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황실에 도착하자 페뷰어와 황태자의 칙서를 가져다준 전령이 같이 서 있었다.
“오라버니!”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의 목을 꽉 끌어안은 에스타가 귀엽다는 듯, 페뷰어는 흐뭇하게 웃으며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물론이지. 에스타는?”
“페뷰어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잘생긴 용안은 여전하시네요.’
에스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페뷰어를 올려다보았다.
가지런히 모아 쥔 양손을 심장에 대고 눈을 반짝이자 페뷰어가 씩 웃음을 흘렸다.
‘아앗, 눈부셔.’
“역시 오늘도 잘생기셨어요. 그 누구라도 한눈에 반하고 말 거예요.”
“에스타야말로 오늘따라 정말 예쁘구나.”
남매의 주접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 건 그 사이에 끼지 못한 전령이었다.
“흠흠!”
칙사의 잔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린 페뷰어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제 가시죠.”
칙사는 앞서 걸으며 황태자가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에스타는 조용히 뒤를 따르며 페뷰어의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도 함께 가는 거예요?”
“아쉽게도 그건 안 될 것 같구나.”
“정말 아쉽네요.”
에스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페뷰어를 만나자마자 앞으로의 일을 잠시 까먹고 말았다.
‘정신 차리자. 그냥 놀러 온 게 아냐.’
에스타는 제 볼을 착착 때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페뷰어의 눈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나날이 예뻐지는 에스타를 보니 며칠 전에 찾아와 대뜸 에스타가 뭘 좋아하냐고 묻던 황태자가 떠오른 탓이었다.
“에스타, 황실에서는 늘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단다. 특히나 폐하와 전하 앞에서는 최대한 말을 아껴야 해. 알았니?”
“네, 가문에 폐 끼칠 일 만들지 않을게요.”
페뷰어가 걱정하는 문제는 에스타만 조심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에스타는 걱정하지 말라며 크게 웃어 보였다.
* * *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꿀꺽, 긴장 때문에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자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페뷰어는 진작에 돌아갔고, 온실 문을 열면 황태자 혼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어서요.”
거참, 되게 보채네.
저번부터 성격 급한 칙사의 보챔에 에스타는 벌컥 문을 열었다.
“우와.”
에스타의 입에서 절로 환호성이 터졌다. 포근한 온기를 품은 온실에 녹빛으로 물든 정원이 아름다웠다.
길게 늘어진 잎사귀를 가진 나무에 새들이 앉아 지저귀기까지 하니, 에스타는 제 마음마저 평화로움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모퉁이만 돌면 황태자가 기다리고 있을 거란 사실도 잊은 채 멍하니 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실이 마음에 드나?”
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에스타가 소리를 질러 버렸다.
“으악!”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을 겨우 부여잡고 고개를 돌리자 눈을 말똥하게 뜬 금발의 미남자가 보였다.
둥근 눈과 부드러운 인상을 가졌고, 키는 페뷰어와 비슷해 보였다.
에스타는 그를 살피느라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많이 놀랐나 보네.”
“아, 아닙니다!”
에스타는 황급히 주춤거리며 물러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악역이 왜 여기에 있지! 자리에 있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문 뒤에서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에스타가 몇 번이고 소리 질러 죄송하다며 사과하자, 되레 루안이 멋쩍어했다.
“미안하군.”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루안은 에스타와 잘 지내고 싶었다. 제게 무척이나 필요한 인재이기에 첫인상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만나서 반가워.”
루안이 먼저 인사를 건네며 손을 뻗었다.
에스타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맞잡았다.
“에스타 베일리 페이시아입니다. 전하에게 축복이 늘 함께하기를.”
“그대도.”
원래 귀족들이 인사할 때 손을 잡던가? 그건 사업하는 사람들이나 그러지 않나?
의아한 것도 잠시였다. 루안이 익숙하게 에스타의 손을 잡아 에스코트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몸에 밴 사교 스킬이었다.
“먼저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첫 만남부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됐어. 그대를 놀라게 한 나도 잘한 건 없으니.”
소설 속 악역치고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웠다. 에스타는 속으로 무척 놀랐다.
‘하긴, 얼굴도 만만찮게 착하게 생겼네….’
하얗고 말랑말랑하게 생긴 것이 꼭 찹쌀떡 같았다.
오히려 남주인공인 카이네스가 더 무섭게 생긴 편이긴 하다.
오늘 같이 오지 못해 어깨를 축 늘어뜨리던 카이네스가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귀와 꼬리까지 축 늘어뜨린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떠오르자 딱히 카이네스도 무섭게 생긴 건 아닌 것 같았다.
“어서 가서 앉지. 차가 식겠어.”
‘웃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다행인가?’
루안은 한참이나 낮은 에스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평소 꽃을 좋아하나?”
“그런 편입니다.”
루안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에스타는 영문도 모른 채 마주보고 어색하게 웃어 주었다.
온실 안에 마련된 자리에 도착하자 루안이 에스타에게 의자를 살짝 빼 주었다.
“차는 다즐링으로 준비했는데 어떤가. 마음에 드나?”
“…네, 물론입니다.”
루안은 또다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 왜 이렇게 부담스럽게 굴지?’
에스타는 진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루안은 베이지색 바지와 흰 셔츠를 입은 채, 그 위에 베스트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단정하게 매인 크라바트가 그의 부드러운 외모와 잘 어울렸다.
늘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저택을 돌아다니는 카이네스와 대조되었다.
그도 얼굴만 보면 남자 주인공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소설 속 그의 모습을 알아서인지 에스타에게는 싸하게만 보였다. 마치 정체를 숨긴 흑막처럼.
“신경 써서 준비하도록 했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군.”
루안이 준비된 다과 접시를 에스타 쪽으로 살짝 밀어 주며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영애들이었다면 분명히 그에게 반했을 거다.
정작 그 미소를 받은 에스타는 떨떠름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낯선 반응에 루안이 난처한 표정으로 눈썹을 문질렀다.
“이 자리가 많이 불편한가 보군.”
이런 생황에서 제 요구를 말하기엔 굉장히 애매했다.
결혼까지 한 그녀에게, 황실에 마탑을 세울 예정이니 몸 바쳐 일해 달라고 명하면, 페이시아 공작 가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소유욕 강하고 폐쇄적인 그 망할 공작가가 그녀를 꽁꽁 숨겨 버릴지도 모른다.
그녀가 먼저 마탑에 흥미를 보여야 했다.
루안은 최대한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타를 바라보았다.
“아, 아닙니다!”
에스타는 그의 말을 부정하며 양손을 휙휙 저었지만, 루안은 그다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루안이 살짝 손을 들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시종이 가까이로 다가왔다.
“아까 보좌관이 올릴 보고가 있다고 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나서 말이야.”
“제가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냐, 급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직접 다녀오지. 먼저 들고 있어.”
에스타는 공손히 고개 숙여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루안은 짧게 손 인사를 한 뒤 자리에서 벗어났다.
루안이 사라지는 걸 곁눈질로 쳐다보던 에스타는 그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루안은 여주인공인 헤른에게도 다정하게 굴지 않았는데 말이야.’
에스타는 눈앞에 놓인 버터 빵을 한 입 베어먹었다. 아침부터 공복이어서 그런지 무척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에스타는 다즐링 차까지 함께 마시며 맛있게 빵을 먹었다.
뒤에서 누가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제야 잘 먹네.’
루안은 행복하게 빵을 먹는 에스타를 보며 작게 웃었다.
에스타를 확인한 루안이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조용히 물었다.
“시킨 대로 잘 처리했나?”
“전하의 명대로 인부를 시켜 폭발물을 설치했습니다. 작지 않은 피해를 만들었으니 당분간 페이시아 소공작은 뒷수습하느라 바쁠 겁니다.”
루안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했어.”
이로써 에스타는 한동안 홀로인 셈이다. 가문 일로 바쁠 소공작을 따돌리고 에스타를 회유하기에 딱 좋았다.
“당분간은 페에시아 소공작이 황실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그의 보좌관이 충실하게 고개 숙여 답했다.
이십 년 전이었다. 루안이 어린 페이시아 소공작의 손을 잡았을 때, 그가 마력을 가진 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마법에 관심이 생겼으나, 아쉽게도 루안은 마력 보유자가 아니었다.
다만 가벼운 터치만으로 상대방에게 마력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특이한 체질이었다.
과거, 페이시아 공작가의 아들인 카이네스의 탄생을 축복하면서 그에게 마력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 외 마력 보유자를 찾은 건 에스타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페이시아와 결이 다른 마력이었다. 그녀는 뜨겁고 더 화려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에스타에게 물었다.
“왜, 더 먹지 않고.”
그는 포크를 내려놓는 에스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친근하게 장난치는 듯한 표정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신들리게 빵을 먹던 에스타가 제가 나타나자마자 올곧은 자세를 취했다.
그만큼 저를 불편해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그렇게 불편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좋아한다는 남편 없이 혼자 봐서 그런가.’
루안은 평소 잘 짓지도 않는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말했다.
“빵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원한다면 더 만들어 줄 수 있어.”
“너무 저만 먹는 것 같아서요.”
왜 더 먹지 않냐는 그의 질문에 에스타는 반이나 비어 버린 그릇을 바라보았다.
에스타는 많이 먹어 배부르단 소리를 에둘러 한 거였는데, 루안은 대뜸 빵 하나를 집어 버터와 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루안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천천히 빵을 씹었다.
“맛있군.”
‘표정은 맛없다고 하는데요?’
루안은 한입 먹은 빵을 내려놓고 차를 들이켰다.
“어서 더 먹도록 해. 편히.”
‘…더 불편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