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사냥제로 향하는 마차 안이었다. 부모님은 다른 마차를 탔고, 에스타는 제뉴어, 메이어와 한 마차에 올랐다.
제뉴어는 사냥을 한다는 것에 기대를 잔뜩 했는지 연신 콧노래를 불렀고, 메이어는 외출 자체가 스트레스인지 인상을 찌푸리고 팔짱을 낀 채 등을 기댔다.
그 맞은편에 앉은 에스타는 평소보다 활동하기 편한 드레스를 입고 케이프를 걸친 상태였다.
“사냥제는 처음이지?”
제뉴어가 물었다.
“네, 오라버니는 경험 많으시죠?”
“많지.”
“우승하신 적도 있나요?”
에스타의 물음에 제뉴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년 전에 우승했지.”
“오, 정말요?”
에스타는 별 기대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사실이라는 말에 살짝 놀랐다. 사냥제에는 영식들만 참석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기사들이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냥했다.
애초에 귀족들의 문화가 아니었던가. 그곳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우스운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그 가운데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니. 에스타의 눈에 제뉴어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그래. 우승해서 아카데미에 명예 입학도 했잖아. 기억 안 나?”
“기…억나죠.”
사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일 집에서 카이네스와 대련만 하고 있어서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을 거라 예상치 못했었다. 그냥 방학 중일 뿐이었다.
게다가 2년 전은 에스타에 빙의하기 전이었다. 한창 카이네스 쫓아다닐 때라 카이네스를 제외한 다른 기억은 흐리멍덩했다.
그 시기에 제뉴어가 사냥 대회에서 우승해 제국 아카데미에 명예 입학을 했다니.
갑자기 든 의문에 에스타가 물었다.
“사냥제에서 우승하면 아카데미에 명예 입학할 수 있나요?”
반쯤 소리치듯 묻는 바람에 메이어가 눈을 번쩍 떴다.
“그…래. 매년 그래 왔지.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 아카데미에 관심 있어?”
있고 말고!
에스타가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며 잔뜩 커진 눈을 깜빡였다.
“왜 그래? 아카데미 입학하고 싶어? 원한다면 넌 언제든지 할 수 있잖아.”
제국 아카데미에 여성 입학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하는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제한된 것은 아니었으나, 귀족 여성은 결혼하고 나서 가문을 이끄는 것이 명예라고 생각했다.
“아뇨, 그게 아니에요.”
이 세계까지 와서 굳이 학교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토록 놀란 이유는 카이네스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카이네스는 아카데미에 다니지 못했다.
‘페이시아라서 아카데미에 가지 못하는 거라고 했지. 그러면 만약 페이시아인 카이네스가 사냥제에서 우승을 하면? 입학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자 에스타가 입꼬리를 히죽거리며 웃었다.
“오라버니, 그러면 페이시아가 사냥제에서 우승한 적 있나요?”
제뉴어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아니.”
에스타가 기쁜 마음에 박수를 쳤을 때였다.
“굳이 하지 않겠지. 우승한다면 황제의 눈치를 받을 테니. 제국 아카데미에 명예로 입학할 수 있는데 페이시아는 갈 수 없으니, 황제 폐하께서 선택하게 만든 상황이잖아. 반길 만한 상황은 아니지.”
제뉴어가 무심하게 말하자 에스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설마 카이네스가 입학을 원하느… 너 표정이 왜 그래?”
제뉴어가 말을 하다 말고 메이어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제뉴어가 신경질적으로 제 동생을 쳐다보자 메이어가 턱짓으로 침울해져 가는 에스타를 가리켰다.
“서, 설마 네가 원하는 거였니? 에스타, 네가 원하면 카이네스가 갈 수도 있지. 너무 실망하지 마. 방금 내가 했던 얘기는 잊어!”
사냥제로 가는 내내 제뉴어는 에스타를 다독였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로.
* * *
페이시아 공작이 영지에 가 있는 탓에 사냥제에서 카이네스는 혼자였다. 차라리 혼자인 게 편하다 여기며 카이네스는 사냥터에 도착하자마자 에스타를 찾았다.
“얼굴이 안 좋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얼굴이 어디 아픈 사람 같았다.
“아냐.”
에스타는 고개를 저었지만, 안쓰러운 눈빛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냐.”
“뭐가 자꾸 아닙니까?”
카이네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이미 에스타보다 살짝 더 커진 그가 햇볕을 등지고 서서 그림자를 만들었다.
“햇볕이 강합니다.”
사실 그다지 햇볕이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의 마력을 가진 에스타는 작은 햇볕에도 금방 몸이 달아오르곤 했다. 그 사실을 아는 카이네스가 걱정스레 미간을 구겼다.
“그늘로 가시죠. 사냥할 것도 아니잖습니까.”
카이네스가 에스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타는 에스코트를 승낙하며 손을 잡고 걸었다.
사냥제에 모인 사람들이 둘을 힐끗거렸다.
늘 카이네스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도망 다니는 건 많이 봤지만, 정식으로 에스코트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딘가 침울한 에스타와 그녀를 다독이는 카이네스는 제법 잘 어울렸다. 둘만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모습을 사람들이 목격하고는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결혼한다는 말이 사실인가 봐.”
“베일리 영애의 마음을 드디어 받아 준 건가?”
“분위기가 좋아졌지?”
페이시아와 베일리의 결혼은 귀족 사회에서도 큰 이슈였지만, 이루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베일리가 큰 가문이긴 하지만 백작가였고, 페이시아는 늘 황족과 엮였던 공작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카이네스가 에스타를 싫어하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에스타가 광적으로 쫓아다니는 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런 에스타를 무참히 무시하던 게 카이네스였으니까.
“감겼네, 감겼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페이시아 소공작도 역시나…….”
부인들이 제각기 부채를 펴고는 펄럭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페이시아 공작 가문의 하나뿐인 소공작, 베일리 백작 가문의 하나뿐인 영애는 누구나 탐낼 만한 결혼 상대였다.
정작 에스타는 카아네스의 아카데미 입학에 정신이 팔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카이네스, 사냥제에서 우승하면 황제 폐하께 무얼 받는지 알아?”
에스타가 어물쩍하게 물었다. 차라리 카이네스가 모르길 바랐다.
우승의 대가가 무엇인지 아는데, 그는 못 간다는 걸 모르길 바랐다.
“아카데미에 명예 입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네.”
“제가 못 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카이네스도 또래 아이들처럼 아카데미에 가고 싶을 텐데.
안쓰러운 마음에 에스타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카이네스의 시선이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제게 주실 건 없으십니까?”
뭘 줘?
아카데미 얘기하다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탓에 에스타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오늘은 사냥제잖아요.”
카이네스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지고 말았다.
에스타는 한 박자 늦게 카이네스가 무얼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설마 손수건 말하는 거야?”
카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달라고 할 줄은 몰랐는데. 그런 거 챙기는 타입이었니?”
제국의 전통 중 하나였다. 매해 첫 번째 열린 사냥제에서는 사냥제에 출전하는 연인에게 손수건을 선물한다. 다치는 일 없이 안전하게 돌아오라는 의미였다.
다소 로맨틱한 이벤트를 카이네스가 바랄 줄은 몰랐던 에스타는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서 없단 말씀입니까?”
카이네스가 눈으로 욕이라도 하는 듯 에스타를 째려봤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전혀 연인으로 보이지 않을 겁니다.”
“…정말 받고 싶었구나.”
에스타는 카이네스가 의외로 연기에 진심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준비 안 했다고 한 적은 없어.”
에스타는 품 안에 챙겨 온 손수건을 꺼냈다. 그녀의 이니셜이 박힌 그 손수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품에 챙기고 다녔지.’
야시장에서 만나 사탕을 가지고 왔을 때도 손수건을 챙겨 다녔다는 걸 깨닫자 에스타는 궁금해졌다.
대체 왜 가지고 다녔을까. 그리고 기억을 잃는 기준이 뭘까.
그날은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야시장, 그리고 며칠 전 깜깜한 밤에 만났을 때.
다정했던 남자와 짐승 같은 남자. 대체 뭐가 진짜인지 알기 어려웠다.
“제 겁니까?”
카이네스는 포장된 상자를 열며 손수건을 확인했다. 기쁜 듯 흐릿한 미소가 입가에 감돌았다.
“그래, 네 거야.”
확인받은 카이네스는 더 큰 미소를 지었다. 아이 같은 모습에 에스타 또한 미소를 지었다.
카이내스는 ‘내 것’이라는 말을 꽤 자주 했다.
내 커프스 단추, 내 사탕, 내 손수건.
에스타는 카이네스가 애정을 가진 물건이 늘어가는 게 좋았다. 자신이 선물한 물건을 애정한다는 건 그만큼 카이네스가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였으니까.
“잘 다녀와.”
자신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고 카이네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막냇동생 같아서.
그런데 카이네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로 에스타를 바라봤다.
에스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카이네스는 당황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조심히 다녀와. 위험한 일 없이. 알겠지?”
“누님께서 원하신다면요.”
카이네스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거 같았다.
원래 이런 말을 하는 성격이었나?
에스타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카이네스는 그 눈동자를 보다가 작게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그때였다. 에스타의 어깨너머로 그 짜증 나는 에런 소백작의 모습이 보인 건.
마치 아내의 외도라도 발견한 듯 충격받은 얼굴이 카이네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카이네스는 보란 듯이 에스타의 손을 잡아당겼다.
“뭐 하는 거야?”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그의 품에 닿을 듯이 선 채로 에스타가 물었다.
에스타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카이네스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에스타는 뒤늦게 카이네스가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리려 했다.
“왜 그래? 누구라도 있…?”
에스타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카이네스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에스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롯이 자신만을 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