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짧은 순간 숨을 멈췄던 카이네스가 별안간 한 걸음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불렀습니까?”
……아니, 부르고 나서 안 거지.
“게다가 공작저에서 그리 잘 보이는 곳에 떡하니 자리 잡으셨고요?”
공작저에서만 잘 보이는 게 아니라 백작저에서도 무척 잘 보이는 자리지.
아마 창문마다 하녀들이 달라붙은 채로 감시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중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들도 있는 걸 확인했다.
“네가 볼 줄은 몰랐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최근 담장 근처로는 오지도 않더니, 하필이면 오늘 건너왔다.
이건 일종의 사고였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소백작이랑 사이가 나쁜가 봐?”
“…….”
또 그 하찮다는 눈빛이다. 억울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기까지 해서 뭐라 탓하지도 못했다.
“왜 그렇게 봐? 내가 뭘 잘못 알았어?”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뿐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거지.”
“그 태평한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습니까?”
카이네스는 평소보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덤덤하던 카이네스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오자 낯설기만 했다.
“소백작이 온 건 에스타가 곧 파혼할 거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엥?”
파혼 얘기가 벌써 소문이 났단 말인가?
새삼 빨리 퍼지는 소문이 놀라워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랑 파혼하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아무리 그래도 소백작과 잘해 볼 생각은 없었다.
분명 없었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소백작에게 뭐라고 말씀하실 거냐고요.”
카이네스가 올곧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문 채, 심지어 긴장한 듯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그래도 제 약혼녀를 누가 눈독 들이는 건 불편한가 보네?
“아! 이제 알아들었어!”
나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장해서 양손을 쳤다. 상황 파악은 모두 끝났다.
그런데 어쩌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는 카이네스의 여린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나쁜 생각이 들었다.
아, 놀려 먹고 싶어라.
“그런데 너…… 나랑 결혼 안 할 거라면서? 그럼 내가 소백작이랑 만나도 상관없는 거 아냐?”
“…….”
역시나, 카이네스의 얼굴이 얼음장같이 굳었다.
“으으으으응? 아냐?”
그런 카이네스의 반응이 신기했다. 은근슬쩍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묻자 카이네스가 살벌한 눈으로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런다고 겁먹겠냐마는.
박력 넘치는 꼬맹이의 행동이 귀엽기만 했다.
“저랑 결혼한다는 마음이 그렇게 쉽게 꺾이는 거였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나도 결혼은 해야 하지는 않겠어? 상대가 누구든.”
정말 아쉽다는 눈으로 그의 볼을 콕콕 찔렀다.
“누구누구씨가 자꾸 청혼을 거절해서 말이야.”
“…….”
카이네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째려봤다.
비꼼에 기분이 나쁜 건지, 아니면 이 상황 자체가 싫은 건지 좁아진 카이네스의 미간이 넓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네가 안 해 주면 소백작도 결혼 상대로는 나쁘지 않지. 안 그래?”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이라니. 난 그런 거 안 해.”
“지금 이게 협박입니다.”
소백작과의 결혼이 네게 협박이 된다니. 그럼 더 해 볼까 해.
“카이네스, 너무 깊이 고민하지 마.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싫으면 거절하는 거야. 나랑 결혼하기 싫어?”
난 입꼬리를 올려 빙그레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카이네스? 나 소백작이랑 잘해 봐?”
슬그머니 한 발 앞으로 다가가며 카이네스를 짓궂게 바라봤다. 시선을 피하는 카이네스의 눈을 끈질기게 따라갔다.
“싫다고 말해. 그렇게만 하면 내가 다 정리할게.”
“…….”
카이네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오늘 이 고백이 카이네스에게 하는 마지막 고백이라는 걸.
* * *
에런은 한동안 홀로 정원을 지키고 있었다.
“분명 곧 헤어진다는 말을 들었는데…….”
중얼거리는 에런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정원에서 만나는 걸 알아차리고 다급히 달려온 카이네스 소공작의 모습에서 제 모습이 엿보였다.
혹시나 제 짝이 다른 이를 만나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몇 년을 기다렸지만 여전히 에런의 자리는 없었다.
에런은 조용히 홀로 찻잔을 들이키며 쓰린 속을 달랬다. 그때 에스타가 태양같이 환한 미소를 짓고는 저택에서 뛰어나왔다.
뭐가 저리 신난 걸까.
에스타의 미소에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가려던 순간이었다.
“에런!! 나 카이네스랑 결혼한다!!”
에런의 입꼬리가 굳어 버리는 거로도 모자라 아예 땅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제 자리가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 * *
“헤헤.”
입술을 비집고 자꾸 웃음이 터졌다.
“그만 웃으시죠.”
카이네스가 투덜거려도 튀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좋은걸.”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 아닌데도 그리 좋으십니까?”
카이네스의 입꼬리가 빈정거리며 휘었다.
“원했으니까.”
굉장히 생략된 말에 카이네스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요?”
책을 넘기던 카이네스의 손길이 멈췄다. 진심으로 답이 궁금한 모양이다.
하지만 답해 줄 수 없는걸.
혼란스러워하는 카이네스의 마음을 모른 척하며 엘리에게 말했다.
“더 단 거로 부탁해! 내가 좋아하거든!”
엘리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카이네스가 탁자 위에 책을 엎어 두었다.
“나중에 후회하셔도 저는 모릅니다.”
그는 뾰로통해진 목소리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후회한다고?”
“나중에 저랑 이혼하실 거라면서요.”
“응.”
“……대답이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카이네스가 묘하게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나중에 여주인공이 나타나면 곤란해지는 건 네 쪽인걸.
“네가 말했다시피 이 결혼에는 사랑은 없으니까. 서로에게서 이득만 얻는 거야.”
“세간에서는 그걸 계약 결혼이라고 하던데요.”
“……너도 그런 말을 알아?”
소설 속에서만 봤던 말을 직접 언급하는 카이네스라니.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네가 성인이 되면 이혼하자. 그럼 너도 아버지 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고, 그때쯤이면 나도 마력을 다스릴 수 있겠지.”
“제 일은 그렇다 치고, 에스타가 마력이라고 부르는 힘을 다스릴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합니까?”
카이네스가 눈썹 하나를 높이 치켜세웠다.
“칠 년이나 지나면 뭐라도 발전이 있겠지.”
사실 그쯤이면 마력에 대한 존재를 깨닫고 연구가 시작된다.
더 쉽게 마력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되겠지.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면 심장이 펑 하고 터져서 죽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이 결혼은 서로에게 좋은 거지.”
입꼬리를 올려 빙긋 웃었다. 이제 죽을 걱정은 한차례 넘긴 셈이다.
결혼하기로 약속한 날 이후로, 쭉 시한부를 선고받은 듯한 죽은 눈을 하고 쳐다보는 카이네스만 아니라면.
“뭐가 그렇게 싫은데?”
“……싫지 않습니다.”
“얼굴이 딱 싫은 표정이거든?”
“……아니라니까요.”
곧 죽어도 아니라고 거짓말하다니.
늘 무표정이던 평소와 달리 오늘은 짜증에 사무친 표정인 주제에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말해 주지도 않는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고작 열세 살에 하는 결혼인걸. 커서 헤어진다고 해도 모두들 이해해 줄 거야.”
“……농담이시죠?”
귀족 간의 혼담은 가문의 결합을 뜻했다. 헤어지는 일이 쉬울 리도 없고, 다른 귀족들이 이해해 주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진담인데?”
“하아…….”
하지만 심각한 카이네스에게 그 고민까지 더해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해결해야겠네.’
카이네스의 한숨이 무척이나 깊었다. 하여간 열세 살 같지 않다니까.
“시작도 않은 결혼에 벌써 끝을 결정한 사람이랑 무슨 얘기를 합니까?”
어라……? 카이네스는 생각보다 결혼에 진심이었다.
마치 내가 이혼 얘기를 꺼낸 것에 상처라도 받은 듯 애처롭게 속눈썹을 떨었다.
애처롭게……? 그것보다는 거칠게 화가 났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딱 칠 년입니다. 이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카이네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며 주먹으로 탁자를 살짝 내려쳤다.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아 보였다.
‘이렇게 귀여우면 곤란한데…….’
남주님을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은 새로움이었다. 19금 소설 속에서는 전혀 묘사되지 않았던 귀염 뽀짝한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친근한 이웃집 동생 같달까……?
동생이 너무 귀엽고 예쁜데, 위험한 상황이니까 도와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거지.
결혼하더라도 카이네스가 여주의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칠 년 뒤에 헤어질 거라 약속한 거고.
“그래. 칠 년. 기억하고 있을게.”
씩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이네스는 나한테 말린 게 억울한지 인상을 찌푸린 채 내 손을 빤히 쳐다봤다.
“저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싫으면 거절하라는 말.”
“네, 기억합니다.”
“평소에도 너무 참지 마. 가지고 싶으면 가지는 거고, 먹고 싶으면 먹는 거지. 넌 너무 고민이 많다니까.”
카이네스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공허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순간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이제 잘 지내보자.”
조금 더 손을 내밀자 카이네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네, 에스타.”
날카롭기만 했던 아기 고양이 같은 남주님이 처음으로 온순하게 굴었다.
내가 제 편이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됐을까?
내 목표에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아 웃음이 터졌다.
카이네스는 어설프게 웃는 에스타를 보며 다짐했다.
칠 년 안에 답을 찾을 것이라고.
왜 에스타를 볼 때면 짜증이 나고 열이 솟는지. 다른 남자와 있을 때는 그 감정이 왜 더 심해지는 건지.
농담 같았던 짓궂은 그녀의 청혼을 왜 거절하기 싫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