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83)

36화

요즘 잘 대해 주긴 하지만, 소중하단 말을 그에게서 직접 들으니 낯이 간지러웠다.

“오페라를 보러 오셨습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에스타가 짓궂게 물었지만 카이네스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오페라 극장 앞에 계셨으니까요.”

“그럼 우리가 극장 앞에서 마주친 게 정말 우연이라고요?”

“….”

카이네스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정말 제게 관심이 많으시네요. 제가 누군지도 아시는 분이.”

에스타는 카이네스를 놀리며 키득거렸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먼저 밝힐 의향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카이네스 특유의 친근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자꾸만 어렸을 때 모습과 겹쳐 보였다. 더 순진하고 귀여웠었던 카이네스가.

‘덩치는 집채만 한데 왜 더 어려 보이는지 모르겠네.’

에스타는 할 수만 있다면 이 덩치 큰 남자의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어 놓고 싶었다.

“에스타야말로 모르는 사람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건 좋지 못합니다.”

자신의 장난에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건지 카이네스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제 손수건을 들고 다니시고. 그거 때문에 수상쩍었던 건 아시죠?”

“그건….”

사실 에스타가 정체를 몰랐다면 아직도 수상하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푹 뒤집어쓴 로브, 수상한 행색, 어두컴컴한 장소까지.

에스타의 얼굴에는 걱정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카이네스의 걱정을 부추겼다.

“제가 수상쩍으면 피하셨어야지요.”

걱정하는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지하 땅굴을 파는 듯했다.

‘그 말이 그렇게 하기 힘든가?’

에스타는 카이네스 몰래 웃음을 참으려 아랫입술까지 꽉 깨물었지만 소용없었다.

에스타는 한참을 몰래 웃은 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쓱 닦으며 말했다.

“수상쩍은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서 커피 마시자고 한 거예요.”

“어떻게 아십니까?”

“그냥 감이요.”

카이네스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에스타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알고 있단 말을 언제 하지.’

에스타는 어쩐지 그가 로브 안에서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도 바람맞았는데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얘기하다 보니 꽤 재밌네요.”

에스타가 놀리는 건 줄 몰랐기에 카이네스는 당황하고 말았다.

‘이렇게 커 버린 나를 더 편하게 대하는 것 같은데.’

카이네스는 혹시나, 에스타가 자신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는 것은 아닌지 고민되었다.

대놓고 계약 결혼이라며,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고 딱 잘라 말한 에스타였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카이네스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선득해진 걸 느꼈다.

“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카이네스가 딱딱한 목소리로 답했다.

‘기분 나빠졌나?’

에스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딱 알맞게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달기만 하고 향이 옅은 커피였지만 꽤 먹을 만했다.

* * *

카이네스가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면 진작에 말했을 거였다.

결혼하기 전에 야시장에서 만났을 때라든가. 계약 결혼 얘기가 오고 갔을 때라든가. 그도 아니면, 며칠 전에 만나고 나서 사실을 고백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카이네스는 그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아무렇지 않은 척 찾아와서 아침 식사를 권했고, 어젯밤 무례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사건 현장이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했지.’

에스타는 그 핑계 아닌 핑계를 들으며 그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걸 포기했다.

카이네스는 그 비밀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은 듯했다. 그런 걸 굳이 파헤치는 것도 무례한 것 같았다.

그가 준비가 되었을 때, 먼저 진실을 말해 줄 때, 사실은 알고 있었고 자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 줄 생각이었다.

에스타는 건설업 문제로 아침부터 사라진 카이네스에게 쪽지를 남기고 외출을 했다. 황태자가 허락해준 황실 서고에 가는 길이었다.

그녀의 목적지는 황실에서 허락한 학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제2 서고였다. 

에스타는 긴장된 얼굴로 서고에 들어섰다.

입구부터 정갈하게 정돈된 수천 권의 책이 책장에 꽂혀 일렬로 정리되어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이 끝없이 줄지어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책이 많았다.

심지어 일 층도 아닌 중앙에 계단이 있는 거로 보아 눈에 보이는 것보다 책이 많단 소리였다.

“우와.”

숨 막힐 정도로 방대한 양에 에스타가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았을 때, 그녀의 입에서 다른 탄성이 터졌다.

“헉.”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루안이 세 번째 책장 뒤에 서서 책을 보고 있었다.

에스타가 놀라 숨을 뱉으며 동시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작은 소란에 루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거 참 우연이네.”

루안은 소리를 낸 사람이 에스타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눈을 맞췄다.

“그 입을 틀어막는 건 버릇인가?”

루안이 손으로 입을 톡톡 두드리며 짓궂게 웃었다.

“아니면 내가 그대를 늘 놀라게 하는 건가.”

사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었다. 에스타가 황실 서고에 출입할 거란 연락을 보내 왔으니.

하지만 자신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놀랄 것은 없지 않은가.

황실 밖에서는 고아한 황태자로 소문난 루안은 늘 자신을 무서운 짐승이라도 본 듯 구는 에스타가 의아했다.

“책을 좋아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가 봐.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달려오다니.”

루안은 책을 좋아했다. 제 취미를 물어본다면 독서라고 말할 정도였다.

굳이 황실에 제2 서고를 만든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루안이 제 취미를 집대성한 곳이었다.

보석이나 귀걸이, 목걸이를 좋아한다는 영애는 흔했다. 자신의 관심을 끌려고 별 시답잖은 취미를 자랑하는 영애들 역시 숱하게 만났었다. 그중 독서가 취미라던 영애들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고작해야 연애 소설이나 희극 대본을 보는 게 다였다. 역사, 외교, 인문학 책에 관심은커녕 문외한인 이들이었다.

“왜 전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변명할 필요 없어. 의심이 아니라 신선해서 그런 것뿐이니까.”

루안은 오랜만에 동지를 만난 기분으로 에스타에게 웃어 보였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보이는 진실된 웃음이었다.

“전하께서도 책을 보고 계셨나요?”

에스타가 루안의 손에 들린 책을 보며 물었다.

“플란데스타의 모험이야.”

이 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작가가 유명해진 이후에 여행을 다니며 쓴 조각 글을 모아 둔 것이었는데, 여행 도중에 사고를 당하여 끝내 책은 출간되지 못했다. 이 글이 그의 유작인 셈이었다.

주변 지인 작가들이 안타깝게 여겨서 겨우 출간했지만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

평소 작가의 글을 자주 보았던 루안은 그 글을 무척 좋아했다. 읽고 또 읽어도 글의 결말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여행에 대한 조각 글이었음에도 그 속에 뜻이 있는 것 같아 작가의 의중이 궁금해졌다.

루안이 책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에스타는 책의 이름을 듣자마자 픽 웃음이 터졌다.

“네, 압니다.”

‘저걸 아직도 보고 있네.’

원작에서도 잊을 만하면 나오던 책 이름이었다. 작가가 여행을 다니며 글을 썼다는데 루안의 최애 책인 것 같았다.

수십 번도 더 봤는지 저 책만 너덜너덜하게 해졌고, 손때가 묻어 있었다.

“이걸 아는 자는 드문데….”

“아, 저도 읽어 본 건 아닙니다. 구하기가 힘든 책이니까요.”

“원한다면 빌려 가도 좋아.”

루안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대답했다. 이 책을 먼저 선뜻 빌려주겠다고 말한 건 충동이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 책을 읽은 뒤 감상평을 알려 줬으면 해.”

빌려주겠다고 먼저 말한 사람치고 협박 어린 말투였다.

루안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웃어 보였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에스타는 곤란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게 뭘 원하길래 책 독후감까지 써 오라는 건지.’

루안이 건넨책을 받은 에스타가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책을 보러 가겠습니다. 전하께서도 편히 책 보세요.”

작게 말했지만, 아무도 없는 조용한 서고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루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에스타는 가볍게 묵례한 후 자리를 떠났다.

에스타는 사라졌지만 루안은 그 자리를 떠날 수도, 다른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조용히 숨죽이자 멀리서 에스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 책을 고르는 듯 작은 소리까지 들렸다.

그녀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단 스스로를 인식하자마자 루안의 귓불이 확 달아올랐다.

“단단히 미쳤군.”

얼마 지나지 않아 루안이 서고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지 발걸음이 재빨랐다. 문을 닫는 소리도 조심성이 없었다.

‘서고에선 조용히 좀 하지, 진짜.’

에스타는 닫힌 문을 보곤 눈을 흘긴 뒤 다시 책을 찾는 데 전념했다.

책이 너무 많아서 마력에 대한 책을 찾는 데에 몇 달은 걸릴 것 같았다.

에스타는 요즘 마력이 마음대로 들끓는 일이 줄어들었다. 함께 살고 있는 카이네스 덕분일 것이다.

정작 카이네스는 마력이 잘 조절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릴 때보다 더 조절이 안 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며칠 전, 식사하던 중 그가 돌연 물을 얼려 잔을 깨트려 버리고 말았다. 그때 당황한 것 에스타뿐만이 아니었다.

그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잘 조절되던 마력이 들끓다니, 왜?

의문을 품던 에스타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세상에, 설마 각성할 때가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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