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결혼 (32/83)

31화

-우리 에스타, 잘 지내고 있니? 요즘 결혼 준비하느라 많이 바쁠 것 같구나.

어릴 적부터 자주 아프던 네가 결혼을 한다니,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 결혼이 행복하기만 한 일은 아니니까. 에스타도 잘 알 거라 믿어.

에스타, 네가 아프지만 않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기도했었는데, 신께서 그 소원을 들어주신 모양이야. 네가 더는 아프지 않고 점점 건강해지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우리 집 막내가 우리보다 빨리 결혼할 줄은 몰라 마음의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었단다.

그래도 기쁘단다. 에스타가 원하는 결혼이었으니까. 행복하게 웃는 모습에 결혼하지 말라 말릴 수도 없었어.

행복하게 지내렴.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해져야 해.

결혼하고도 자주 연락하렴. 카이네스가 못살게 굴거나 울리면 바로 집으로 와 버려. 굳이 참으며 살 필요 없어.

결혼 진심으로 축하한다, 에스타.-

편지를 읽는 내내 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마지막에 적힌 페뷰어 오라버니의 진심 때문이었다.

-언제나 든든한 기댈 곳이 될 페뷰어가-

* * *

어느덧 결혼식이 일주일 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늦은 밤 열대야로 잠을 설치던 중,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꿈인가? 악몽…? 소설 속에서 귀신이 나왔었나….

흐릿한 의식을 겨우 붙잡았을 때, 울음소리의 정체가 귀신이 아니라 어머니였다는 걸 알게 됐다.

“흑, 에스타….”

놀란 것도 잠시,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돌린 어머니가 보였다.

“어, 어머니! 한밤중에 왜 울고 계세요.”

어머니는 울음을 들킨 것이 난감한지 한참이나 고개를 드시지 못하셨다.

떨고 있는 어깨를 조심스럽게 어머니가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잔뜩 붉어진 어머니의 금안에 내 모습이 비쳤다.

“네가…… 결혼한다고 하니 마음이 이상하구나. 잠을 깨워 미안해.”

어머니가 말을 더듬으면서 겨우 마음을 털어놨다. 순간 울컥한 감정이 치솟았다.

이 집안은 왜 이렇게 화목한 거야.

“심란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그이를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나기도 해.”

아버지와 첫 만남을 얘기하는 어머니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잠결이라 그런지 더 포근한 손길이었다.

“다정하고 착한 이였지. 첫눈에 알아차렸단다. 저 사람과 결혼하게 될 거라고.”

어머니는 중간중간 터지려는 감정을 애써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너도 그랬니? 생각해 보니 늘 쫓아다니는 걸 말리기만 하고, 네 얘기 한 번 제대로 들어준 적 없는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사과까지 하는 어머니를 보자 나도 모르게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나까지 울었다가는 울음바다가 될 것 같아 어머니의 허리를 끌어안아 얼굴을 숨겼다.

“첫눈에 반했어요. 이 사람이다 싶은 감정은 모르겠지만 평생 함께하고 싶었어요.”

소설 속 에스타가 그랬었다. 카이네스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지. 하지만 난 아니었다.

“늘 저를 도와주고, 생각해 줘요. 무뚝뚝해 보일지 몰라도 알고 보면 얼마나 다정한데요.”

카이네스를 향한 감정은 사랑보다는 믿음과 신뢰가 더 가까웠다.

이제는 카이네스가 날 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내가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절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저는 늘 행복할 거예요. 약속할 수 있어요.”

몇 년 뒤에 카이네스와 이혼하겠다고 하면 가족들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행복을 위해서라고 하면 조금은 용서해 주지 않을까?

“그래, 에스타. 그거면 된 거야.”

환히 웃으시는 어머니를 보자 희망이 생겼다.

나중에 어머니께 크게 혼나더라도, 어머니는 절대로 날 미워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 감사해요, 어머니. 오늘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어머니의 품에 파고 들자 머리를 쓰다듬는 손짓이 느껴졌다.

다정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향이 났다.

“잘 자렴.”

어머니는 이마에 쪽 뽀뽀를 해 주시곤 방에서 나가셨다.

그날 밤은 잠을 설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 * *

드디어 결혼식 날이었다.

“아가씨! 얼른 일어나서 목욕하셔야 해요!”

“아직 해도 안 떴는데 무슨 목욕이야…….”

잔뜩 잠긴 목소리로 손을 휘젓자 엘리가 내 손을 턱 잡았다.

“원래 예식하기 전에는 꼼꼼하게 몸단장하는 거예요! 다섯 시간은 더 걸리니까 지금 일어나셔야죠!”

엘리는 새벽부터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흐암.”

하품을 뱉으며 삐걱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켰다. 여전히 눈은 떠지지 않았다.

어제저녁, 아버지와 늦게까지 서재에서 대화를 나눴다. 결혼 전이라며 아쉬운 마음에 얘기가 점점 길어졌고, 그 탓에 잠은 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아가씨! 눈뜨세요!”

나는 엘리의 손길을 받으며 목욕, 머리 관리, 마사지 등등. 정신없는 하루를 맞이해야 했다.

“그런데 아침은?”

얼굴에 분이 퍽퍽 발리는 와중에 겨우 물었다. 그러자 엘리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드레스 입으셔야 하는데 아침을 어떻게 드시려구요?”

“…나 굶어?”

“물론이죠! 아니면 몸이 망가지는걸요.”

아무리 그래도 굶다니! 굶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는데!

밥을 달라고 떼쓰는 것도 아이 같아 입만 뻐끔거렸다.

그래, 오늘 하루만 참자.

결혼식이 끝나면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닌 웨딩드레스를 입는 거니, 식사 한 번 정도는 참을 수 있다.

“그리고 식사 안 하시는 게 좋아요.”

“응?”

“식사하고 나서 코르셋 입으시면 불편하잖아요.”

싱긋 웃는 엘리의 표정에 걱정이라곤 먼지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코르셋이라는 게 그렇게 사악한 것이라는 걸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으악!! 나 진짜 죽어, 엘리!!”

장기를 조이는 것 같은 충격에 다른 하녀의 손을 잡고 소리쳤다.

“아휴, 왜 이 정도로 유난이세요!”

엘리는 봐주지 않고 더욱 꽉꽉 당겼다.

“으악!”

날 죽이려는 게 분명해! 내가 그동안 약을 먹기 싫어서 좀 도망쳤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평소 코르셋을 착용하지 않고 집 안에만 있었기에 이 고통을 견디기가 더욱 힘들었다.

뒤에서 꾹꾹 줄을 당기던 엘리가 개운한 표정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쓱 닦았다.

“이제 드레스 입으시고 머리만 하시면 돼요.”

“사… 사… 살려 줘….”

농담이 아니라 정말 폐를 반만 쓰는 기분이었다.

헉헉거리는 날 보며 엘리는 뿌듯하게 웃었다.

“정말 개미허리 같으세요.”

“아니, 나 살려 달라니까….”

“아가씨도 참! 코르셋 처음 껴 보신 분처럼 왜 그러세요.”

걷는 것조차 불편했지만, 엘리는 이게 당연한 거라며 안심시켰다.

소설 속에서 영애들이 왜 그렇게 픽픽 쓰러지나 했더니.

이걸 입고도 안 쓰러지는 주인공들이 대단한 거였다.

모든 치장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차가운 거울을 매만졌다.

이게…… 나?

엘리와 하녀들이 공을 들여 꾸민 티가 났다. 평소보다 화장이 화려했지만 에스타의 이목구비는 전혀 묻히지 않았고, 어깨가 드러나는 흰 실크 웨딩드레스는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뜬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얇은 웨딩 베일과 부케까지 들자 영락없는 신부의 모습이었다.

‘진짜 결혼하는구나.’

뒤늦게 현실감이 찾아와 긴장되기 시작했다.

엘리가 어디 흐트러진 곳이 없나 몇 번이고 확인을 거듭했다.

“오늘은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우실 거예요.”

“…그…래.”

아래턱을 덜컥거리며 대답하자 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아냐, 긴장해서 그래.”

경직된 어깨를 문지르자 엘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 며칠 전까지도 긴장이라곤 안 하시더니, 이제야 실감이 나시나 봐요.”

“응, 내가 결혼을 한다니. 그것도 카이네스랑…….”

“어릴 때부터 마음에 품으셨던 분이잖아요. 좋은 분이실 거예요.”

똑똑, 타이밍 좋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에스타, 준비 다 했니?”

단정한 예복 차림의 아버지가 웃으시면서 방에 들어오셨다.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어지러운 방 안에 놀란 것도 잠시, 아버지는 날 보자마자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자리에 서 계셨다.

“저 이상해요?”

“너무 예뻐서 그래. 내 딸이 언제 이렇게 컸나 하고.”

아버지는 촉촉해진 목소리로 말씀하시곤 휙 고개를 돌리셨다.

“식장에 들어가셔서 우시면 안 돼요. 아셨죠?”

아버지의 팔에 매달려 웃자 아버지도 미소 지으셨다.

“결혼 진심으로 축하한다, 에스타.”

아버지가 내 어깨를 꼭 끌어안아 주셨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에 아버지의 진심이 느껴져 마음이 울컥했다.

아버지는 베일을 걷고서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항상 행복하기를.”

가족들의 문화라던 인사를 받았을 뿐인데.

“페이시아 가문에서도 잘 지내야 한다.”

왜 마지막 인사같이 느껴지는지. 이상하게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이제 가자꾸나.”

아버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 위에 얹자 실감이 났다.

이제 결혼식이라는 게.

* * *

결혼식은 신전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가까운 가족들만 최소한으로 모였고, 친구나 지인은 따로 부르지 않았다. 이렇게 간소한 결혼식은 귀족들 사이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피로연도 생략한 채, 신관의 축복 아래 카이네스와 에스타는 공식적으로 부부가 되었고, 그녀는 페이시아 소공작 부인이 되었다.

* * *

저녁에 페이시아 가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챙겨 두었던 짐을 서둘러 챙겼다. 엘리는 에스타의 수발을 들기 위해 같이 페이시아 공작저로 옮기기로 했다.

“저 이제 가 볼게요.”

에스타가 짐을 챙기고 나오자 가족들이 조르르 줄지어 서서는 배웅하기 시작했다.

“에스타, 결혼 축하한다. 우리 중 가장 먼저 어른이 됐구나.”

“오라버니!”

오랜만에 페뷰어를 본 에스타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가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아니, 크게 부르기만 해. 듣고 달려갈 테니까.”

웬일로 듬직한 소리를 하는 제뉴어.

“오늘이 결혼 첫날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제뉴어에게 핀잔을 주는 메이어.

“결혼 축하한다, 우리 딸. 오늘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어. 어찌나 예쁘던지! 메이와 결혼했을 때가 생각날 정도여…. 윽.”

에스타 칭찬인지 그의 아내인 베일리 백작 부인을 칭찬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하다가, 결국 부인에게 옆구리를 찔린 아버지와.

“몸조심하렴.”

가벼운 말로 인사를 끝마친 어머니까지.

“저 잘 살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에스타는 환히 웃어 보인 뒤,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담장 문으로 다가갔다.

“저 이제 가 볼….”

에스타는 울상이 된 가족들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왜들 그렇게 울상이에요. 그래 봤자 옆집인데.”

에스타가 푸스스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에스타는 가족들과 몇 번이나 포옹을 다시 하고, 얘기를 나눈 뒤에야 겨우 담장 문을 넘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넘었던 문이었지만, 처음으로 페이시아 소공작 부인이 되어 넘은 문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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