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83)

35화

에스타는 빵을 먹은 루안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사실 전 배가 불러서요.”

“아, 그런 거였군.”

루안은 찝찝한 입가를 냅킨으로 닦으며 답했다.

“단 걸 싫어하시는 거 같은데 굳이 드시지 마세요.”

“티가 났나?”

루안이 픽 웃으며 물었다. 에스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안이 의자에 느긋이 등을 기댔다.

“맞아. 사실 단 걸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 차라리 쓴 커피가 더 입맛에 맞아.”

“그런데 굳이 크림까지 발라서 드셨어요?”

“부인이 너무 맛있게 먹길래 얼마나 맛있나 싶어서.”

루안의 말에 에스타가 흠칫 놀라 찻잔을 쥔 손을 떨었다.

루안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영애와 신년제 파트너가 되지 못해서 서운하군.”

“아, 네. 뭐……. 저도 무척 아쉽습니다.”

“반응이 참으로 재밌어.”

‘이걸 재밌어해? 무례한 게 아니고?’

에스타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기분 좋게 웃는 루안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을 사랑하기로 유명하던데. 오늘 남편과 같이 오지 못해서 서운한가?”

“제 서운함이 중요할까요.”

“보기보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편이군.”

루안은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매수하기 쉬웠으니까.

돈이든 선물이든 퍼부을 계획이었는데, 소용없을 듯했다.

마탑주에 앉아 달라는 말을 선뜻 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실을 주축으로 마녀사냥을 거행했었던 일이 아주 오래된 과거가 아니었다.

전대 황대 폐하께서 특히나 마법을 두려워했었기에 마녀사냥을 일으켰고,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힘을 쓰는 페이시아를 멀리했다.

마법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숨기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대뜸 마탑자리를 제안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황실이 저를 시험하려 한다며 카이네스가 숨기기 전에 스스로 숨어 버릴지도 몰랐다. 어디 멀리 도망이라도 간다면 큰일이었다.

눈앞에서 에스타가 사라지는 걸 똑똑히 봤던 루안은 천천히 에스타와의 거리를 좁히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친분을 쌓는 게 먼저였다.

“이대로 신년제 레이디의 자리를 놓치는 건 아쉬울 테니 그대가 바라는 게 있다면 한 가지 들어주도록 하지.”

루안이 여유롭게 웃으며 가느다란 검지를 펼쳐 보였다.

이 소원으로 그녀가 무얼 원하는지, 무엇을 가지고 싶어 하는지를 떠보고 싶었다.

얼토당토않은 걸 원한다면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겠지.

“무엇이든 좋아.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지.”

예상 못 한 루안의 제안에 에스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가 부탁할 게 있다는 어떻게 알았지?’

에스타는 루안의 꿍꿍이가 뭘지 궁금했지만, 일단 한번 찔러 보기로 했다.

“혹시 서고에 출입할 권리를 얻을 수 있을까요?”

에스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루안의 눈썹이 삐뚜름해졌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책을 좋아하나?”

“네!”

에스타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책에 미친 사람으로 보여야 들어줄 것 같았다.

“원하는 게 그거라면 들어주지.”

“전하, 감사합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에스타가 활짝 웃어 보였다. 루안은 답하는 것도 잊고 에스타를 바라보았다.

‘청탁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자신이 들은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사치와 향락이 심하고 카이네스에 반쯤 미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는 미친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와 비슷한 금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는 전체적으로 색이 옅어 야리야리한 느낌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강단하게 빛났다.

그 뒤 가벼운 대화가 오가며 분위기가 살짝 풀어졌다.

에스타는 루안이 악역이라고 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대했고, 루안은 그녀와 편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루안은 허전한 에스타의 목을 보며 물었다. 기껏 선물했는데 끼지 않은 걸 보니 조금 아쉬웠다.

‘소공작을 놀려먹을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야.’

루안의 시선을 느낀 에스타가 목을 쓸며 대답했다.

“루비 목걸이 말씀이시죠? 너무 예쁘던걸요.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전하.”

“끼기에는 그대의 안목에 모자랐던 것은 아니고?”

불현듯 평소 말버릇이 나와 버리고 말았다. 루안은 아차 싶어서 입을 꽉 다물었으나 이미 뱉은 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너무 예뻐서 착용하기가 아깝던걸요. 전하의 선물을 평소에 낄 수는 없으니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바꿔 주려고 했었지. 귀걸이든 뭐든.”

그녀에게 점수를 따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루안은 황급히 말을 덧붙이며 환히 웃어 보였다. 최대한 순진하고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건 루안에게 아주 쉬운 일이었다.

‘내가 너무 나쁘게만 봤나.’

에스타는 은근히 양심이 찔려서 그에 대한 경계를 살짝 풀었다.

소설에서는 무척 음습한 사람이었다. 제 황위권을 지키기 위해 헤른을 이용해 먹었으니까.

그렇다고 헤른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랑했지만, 그는 황위를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했을 뿐.

딱 후회남의 정석 루트를 밟는 악역 서브남이었다.

‘아마 완결쯤에서는 후회하며 구르고 또 구르지 않았을까?’

에스타가 딴생각에 빠졌을 무렵, 그의 보좌관이 찾아와 그에게 귓속말로 말을 건넸다. 일과 관련된 얘기였는지 루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만나서 반가웠어.”

“저도 영광이었습니다, 전하.”

루안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인사는 없는데.’

에스타는 의아했지만 황태자의 인사를 거부할 수도 없어 손을 맞잡았다. 황태자와 손을 잡을 때에도 묘하게 열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럼 조심해서 가지. 서고 출입은 허락해 둘 테니 언제든지 오도록 해.”

루안은 흡족하게 웃어 보이곤 제 보좌관을 먼저 내보냈다.

‘따로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에스타가 의아하는 찰나 루안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나지막하게 말했다.

“볼에 생크림이 묻었어.”

톡톡. 그가 손으로 제 볼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 모습에 에스타는 볼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여태껏 묻히고 있었단 말이야?’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볼을 닦았지만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에스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키득거리는 루안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사실 거짓말이었네.”

그러곤 유치한 장난까지 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멀쩡한 모습으로 온실에서 벗어났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소설 속에서 루안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캐릭터인데. 대체 뭘 위해서 내 환심을 사려는 걸까.’

에스타는 혼란스러웠다. 원작 속에서 어둡고 음습했던 루안은 어디로 가고 저렇게 말랑콩떡이가 왔을까 하고.

* * *

에스타는 카이네스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오페라 극장 앞에 일찍이 도착했다.

오페라를 보러 온 사람들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카이네스가 오길 기다렸다.

“곧 시작하는데….”

다리가 아파지기 시작할 무렵, 오페라 극장 안에서 환호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오페라가 시작됐다는 의미였다.

“…설마 나 바람맞은 거야?”

에스타는 황당해서 헛웃음을 뱉었다. 더 기다리는 것도 의미 없을 것 같아서 저택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때, 로브를 뒤집어쓴 채 나무 뒤에 숨어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설마 카이네스? 설마 또 마력이 증폭돼서 몸이 커진 건가?’

190cm에 육박하는 사람이 판타지 세계라고 흔한 건 아니었다. 에스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하세요?”

남자는 어깨를 움찔 떨더니 휙 몸을 돌렸다.

‘카이네스 맞구나.’

에스타는 그가 오페라를 보러 오지 못한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됐다.

‘이제 그냥 대놓고 다니네. 들켰다는 자각은 없는 것 같지만.’

몸이 커졌으면 어딘가에 숨었어야지, 여기엔 왜 온 걸까.

에스타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카이네스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로브를 푹 뒤집어쓴 채였다. 금방이라도 도망칠 것 같아서 에스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모른 척하며 인사를 건네자 카이네스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때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카이네스였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야시장에서 납치범이라 소리치지 않았을 거다.

“아…니요….”

에스타는 어른 버전인 카이네스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

‘이게 남주님의 목소리!’

에스타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차나 한잔 마실래요? 저어기 노상 카페에서 커피 두 잔 사 올게요.”

그녀가 홀린 듯이 손가락 두 개를 펼치자 카이네스는 당황스러운 듯이 머뭇거렸다.

‘싫은 건가?’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그… 제가 불편하신가요?”

카이네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강변에서 기다려 주세요. 제가 커피 사 갖고 갈게요.”

카이네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혼자 기다릴까 봐 직접 온 걸까. 사람을 시켜도 되는데.’

에스타는 몰래 미소를 지었다. 순진한 그의 모습이 귀여워서 비밀을 알고 있다고 사실대로 말하기 전에 조금만 놀려 주고 싶었다.

“여태까지 비밀을 숨겨 왔으니 조금은 놀려도 되잖아.”

에스타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양손에 커피를 들고 카이네스가 기다리고 있는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제국의 날은 아직 쌀쌀했고, 이 늦은 시각에 어두컴컴한 강변에 모일 이유는 없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정체를 안 들켰다고 생각한 카이네스는 아까보다 편하게 대답했다.

에스타가 웃음을 참기 시작했다는 것도 모른 채 순진하게 커피를 마셨다.

“오늘 여기에 일이 있으셨나 봐요?”

“약속이 있었는데 피치 못한 일이 생겨서요.”

카이네스가 기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소중한 사람을 바람맞히고 말았습니다.”

‘그거 내 얘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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