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83)

18화

“…….”

말이 씹혔다. 묘하게 어제 상황과 겹쳐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이렇게 말을 씹어?”

“누가 또 에스타 말을 무시했습니까?”

“어. 어젯밤에 누굴 좀 만났는데 그 사람도 내 말을 무시하더라고. 말을 못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범죄 집단에서는 비밀 발설을 위해 언어 장애인을 선호한다지?

그런 케이스일지도 모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카이네스가 눈에 띄게 놀라고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이네스는 방에 갈 때까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미안한데……. 케이크 준비 못 했어. 아직 굽고 있는 중이야. 네가 한 시간이나 일찍 와서…….”

“됐습니다.”

그러고는 늘 앉던 자리에 익숙하게 앉았다.

나도 카이네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기 카이네스, 결혼 말인데…….”

“결혼이라면 생각 없습니다.”

카이네스는 단호하게 말하며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청혼하는데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불만스럽게 등을 획 돌려 카이네스의 시선이 닿은 곳을 확인했다.

수상하게 쌓인 종이 뭉치들. 확실히 의아하긴 했다.

“아, 어제 야시장 갔는데 사 온 거야.”

“야시장에 갔습니까?”

“응. 너랑 가려고 했는데 네가 날 워낙 피해서 말도 못 했지 뭐야.”

“……저랑 가려고 했습니까?”

카이네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내가 나름 널 쫓아다니는 중이라서.”

혼자 말하며 키득거리고 웃었다. 콘셉트라는 말을 덧붙이니 카이네스의 눈썹이 더 구겨졌다.

“어제 있었던 일 들으면 깜짝 놀랄걸? 차라리 네가 없어서 다행이었어.”

“…….”

“이건 비밀인데…… 아무래도 나한테 사탕 준 그 아저씨. 변태인 거 같아. 사탕 변태.”

“……!”

카이네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에 힘을 바짝 주어 주먹을 쥐었다. 손등에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사탕 변태 아닐 겁니다.”

“네가 어떻게 알아?”

“…….”

이번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았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일을 꼭 아는 것처럼 말하네?”

아저씨가 누군지 묻는 것보다 아닐 거라고 먼저 말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사람처럼.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소문 다 퍼졌습니다. 소문이 얼마나 빠른데요.”

소문을 강조하던 카이네스는 덥다며 손부채질까지 했다.

“네가 더위도 탔던가?”

손바닥을 덥석 잡으니 얼음장같이 차기만 했다.

“너 진짜 이상하다.”

카이네스를 빤히 바라보며 채근했다.

“아는 거 있으면 얼른 불어.”

하지만 카이네스는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와중에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는 숨기지 못했다.

“혹시……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계속되는 추궁에 카이네스가 꿀꺽 침을 삼켰다. 크게 울렁이는 목울대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사탕 변태 보낸 사람이 너야? 그렇게나 청혼이 싫은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카이네스의 눈이 한심하다는 듯 가늘게 변해 갔다.

“이상한 점이 많으니까. 그 사람이 내 이니셜이 적힌 손수건을 가지고 있었거든. 공산품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거 자체가 이상하잖아.”

내 손수건이다. 빨래는 엘리가 담당하고 있는데, 엘리가 빼돌렸거나, 내가 줬을지도 모른다.

에스타의 기억이 없는 관계로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급하게 쫓아와 뺏어 갔던 걸 보면 주웠다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아, 너한테도 손수건을 준 적 있지.”

이건 에스타의 기억이었다. 카이네스에게 선물로 제 손수건을 준 적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준 흔한 증표 같은 거였다.

“…….”

카이네스의 표정이 다시 한번 굳었다.

“너 그 손수건 어디 버렸어?”

“……왜 버렸다고 확신하시죠?”

“그럼 가지고 있어?”

탁자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기뻐하는 얼굴로 물었다.

만약 카이네스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남자가 가진 손수건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뇨, 버렸습니다.”

그럼 그렇지. 날 그렇게 싫어하면서 손수건을 여태 간직하는 것도 수상했다.

알고는 있는데 대놓고 버렸다니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애써 기분을 숨기며 밝게 웃었다.

“에이. 진짜 뭐 하는 사람이야? 알 수가 없네.”

의자에 늘어지게 등을 기대곤 푹 한숨을 쉬었다.

수상쩍기만 한 남자가 묘하게 나를 아는 듯해서 궁금했고, 심지어 그 남자도 날 아는 거 같았다.

단번에 날 알아본 것도, 말 한번 안 했는데 스스럼없이 곁에 다가오는 것도.

뭐…… 이상한 사람이면 잡히겠지. 소설 속에서 에스타가 모르는 남자한테 납치당했다는 내용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내가 태평할 수 있는 이유였다.

미래를 알고 있는 건 편하구나.

때마침 엘리가 가져다준 쿠키를 집어 들고 바삭 소리가 나게 씹었다.

“지금 쿠키가 들어가십니까? 에스타의 말대로라면 어젯밤 큰일이 날 뻔한 거 아닙니까?”

“걱정돼?”

“……제가 왜 에스타 걱정을 합니까?”

딱 잘라 말하는 카이네스의 말투에 웃음이 터졌다.

열세 살짜리 꼬맹이가 투덜거리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그래. 저게 카이네스지.

애초에 카이네스가 에스타에게 다정하게 굴면 원작 파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태도에 쉽게 수긍하며 쿠키 하나를 다시 들었다.

건포도가 박힌 쿠키가 꽤 입맛에 맞았다.

“그냥……. 사탕 변태라고 하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았어. 얼굴만 확인하려고 했던 건데 도망갈 줄이야. 게다가 엄청 잘 도망가더라? 다람쥐인 줄.”

“……다람쥐라뇨. 덩치가 그렇게 큰데.”

“덩치 큰 건 어떻게 알았대?” 

내 질문에 카이네스가 순간 멈칫했다. 정적이 흐르고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탁자 위에 괬던 턱을 치켜들곤 카이네스를 쳐다봤다.

“그런데 너 좀 이상하다. 한 가지만 해. 아까는 남자가 사탕 변태 아닐 거라며. 옹호하더니 왜 이제 와서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해?”

“…….”

“됐다, 됐어. 네 답을 듣다 내가 앓지.”

카이네스의 말대꾸를 듣지도 않고 턱을 괴곤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사실 여러 번 결혼을 거절당한 탓에 생긴 앙금이 풀리지 않았다. 나무도 열 번 찍으면 넘어간다는데, 뭐 얼마나 더 찍어야 해?

성대한 프러포즈라도 해 줘야 하는 거야?

확 이벤트를 준비해서 복수라도 해 버려? 광장에 불러 가지고 노래라도 불러?

“에스타, 다음부터 모르는 사람이 다가오면 소리 지르든지, 도움을 청하든지, 아니면 도망이라도 가세요.”

유치한 복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카이네스는 예상외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어젯밤 일이 신경 쓰이나 보다.

“알겠어.”

“왜 그렇게 태평합니까? 큰일이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큰일 안 난다니까.”

“어떻게 압니까? 큰일이 날지 안 날지.”

“아는 수가 있지.”

내가 미래를 알거든.

보란 듯이 활짝 웃었더니 카이네스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짜증이 솟구치는 얼굴이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최단 기록이었다. 십 분도 안 지나서 돌아가겠다니.

예전에는 최소 한 시간은 꼭 채우고 돌아갔는데.

“그래.”

가려면 가라.

귀여운 남주 얼굴 짧게 보는 건 아쉬웠지만 붙잡았다가 또 무슨 소리 들으려고.

손을 휙휙 흔들어 주었지만, 카이네스는 방을 나가기는커녕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 맞다. 줄 거 있었는데.”

순간 잊고 있던 물건이 있었다. 어제 카이네스가 생각나서 샀던 물건이었다.

“이거 네 생각 나서 샀어. 네 눈에 안 차도 봐주라.”

탁자 위에 쌓여 있던 종이봉투들을 뒤적이며 그를 위해 샀던 커프스 버튼을 찾아왔다.

같이 주려고 샀던 사탕은 박살이 나서 줄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사 준 것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준 걸 함부로 줄 수는 없다. 독이라도 탔으면 어떡해?

또 약을 먹인 범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자.”

카이네스에게 커프스 버튼을 내밀었다. 주먹에 쥔 채 내밀자 카이네스가 손을 펼쳐 내밀었다.

그 위에 커프스 버튼을 조심스럽게 얹어 놓았다.

카이네스가 두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더니 물었다.

“이게 뭡니까?”

“커프스 버튼.”

무려 두 개였다. 어젯밤 산 커프스 버튼을 전부 그에게 주었다.

“그게 아니라 갑자기 왜 주시는 겁니까?”

“……선물이잖아. 선물 안 받아 봤어?”

“오늘 제 생일이 아닌데요.”

“생일에만 선물을 주나? 생각나면 사 줄 수도 있고, 필요하면 줄 수도 있는 거지.”

“…….”

어쩐지 카이네스의 눈썹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너 열세 살이라기에는 너무 속 늙은 거 아냐? 애늙은이 같아. 선물 받으면 그냥 웃으면 되는 거야. 뭘 고민해?”

“…….”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그의 소매에 더 고급스러운 커프스 버튼이 달려 있었다.

세밀한 세공이 들어갔고, 모양까지 수려하다. 색감 자체가 어젯밤 좌판에서 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장인의 손길이 닿은 것 같은 커프스 버튼과 비교했더니 그의 손에 얹어 둔 것이 너무 조잡해 보였다.

“……마음에 안 들겠네. 내가 봐도 별로다. 다시 줘.”

도로 가져오려는데 카이네스가 돌연 주먹을 꼭 쥐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싫습니다.”

“……그럼 가질래?”

“……네.”

대답이 좀 늦었지만 선물을 받아 주었다.

조금 당황스럽게.

“뭘 그렇게 꼭꼭 숨기고 그래? 어차피 네 거야.”

내가 다시 뺏어 가기라도 할 것처럼 숨기는 그의 모습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남주님, 커프스 버튼 좋아하는구나?

“다음에는 더 좋은 거로 사 줄게. 좌판에서 산 게 아니라 정식 가게에서 산 거로.”

명품으로 사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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