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마치 괴물 같지. 정신은 왔다 갔다 하는 데다 예고 없이 커지는 몸, 힘은 폭주하듯 모든 걸 얼려 버려. 기억 또한 잃고 말지.”
그는 홀로그램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런 말도 하지 않고 결혼했다가 네가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나.”
이로써 공작에게 카이네스가 무슨 의미인지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아들을 소유물 취급하는 모습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작님, 제가 이런 말씀은 안 하려고 했는데요. 본인 아들 아니세요? 왜 물건 다루듯 말씀하시는 건데요?”
공작은 마치 ‘차라리 물건이면 나았지.’라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제 아들이었으면 절대 아저씨처럼 두지 않아요. 한없이 아껴 주고 다독여줬을 거예요.”
“그래서 결혼하는 거라고?”
내 말을 들은 공작이 코웃음 칠 것 같았으나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네, 아저씨 아들로 태어나서 엄청 고생했으니 이제 제 남편으로 잘살 거예요. 결혼한 뒤에는 카이네스에게 손끝 하나 댈 생각하지 마세요. 가만 안 둘 거예요.”
단호하게 대답한 뒤 손에 쥔 마력석을 놓았다. 홀로그램은 그대로 사라졌지만 망가진 기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아…. 빌어먹을.”
카이네스의 마력은 다루기 어렵고, 의식이 사라진 그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면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했을 것이다.
폐쇄적인 가문이었으니 소문을 피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는 카이네스를 가문의 수치로 여겨 숨기는 거였다.
단 것조차 눈치 보며 먹던 카이네스가 떠올라 울컥한 감정이 치밀었다.
“진짜 불쌍해서 어떡해.”
창문을 열자 건너편에 불 꺼진 페이시아 공작가가 보였다.
그렇게 베일리 영애와 연락은 끊겼다. 공작은 기댔던 등을 떼어 내며 피식 웃었다.
제 아들에게 미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눈이 꽤 맑았다.
공작은 차분히 손으로 제 옷깃에 튄 불꽃을 털어 냈다.
“마력을 사용할 줄 모르는 거로 아는데.”
곧 능력을 개화할 것 같았다.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무의식중에 불을 붙이다니. 그녀의 능력을 생각보다 꽤 좋았다.
‘부작용에 대해선 말해 주지 않았는데.’
뭐 알아서 눈치채겠지.
공작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듯 가볍게 여기며 생각을 거뒀다. 곧 제 아들과 베일리 딸의 결혼식이었다.
* * *
저녁 식사 시간에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에스타, 이번 사냥제에 참석해 보는 게 어떻니?”
나는 상큼한 니수아즈 샐러드를 입에 집어넣으려다 행동을 멈추고 아버지를 쳐다봤다.
“저요?”
“그래.”
“하지만 에스타는 사냥제에 참석하기에는 사냥해 본 적이 없잖아요. 여우만 봐도 도망갈 것 같은데요.”
메이어가 인정한 둘째 망나니, 제뉴어 오라버니가 말했다. 틱틱거리는 말투였지만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제 참석하라는 말이 사냥하라는 게 아니라, 정말 참석만 하란 뜻이었어.”
“아, 같이 가자고요?”
“그래. 결혼 전 마지막 사교 행사잖니.”
에스타는 그제야 안심하며 놀랐던 속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옆자리에 앉은 아버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말을 헷갈리게 해서 애를 놀라게 하고 그래요?”
“재밌잖아.”
키들거리는 웃음을 뱉는 아버지의 모습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사냥제에 참석하라는 말을 일부러 한 것 같았다.
“아쉽네. 나랑 같이 말 타는 줄 알고 살짝 기대하긴 했는데.”
제뉴어 오라버니는 요새 한층 더 성숙해진 외모를 뽐냈다. 켜진 양초 불빛에 얼굴에 그늘이 질 만큼 얼굴선이 짙어져 있었다.
제뉴어 오라버니가 스테이크를 썰던 포크와 나이프를 옆에 내려 두고는 메이어 오라버니를 봤다.
“메이어, 너도 참석할 거지? 이번 사냥제에서는 나한테 이겨야지.”
“제가 형님을 어떻게 이깁니까?”
메이어 오라버니가 옆자리에 펼쳐 둔 책에서 시선을 떼곤 말했다.
한쪽 눈썹이 황당하다는 듯 구겨져 있었다.
“하긴, 늘 책만 보고 사는 놈한테 지면 내가 창피하긴 해.”
제뉴어 오라버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에스타, 갈 거지?”
사냥제라니. 처음 가 보는 행사였다. 요즘 들어 발작이 줄어들었고, 몸이 아픈 일도 없었다.
가족들 입장에서 내 병세가 호전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저택 안에서만 지내게 놔두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못 해 본 것들을 다 경험해 보고 싶었다.
사냥제도 그중에 하나였다.
“갈게요. 저도 가고 싶어요.”
아버지는 흐뭇한 얼굴로 웃으셨다.
“그래. 결혼 전엔 사교 행사에도 많이 다녀야지.”
곧 결혼이었다. 결혼 준비는 어머니께서 도맡아서 해 주신 덕에 편히 할 수 있었다.
카이네스와 부부가 된다는 건 여전히 어색했지만 가능하다면 최대한 서두르고 싶었다.
‘공작이 자꾸 미루는 낌새만 없었다면 더 빨랐을 텐데 말이야.’
샐러드가 공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푹 포크로 찔렀다.
“그러게요. 생각해 보면 사교계를 너무 등한시한 거 같아요.”
“이제부터 차근차근히 하면 된단다. 몸도 좋아졌으니 다음에는 가족 다 같이 나들이도 가자꾸나.”
아버지의 웃는 얼굴에 나는 차마 진짜 속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사실 아픈 게 사라진 건 아닌데.’
침울한 얼굴로 니수아즈 샐러드를 먹었다. 요즘 들어 생긴 고민이었다.
* * *
늦은 밤, 에스타가 침대에 누워 식은땀을 흘렸다. 요즘 들어 자꾸만 열이 오르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력이 요동친 탓인데 카이네스의 도움을 받아도 완전히 잠잠해지지 않았다.
에스타는 그 사실을 모두에게 숨겼다. 가족들에게도, 심지어 도움을 주는 카이네스에게까지 숨기고 있었다.
말하면 걱정할 테니까. 에스타 스스로 마력을 다스릴 수 없으니 나을 수도 없었다.
에스타는 오늘 낮에 카이네스를 만나고 왔지만, 다시 뜨거워지는 몸을 느끼며 심장을 꾹 쥐었다.
“제발… 좀… 그만해….”
심장이 불에 타오르는 것 같았다. 화염이 자신을 감싼다면 이런 기분일까.
화끈거리는 전신의 통증을 느끼다 꺽꺽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뱉으며 발작을 일으켰다.
눈이 뒤집히고 숨이 막혔지만, 에스타는 시종을 부르는 설렁줄을 당기지 않았다.
“하, 하악… 흑….”
간헐적인 숨을 뱉으며 이 순간이 지나가길 간절히 바랐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야 비로소 발작이 잠잠해졌다. 에스타의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었다.
“얼른 방법을 찾아야 해.”
마력을 완전히 다스릴 방법을 찾지 않으면, 남주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
에스타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축축하게 젖어 어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손이 여전히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
“목말라….”
목구멍이 바짝 말라서 침을 삼킬 때마다 따가움이 느껴졌다. 엘리가 떠다 놓은 물을 급하게 들이켜자 숨 쉴 틈이 조금 생겼다.
“하아… 더워.”
식은땀을 식히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맞은편 건물에 있을 카이네스에게 당장 찾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에스타가 카이네스 방 창문을 깨서라도 들어갔구나.”
뒤늦게 에스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살아야 했는지.
정말 에스타의 몸으로 살아 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늘 화염에 갇혀 살아야 하는 기분은 결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에스타는 자신의 인내싶이 깊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기른 인내심이 이럴 때 쓰일 줄이야.”
에스타가 자조적인 한숨을 뱉었다.
그녀는 가진 게 없었던 탓에 포기가 빨랐고, 인내심이 깊었다. 남들은 쉽게 가지는 걸 욕심내지 않는 법도 배웠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부모 없이 자라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악착같이 버텼는데, 오늘 그 진가를 발휘했다.
“카이네스에게 다시 미친 사람 취급받으면 안 돼.”
에스타는 홀로 다짐하며 커튼을 쳤다.
* * *
다음 날 아침, 에스타의 단잠을 깨운 건 엘리였다.
“아가씨, 일어나셔야죠.”
예고 없이 커튼을 확 걷은 탓에 밝은 햇볕이 눈을 덮쳤다.
“어? 창문 열어 두고 자셨어요? 감기라도 드시면 어쩌려고요!”
“엘리, 제발 그 커튼 좀 다시 쳐. 눈 부셔.”
에스타가 눈을 찡그린 채 말했지만 엘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스타가 이불로 눈을 가리며 외쳤다.
“딱 오 분만 더 잘게.”
“아가씨, 일어나셔야 해요! 준비하셔야죠!”
“준비?”
엘리가 이불을 걷어 내며 말했다.
“사냥제 가실 준비하셔야죠. 아가씨의 첫 사교 모임인걸요. 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거예요.”
“아, 그렇구나.”
“아, 그렇구나가 아니라고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에스타를 대신해 엘리가 양손을 허리에 올리곤 두 눈을 빛냈다.
“베일리가의 막내 아가씨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분인지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고요!”
“이미 모두들 알고 있다며. 네가 늘 말했잖아. 그러니까 난 오 분 더 자야겠어.”
에스타는 단칼에 거절하며 엘리가 걷어 간 이불을 도로 뺏었다.
이불 없이 잘 수도 있었지만, 너무 밝은 햇볕이 부담스러웠다.
“으악, 아가씨!”
엘리와 에스타는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고서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 얼굴을 보니 꼭 잠을 설치신 것 같아요.”
엘리가 세수를 마친 에스타의 얼굴에 화장수를 발라 주며 말했다.
“거칠거칠한 것이, 어제와 너무 다른데요?”
“잠은 잘 잤어. 오늘 컨디션도 좋은걸?”
에스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제 팔을 붕붕 흔들어 보였다. 그녀의 환한 미소에 엘리는 ‘그런가….’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휴….”
에스타는 엘리가 보지 못할 때 짧은 숨을 내쉬었다.
제 몸이 안 좋은 걸 가족들이 알게 되면 상황만 더 나빠질 게 뻔했다.
일단 외출을 못 할 거고, 좋은 게 잔뜩 들어갔다는 그 끔찍한 약재가 대령될 것이며, 집 안을 돌아다닐 때도 하녀들이 잔뜩 붙어서 그녀를 감시할 터였다. 그건 죽기보다 싫었다.
“얼른 준비해 줘.”
에스타는 얼른 이 귀찮은 준비가 끝나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