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검술 훈련장을 찾았다. 오라버니가 또 연무장 오십 바퀴를 뛰라고 할까 봐 절로 긴장됐다.
그런데 제뉴어 오라버니는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했다.
“널 위해 새로운 운동 계획을 짰어!”
자랑스럽게 말하는 모습에 손뼉을 짝짝 쳤다.
다행이다. 오십 바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오라버니는 아픈 여동생의 체력을 미처 감안하지 못했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하셨다.
“평소에 카이네스 뒤를 따라 뛰어다니는 것만 봐서 그렇게 약한 줄 몰랐어.”
“하하…….”
어쩐지. 어디서 오십 바퀴를 뛰라는 말이 나왔나 했더니.
오라버니는 새로운 계획이 마음에 드는지 뿌듯한 얼굴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연무장 다섯 바퀴를 걸으라고요?”
갑자기 십 분의 일로 동강 난 바퀴 수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오십 바퀴는 과했지만, 다섯 바퀴는 너무 적다.
연무장이 저택 정원만 한 것도 아니고, 다섯 바퀴를 걸으면 십 분도 안 돼서 끝날 게 분명했다.
“아프니까. 천천히 늘려 나가는 게 좋다고 그랬어.”
끝말이 의아해서 오라버니에게 물었다.
“누구에게 물어보셨어요?”
“카이네스한테. 운동 처음 하는 사람이 갑자기 뛰면 위험하다고 하더라. 새로 계획표 짜는 것도 도와줬어.”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게다가 카이네스가 도왔다니.
“이제 무리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
제뉴어 오라버니는 평소 틱틱거리는 것답지 않게 볼을 붉혔다.
사실 오늘 연무장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제 오라버니가 흘리듯 한 말이 자꾸 날 괴롭히고 있었다.
“그럼 걸을까요?”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그 옆길을 뛸 줄 알았던 오라버니는 어쩐지 나와 함께 걷고 있었다.
“……이러면 오라버니는 훈련이 안 되지 않나요?”
“난 다른 시간에도 훈련하니까 괜찮아.”
그럼 굳이 지금 같이하는 이유는 뭔데요?
눈을 말똥히 뜨고는 오라버니는 빤히 쳐다보았다. 왜 지금 걷냐고 대놓고 묻지 않았지만, 의미는 선명히 전해졌는지 오라버니의 볼이 점점 붉어졌다.
“……너,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역시 제뉴어 오라버니는 놀려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능글맞은 주제에 대놓고 물으면 볼을 붉히는 이유가 뭘까?
쿡쿡거리며 웃고는 모른 척해 주었다. 식당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날카롭게 굴던 모습이 아직 기억 속에 선명한데, 진짜 꿈만 같았다.
고양이처럼 까칠했었는데.
“오라버니, 물을 게 있어요.”
“뭘?”
“카이네스요. 어디 아픈 걸까요?”
“그 자식이 아프다고? 그럴 리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말이었다.
하긴, 물 마법의 재능을 가진 그는 치유 능력 하나만큼은 타고났다. 어디 아플 리가 없었다.
“그럼 왜 훈련에 오지 않을까요?”
“정말 몰라서 물어?”
“……네?”
제뉴어 오라버니가 슬쩍 날 쳐다보았다. 은근 째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이었다.
“너랑 파혼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여길 어떻게 오겠어.”
“아.”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파혼하면 베일리 가문에 오기도 껄끄럽겠구나.
카이네스는 검술 훈련하는 거 좋아하는데…….
갑자기 휑했던 페이시아 공작저의 연무장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같은 그곳이.
“네가 마음을 접은 건 다행이다만…….”
제뉴어 오라버니는 뒷말을 꾹 눌러 삼켰다.
“힘든 건 아니지?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말해.”
“오라버니도 그 소리 하시네요.”
나도 모르게 키득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어쩜 형제들이 하나같이 다 똑같지?
파혼 소리를 들은 페뷰어 오라버니도 제일 먼저 그 소릴 했다. 힘들지 않냐고.
“저는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네가 괜찮다면 된 거야. 괜한 걱정하지 마. 시간이 지나서 파혼 얘기가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카이네스를 볼 수 있을 거야.”
제뉴어 오라버니 특유의 밝은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라버니도 카이네스를 당분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쓸쓸한 듯했다.
결혼이라는 문제로 엮인다는 건 이런 거구나. 헤어지면 다시 볼 수 없어.
의도치 않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연무장을 걸었다.
다섯 바퀴를 다 채운 이후, 오라버니는 방으로 돌아가려는 나에게 뜬금없이 손을 쑥 내밀었다.
“힘들면 바로 말하겠다고 약속해.”
오라버니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은 뒤에야 웃으며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 모습이 은근 귀여워서 자잘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 * *
나에게는 늘 하는 생활 루틴이 있었다.
늦은 점심에 일어나 빈속에 쓴 약을 먹고, 점심을 먹은 뒤, 한창 뒹굴거리다가 제뉴어 오라버니와 체력 단련을 위해 연무장을 뛰었다.
단련이 끝나면 방으로 돌아와서 씻은 후에 가족들과 저녁을 먹었고, 남은 오후 시간엔 어머니와 수다를 떨거나 아버지의 소소한 업무를 도왔다.
아주 단조로운 일상이었지만, 요즘 다른 한 가지 루틴이 추가되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몰래 방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미리 준비해 둔 숄을 푹 눌러쓰고 방 밖으로 나왔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공작저와 백작저의 경계에 선 나무 앞으로 향했다. 여기라면 혹시나 카이네스가 지나갈 때 말을 걸 수 있었다.
아니, 말을 못 걸어도 좋으니 괜찮다는 것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미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파혼에 좋아하던 검술 훈련도 하지 못하고, 에스타와 약속한 것도 모르고 그의 비밀을 밝히려고 하질 않나. 심지어 그에게 마력을 달라고 계속 부탁했다.
“에휴.”
아무래도 사이좋게 지내는 건 다 글러 먹은 거 같아.
나무에 머리를 박다가 정말 이마가 아파서 손으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만나면 뭐라고 하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가로지른 담장에 달린 철창살 문 너머에 있는 공작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공작저의 큰 문이 열리며 카이네스를 닮은 남자가 나왔다. 그는 공작저의 가주인 페이시아 공작이었다.
카이네스와 쏙 빼닮은 외모는 단연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릿발만큼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감정이라고는 없었다. 그런 점까지 닮아 있었다.
무감각해 보이는 얼굴에 칼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 표정이 없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잘난 외모였다. 분명 눈이 돌아갈 만큼 잘생겨서 평소라면 감탄 섞인 찬사가 튀어나와야 하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에선 적색 경고등이 켜졌다.
위험한 남자다. 그 생각에 머리가 잠식된 듯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검은 머리칼, 까만 눈동자, 검은 재킷을 입은 공작은 이른 아침에 공작저를 나서야 하는 급한 일이 있어 보였다.
마부만이 말고삐를 잡고 공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출한 배웅이었다.
“그만 돌아가.”
얼굴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마부는 고개만 푹 숙인 뒤 말없이 사라졌고, 공작저의 문이 다시 열리며 카이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네스, 이리로 오렴.”
어……?
순간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공작을 향해 걸어가는 카이네스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다리가 불편한 듯 절뚝거리는 몸짓에 순간 마음이 철렁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 저렇게 걷는 거야?
마지막 날만 해도 멀쩡히 걸어서 돌아갔는데. 분명 성난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잘도 걸어갔다.
그런데 왜 절뚝이는 거야…….
놀라서 입을 다물 생각을 못 했다. 카이네스를 불렀던 공작은 무감각한 눈으로 절뚝이는 제 아들을 쳐다봤다.
“내가 했던 말 잘 기억하겠지?”
“…….”
“대답.”
“…….”
카이네스가 대답하지 않고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었다.
딱 두 번이었다. 사춘기 아들이 충분히 할 법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공작은 그 두 번의 짧은 반항도 참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짝!
공작의 솥뚜껑만 한 손이 카이네스의 볼을 무참하게 내리쳤다. 조용한 새벽 정원을 채운 날카로운 소리에 숨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답해야지, 카이네스. 버르장머리 없이 뭐 하는 짓이지.”
공작은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것처럼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카이네스의 눈동자에서 점점 감정이 사라졌다.
“네.”
카이네스에게서 유순한 대답이 나오자 그제야 흡족한 듯 공작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휘었다.
“시킨 대로만 해. 오늘은 영애를 찾아가서 파혼하지 않겠다고만 하면 돼. 네게 미친 그 영애라면 충분히 받아 줄 테니까.”
어째서인지 공작은 파혼을 원치 않아 보였다. 에스타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네.”
카이네스는 불만스러운 듯 손을 꼭 쥐었지만, 반항 한번 하지 않고 고개를 떨궜다.
가녀린 얼굴로 고개를 툭 떨군 것이, 꽃이 생기를 잃고 뚝 꺾인 것처럼 보였다.
“카이네스.”
공작이 카이네스의 어깨를 양손으로 거머쥐곤 힘줘 눌렀다. 성인 남자의 힘에 짓눌린 카이네스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눈빛이라기엔 상당한 괴리가 엿보였다.
“에스타 영애의 입에서 다시 한번 파혼 얘기가 나온다면…….”
공작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이 카이네스의 절뚝이는 다리를 빠르게 훑었을 뿐이다.
“잘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는다.”
“…….”
카이네스의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대답해야지? 똑같은 잘못을 두 번이나 저지르다니 훈육이 부족했니?”
차가운 새벽 공기보다 시린 목소리였다.
공작의 손이 다시 한번 허공 쪽으로 높이 치켜 올랐을 때, 별안간 천둥 같은 목소리가 터졌다.
“아저씨이이이이!!!!!”
그 순간 손을 높게 올렸던 공작도, 곧 맞을 걸 알고 눈을 질끈 감았던 카이네스도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에스타?”
조금 얼이 나간 카이네스의 목소리에 공작이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