안 자고 몰래 다른 거 해?”
제뉴어 오라버니가 찾아와서는 핀잔을 주지 않나.
“……방에만 있는 건 좋지 못해. 산책하고 싶으면 불러. 같이 가 줄 테니까.”
조용한 메이어 오라버니까지 찾아와 산책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평소에는 아프다고 말도 안 하던 네가 아프다니……. 이 어미가 미안해…….”
아뇨,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꾀병이에요.
어머니까지 연달아 찾아오니 죄책감이 쿡쿡 심장을 찔렀다.
아, 나 글러 먹었네.
아프다는 핑계를 지키기 위해 이틀 동안 방에 틀어막혀 보내던 중, 더 이상 있다가는 베일리 가문 사람들 애간장이 다 녹을 거 같아 외출에 나섰다.
세상 사람들! 저 다 나았어요!
대놓고 보란 듯이 화려하게 치장하고 겨우 집 앞마당에 나왔다. 그 뒤를 엘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따라왔다.
일부러 아버지의 서재 창가 쪽을 어슬렁거렸다. 저기에서 충분히 보이겠지?
더는 괜찮냐는 소릴 누구에게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집안사람들은 과해.
하루만 더 누워 있다간 페뷰어 오라버니까지 부를 것 같았다. 물론 페뷰어 오라버니의 용안을 보는 건 좋았지만, 좋은 일로 봤을 때만이다.
그 얼굴이 울상이 되는 걸 볼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뭐 해?”
아버지의 서재 밑을 어슬렁거리던 중, 연무장으로 향하던 제뉴어 오라버니와 마주쳤다.
“산책이요. 요즘 너무 방에만 있었더니 몸이 뻐근해서요.”
“뻐근하면 연무장으로 오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둘러댔다. 운동하는 건 좋았다. 몸을 쓰는 것도 이제는 꽤 좋아한다.
하지만 아프다고 했는데 당장 연무장으로 달려가면 꾀병이었던 게 너무 티가 나니까.
“다음에요.”
“그래?”
제뉴어 오라버니는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몸은 괜찮아? 아직 아픈 건가?”
“괜찮아졌어요.”
“아프다는 건 골치 아프네.”
마치 한 번도 아파 보지 않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아, 그런 건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남주 버프. 체력이 좋고, 감기는커녕 팔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을 타격에도 끄떡없고, 삼 층에서 떨어져도 멀쩡히 착지하는 그런 인외 존재들.
베일리 가문 사람들은 서브임에도 가지고 있나 보다. 부럽게스리.
“튼튼한 게 좋은 거죠.”
“내가 튼튼하게 만들어 줄게. 다 나으면 연무장으로 와.”
씩 웃는 제뉴어 오라버니를 두 눈에 가득 담았다.
확실히 잘생겼다. 하지만 정석 미남과는 결이 다르다. 살갗은 햇볕에 타서 매우 어두웠지만, 건강해 보였다.
페뷰어 오라버니와 비교했을 때 아직은 키가 작았지만, 앞으로 더 클 것이다. 애초에 아버지부터 엄청난 장신이니까.
검을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검을 잡았다는 제뉴어 오라버니는 벌써 탄탄한 마른 근육을 소지하고 있었다.
“너 눈이 왜 그 모양이야?”
“……네?”
“흐리멍덩하잖아. 여전히 아픈 거야?”
앗. 딴생각하고 있단 걸 바로 들켜 버렸다.
놀라서 어버버거리던 중, 오라버니가 한 발 다가와 내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열이 나나? 나랑 비슷한데?”
다른 손을 자신의 이마에 얹고는 중얼거리는 모습이라니.
이쪽도 페뷰어 오라버니 만만찮게 시스콤이다.
내가 여동생이라 괜찮지만!
그때 살짝 위를 바라보니 아버지가 창문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들과 딸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며 무척 흡족한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계셨다.
임무 완료! 이제 방으로 돌아가도 된다.
“오라버니, 저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요. 운동은 내일부터 해요.”
“그래.”
오라버니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장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오라버니가 의미 모를 소리를 건넸다.
“카이네스가 찾아가지 않았어?”
“카이네스가 매달 한 번씩 오잖아요.”
“그럼 뭘 주지는 않았어?”
“아무것도 안 줬는데요……?”
“그래?”
오라버니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뭐야, 궁금하게…….
뒤돌아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오라버니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 자식 왜 연무장에 안 오는 거야? 심심하게.”
내 발걸음이 뚝 멈추고 말았다.
“안 와요? 카이네스가?”
제뉴어 오라버니만큼이나 검을 좋아하는 아이인데?
“뭔 일 있는 거 아닐까?”
여상하게 대답한 제뉴어 오라버니는 ‘난 간다.’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나만 머릿속에 온갖 고민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왜 안 오는 건데?
파혼 얘기를 꺼낸 직후라 그런지, 내 탓이 아닐까 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