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황태자의 결혼 선물을 받은 것도 놀라운데, 다음 날 도착한 황태자의 편지에 에스타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전하께서 저희 부부를 황실 다과회에 초대한다고요?”
황실에서 다과회를 한 번이라도 가지면 귀족 인생이 꽃핀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기 힘들지만 가기만 한다면 황실과 인연을 맺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작 결혼 한 번 했다고 다과회에 초대한다는 황태자의 제안에 선뜻 알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루안은 소설 속 악역 서브남이니까.
“부인, 답변을 주셔야지요.”
황태자에게서 칙서를 들고 온 전령이 시간이 없다는 듯 자꾸만 시계를 확인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영광입니다.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는 전령의 뒷모습을 보며 에스타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원작 속 악역을 마주할 준비는 아직 안 됐는데.
게다가 이유 없이 부르는 게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에스타는 황태자의 진짜 꿍꿍이가 뭔지 궁금했다.
“일단 카이네스에게 말해 줘야겠다.”
에스타는 삼 층에 있는 그의 개인 집무실로 향했다. 손에 쥔 황태자의 오찬 초대장이 어쩐지 묵직하게 느껴졌다.
“카이네스, 일하고 있어?”
에스타가 조심스럽게 집무실 문을 열었다. 서류를 보고 있던 카이네스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공작이 쓰던 집무실을 물려받아 실내 장식을 바꿨는데도 여전히 그의 향취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에스타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지만, 정작 카이네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가운데서 업무를 처리했다.
후계 수업을 받았다더니 공작의 빈자리를 잘 채워 주고 있었다.
“일하는데 내가 괜히 방해한 것 같네. 황실에서 편지가 와서…….”
카이네스는 에스타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의 손에 들린 황실 초대장을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실에서 연락이 왔단 말은 들었습니다만….”
카이네스의 눈이 얇아졌다. 화내는 게 아닌데, 에스타는 스스로 양심이 찔려 변명 아닌 변명을 털어놨다.
“좀 특이하긴 하지? 페이시아의 주인이 따로 있는데 부인에게 꼭 편지의 답장을 받아 내다니.”
“누님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카이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중앙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에스타에게 앉으란 소리였다.
“왜? 할 말 있어?”
“혹시 이전에 황태자 전하를 만난 적 있습니까?”
“아니.”
단호하게 답했다. 만나기는커녕 만나기 싫어서 피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전하께서 누님을 찾는 겁니까?”
본인도 의아해하는 걸 카이네스가 묻자 에스타는 제 머릿속이 고장이라도 날 것 같았다.
억울해서 입술을 뻐끔거리자 카이네스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결혼식 축하하려고 부르는 거겠지. 네가 페이시아니까, 신경 쓰여서 그러는 게 아닐까?”
“그럴 리가요.”
카이네스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어졌다.
“전하께서 결혼 선물로 여성용 루비 목걸이를 보내셨잖아요.”
그 루비 목걸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카이네스는 진작에 알아차렸다.
황실의 상징인 루비, 게다가 여성용 목걸이를 보내는 건 흔치 않았다.
황태자가 선물한 목걸이를 끼고 다닐 에스타를 떠올리니 벌써부터 짜증이 치솟았다.
게다가 공작가를 상징하는 건 푸른 사파이어. 붉은색을 띠는 보물은 대체로 황가에서 많이 사용하는 보석이었다.
“나,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에스타를 보자마자 마음이 고장이라도 난 듯 삐죽 본심이 튀어나왔다.
“…끼고 다니실 겁니까?”
묘하게 처진 어깨,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 이건 분명 삐진 거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경고등 소리에 에스타가 빠르게 답했다.
“아니! 난 빨간색이 잘 안 받아서. 이미 보석함에 처박아 놨어.”
“……그렇습니까?”
카이네스가 고개를 살짝 돌렸지만,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게 다 보였다.
* * *
루안은 잘 오지 않던 행정부까지 찾아와서 주변을 기웃거렸다.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등장에 행정부 직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지만, 루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누군가를 찾았다.
“자네, 여기 있었군!”
루안이 반갑게 웃으며 찬란한 금발을 가진 남자의 등을 두드렸다. 페뷰어 베일리였다.
평소 가벼운 손 인사 정도만 오갔던 터라 페뷰어는 내심 의아했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전하.”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 자네를 찾았지.”
루안은 반짝이는 페뷰어의 금발이 오늘따라 무척 마음에 들었다. 가능하다면 손에 한 움큼 쥐어 보고 싶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마법사를 떠올리게 했다. 에스타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랬지. 그의 여동생이라면 분명 미인일 것이다.
루안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부르셨다면 제가 곧장 갔을 텐데요.”
“자네를 그리 부를 수야 없지.”
페뷰어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오늘따라 전하의 상태가 이상했다. 유난히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 동료들의 눈빛까지 수상쩍어지는 걸 본 페뷰어가 서둘러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저를 찾으셨습니까?”
“자네 여동생은 무얼 좋아하나?”
“…제 여동생이요?”
“그래. 자네가 베일리 가문의 장남 맞지? 그러니 막냇동생의 취향이 무엇인지 말해 보게. 어떤 티를 좋아하는지, 어떤 다과를 즐겨 먹는지, 혹 필요한 게 있다거나. 뭐든 말해 보게.”
루안은 진심으로 에스타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했다. 식습관 외에도 마력을 어떻게 얻었는지, 자연적으로 가진 거라면 그녀의 가족 모두가 마력 발현자인지 등등.
하지만 페뷰어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전하께서 그걸 왜 궁금해하시는지 먼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하, 혹 오해라도 하는 건가.”
루안은 호탕하게 웃으며 페뷰어의 등을 두드렸다.
“오해하지 말게. 자네 여동생에게 내가 잘 보여야 할 입장이라 그런 거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제 여동생에게 관심이라도 있으시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이제야 알아듣는군.”
페뷰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분히 오해를 살 만한 황태자의 발언에 주변 동료들은 슬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큰 행정부에 단둘만 남게 되었다.
“혹여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제 여동생은 며칠 전에 결혼했습니다.”
페뷰어는 어떻게든 루안의 마음을 돌려 보기 위해 애썼다.
“알고 있네만. 내 친히 결혼 선물까지 보냈네. 마음에 들어 했으려나.”
“그런데 왜 이러십니까….”
페뷰어는 반쯤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자네 여동생이 결혼한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내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행정부 소속인 자네가 제일 잘 알 텐데.”
직속 행정관으로 일하며 알게 모르게 들리는 소문은 많았다. 황실에 관한 모든 건 비밀에 부쳐야 하기에 입 밖으로 뱉지 못했을 뿐, 엄청난 얘기가 암암리에 퍼졌다.
그중 황태자 루안, 제2 황자 루비스의 침대 속 사정 얘기를 가장 자주 들었는데, 루안은 여인의 직업과 나이, 결혼 여부 등 모든 걸 상관하지 않고 침실에 들이는 방탕아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심히 충격이었다. 제 상관이 고작 며칠 전에 결혼한 에스타를 눈독 들이고 있다니.
페뷰어는 이곳이 황실이라는 것을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든 채 말했다.
“제 충심을 시험하시는 겁니까.”
“…겨우 이런 일에 충심을 걸다니, 자네도 참 충심이 깊군.”
여동생의 취향 좀 말해 주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베일리 백작과 다르게 은근히 고지식한 구석이 있었다.
“말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알겠네.”
루안은 페뷰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행정부에서 나왔다.
복도를 걷던 루안이 제 손을 빤히 내려다봤다.
“아쉽게도 페뷰어는 아닌가.”
페뷰어는 루안이 사라지자마자 정신이 몽롱해진 탓에 루안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에스타를 생각하자마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에스타…. 이 일을 어쩌면 좋아.”
페뷰어는 손등뼈가 도드라질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 * *
황실에서 초대받은 다과회에 가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준비하는 건 여전히 버거웠지만, 에스타는 오랜만에 외출이라서 살짝 들뜬 기분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카이네스가 나오길 기다리며 차를 마실 때였다.
“에스타, 문제가 생겼습니다.”
침울한 표정을 한 카이네스가 에스타를 찾아왔다.
“요즘 가문 사업으로 제4 지구 건물을 세우는 중이었는데, 건설 인부가 사고를 내는 바람에 바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건설 사업도 하니…?’
몰랐던 사실에 놀랐던 것도 잠시, 에스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다녀와.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같이 가 줘야 하는데 일이 생겨서 죄송합니다.”
카이네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황실에 처음 가는 에스타를 혼자 보내는 게 미안했다.
정작 에스타는 아무 걱정도 들지 않았다. 루안이 조금 무섭기는 했으나, 단순히 다과회일 뿐이라며 가볍게 여겼다.
“일이 늦게 끝날 것 같아?”
“아닙니다. 문제만 해결하고 금방 돌아올 겁니다.”
에스타가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그럼 저녁에 오페라 보러 갈래? 요즘 재밌는 게 한다던데. 사실 오랜만에 외출해서 조금 들떴거든.”
엘리가 그 오페라 진짜 재밌다고 했는데! 며칠 전에 엘리가 카이네스와 함께 보고 오라며 직접 표까지 구해 에스타에게 전해 줬었다.
그런데 카이네스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에스타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안 되면 그냥 다른 사람이랑….”
“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저 오페라 좋아합니다.”
“……그래, 알았어. 천천히 대답해도 돼.”
랩이라도 하는 것처럼 우다다 답하는 카이네스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얘가 이렇게 오페라를 좋아했었나…? 하긴, 전에도 그 지루한 삼류 오페라를 혼자 재밌게 보고 있긴 했었지.’
에스타는 가방에 넣어 두었던 오페라 표를 꺼내 카이네스에게 한 장 내밀었다.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카이네스는 품 안에 표를 소중히 넣으며 인사했다.
“조심히 다녀와.”
에스타가 손을 흔들어 주자 카이네스도 조심스럽게 손을 흔들다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