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83)

37화

에스타는 원작에서 카이네스가 각성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전쟁을 마친 카이네스는 전야제에서 모두의 축하를 받는다. 하지만 카이네스는 전쟁으로 이룬 모든 게 부질없다고 느꼈고, 황실을 거닐다가 그만 정원에서 길을 잃고 만다.

잃어버린 길 끝에서 헤른을 발견하게 되고, 서로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얘기를 나누게 된다.

카이네스는 첫눈에 헤른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지만, 헤른이 황후인 걸 알게 된 이후론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문제는 그 뒤부터였는데….

헤른을 사랑하게 됐다는 걸 깨닫자, 평온했던 그의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마력이 제어되지 않자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듯 아스텔 제국은 늘 비바람이 몰아치게 된다.

그게 카이네스 때문인 걸 알아차린 헤른은 그를 도와서 마음을 잠재우길 돕는데, 그 방법이 19금 일 뿐이었다.

그 이후 마력을 다스리는 법을 새로 배웠고, 카이네스는 마법을 사용할 때면 늘 헤른을 떠올렸다.

전과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진 카이네스는 모두에게 신이라 불렸다. 드디어 각성한 것이다.

‘후후, 그 부분이 참 기억에 남는구만.’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에 에스타가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요즘 들어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카이네스가 떠올라서 에스타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헤른을 만난 것도 아닌데, 왜 마력을 제어하지 못할까?

며칠 전, 카이네스는 식사 중 돌연 물잔을 얼려 깨트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수이겠거니 싶었는데, 오늘 아침 꽝꽝 얼어 있는 정원 호숫물을 보고야 확신했다.

요즘 카이네스는 제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

원작에서 중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내용이었다. 완벽한 남주님은 단 한 번도 마력을 다루지 못한 적 없었는데.

“혹시 만났나…?”

말하지 않았지만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이미 카이네스와 헤른이 첫 만남이 이뤄졌을지도 모르지.

자신이 에스타의 몸에 빙의한 이후 원작은 틀어졌다. 둘의 첫 만남이 꼭 황후의 정원에서 벌어진단 법칙이 없어진 것이다.

“세상에!”

에스타는 볼을 붉히며 소리쳤다.

“오늘 카이네스한테 꼭 물어봐야지!”

너무 들뜬 나머지 에스타는 마력 관련 서적을 찾아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책장 사이에서 몇 번이나 더 소리를 지른 뒤에야 이성을 붙잡은 에스타는 다시 마력 책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영 집중이 되질 않았다.

* * *

카이네스는 문제가 생겼다는 건설 현장을 다시 찾았다.

페이시아의 작은 주인의 등장에 인부들이 전부 힐끔거리며 경직된 모습으로 움직였다.

그 사이를 유유히 걷는 카이네스 옆에 처음 보는 남자가 붙어 있었다.

긴 보라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안경을 쓴 단정한 모습의 남자였다.

“공작님께서 빠른 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지만, 소공작님께서 직접 오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남자의 이름은 루이셀. 페이시아 공작의 보좌관이었다.

카이네스는 루이셀의 만류를 들은 척 만 척하며 계속 걸어갔다.

현재는 사고가 나서 무너져 내린 곳에 따로 줄을 쳐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 놓은 상태였다.

“여기는 왜 막아 두셨습니까? 건물 올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여기는 기둥이 올라갈 자리 아닙니까. 사건 현장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많은 시간을 허비할 텐데요.”

“그러니까 자네까지 불러 처리하려는 거 아닌가.”

카이네스가 짧게 대꾸하며 눈을 찌푸렸다.

루이셀의 장점이라면 빠릿빠릿하고 일을 잘한다는 거지만, 너무 말이 많았다.

“아, 그렇군요.”

루이셀이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흩뿌려진 파편을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무너져 내린 흔적이 사고에 의한 것 같진 않은데요. 기둥을 파손한 흔적은 없고 골조가 약해 넘어졌다지요?”

“인부의 증언으로는 그렇다는군.”

“그러면 기초가 부실해서 생긴 일이니 부지를 더 탄탄하게 만들고, 기초 공사에 사력을 기울이라 명하겠습니다.”

루이셀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인부장를 부르기 위해 떠났다.

사건 현장에 남은 카이네스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기둥이 무너질 정도로 큰 사건인데, 인명 피해는 이상할 정도로 적었다.

기둥은 이어져 있어 한 기둥이 무너진다면 다른 기둥도 연달아 무너져야 할 텐데 기둥 하나만 무너진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것도 고치는 데 제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기둥이 무너졌다니.

“이상한데….”

카이네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이미 몇 번이고 뒤졌지만 의아함이 풀리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낸 사고 같단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사고를 냈다면,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이득될 일도 없을 텐데.

이 사건으로 페이시아 가문이 손해를 입었나?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저 시간만 허비할 뿐.

그렇다면 명예가 떨어졌나?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 인부들을 벌하지 않은 페이시아를 칭송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소공작님.”

인부장이 부리나케 달려와 카이네스 앞에 섰다.

“사건 현장을 수습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적어도 한 달은 걸립니다. 이곳이 중심이라 부지 기초를 다시 다지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카이네스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공작이 영지로 내려간 뒤로 처음 도맡은 일이 호텔 사업이라서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카이네스의 표정이 좋지 못하자 인부장이 고개를 푹 숙이곤 재빨리 말했다.

“최,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사건을 처음으로 목격한 자가 누구지?”

“그자는 왜….”

“그자를 불러와.”

카이네스의 명령에 인부장은 결국 인부를 불러왔다.

그는 행색이 초라했고, 손에 굳은살이 많은 자였다. 인상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꼭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것처럼.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다지 아는 게 없습니다만….”

인부는 잔뜩 겁을 먹을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요새 일이 많으십니까? 혹 인부장이 밤에도 일을 시키는 겁니까?”

아스텔 수도에서는 밤에 근무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불이 없고 기후 변화가 심해서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절대 아닙니다요!”

인부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아,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닙니다. 좀 힘들어 보여서요.”

루이셀은 인부에게 친근하게 굴며 질문을 던졌다.

이럴 때면 루이셀의 장점이 돋보였다. 말이 많은 것.

카이네스는 제가 묻지 않아도 술술 말을 뱉고 있는 인부를 쳐다보았다.

“요즘 밤에 잠을 자지 못해 그럽니다. 귀하신 분들께 추레한 모습을 보여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잠을 못 잔다니요.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아… 그게, 딸 아이가 많이 아파서요….”

짧은 사이 카이네스는 보고 말았다. 인부가 불안한 얼굴로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딸 아이가 많이 아픈가?”

“네, 무척이나요.”

인부의 표정이 무척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치료가 필요하겠군.”

카이네스는 담담히 말하며 옷에 붙은 자신의 단추를 하나 뜯어냈다. 페이시아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페이시아 공작가로 찾아오도록 해. 이 증표를 내밀면 페이시아 공작가의 연이 닿는 모든 곳에서 도움을 줄 테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부가 연신 허리를 숙이며 그에게 인사했다.

카이네스와 루이셀은 곧장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에 올랐다.

그제야 루이셀은 궁금했던 점을 그에게 물었다.

“그 인부에게 왜 증표를 주셨습니까?”

“도움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단순히 인정 때문이라고요…?”

루이셀이 못 믿겠다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 인부가 내 눈치를 보더군.”

“그 어떤 평민이라도 귀족을 만나면 눈치를 보겠죠. 게다가 소공작님이 그냥 귀족입니까? 대귀족 아닙니까. 그 인부는 제가 일하는 곳에서 제일 높은 상사를 만났으니 긴장할 만하죠.”

루이셀은 그 인부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101가지로 댈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단순히 감이야. 그 인부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아니라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민 셈 치면 돼. 난 더 인자한 소공작이 되겠지.”

“…아, 네.”

그렇게 말이 많았던 루이셀이 짧게 답하곤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까지 닮으셨을 줄이야.’

루이셀은 어렸을 적부터 반평생 이상을 공작의 보조관으로 살았다. 공작의 어렸을 적 모습이 카이네스에게 반영되어 보여 순간 말을 잃었다.

이 말을 공작과 소공작에게 하면 둘 다 끔찍하게 싫어하겠지만.

“저택으로 돌아가지.”

루이셀은 호텔 문제로 잠시 영지에서 올라온 참이었다. 문제만 해결된다면 곧장 다시 영지로 내겨 갈 예정이었다.

“저택으로 가면 소공작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까?”

“왜 들뜬 얼굴이지?”

“처음 인사하는 자리니까요. 결혼식장에서는 멀리서 잠깐밖에 뵙지 못했단 말입니다. 엄청난 미인이시던데요?”

루이셀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름의 아부였지만 카이네스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인단 말이지.”

“네?”

“내 아내가 미인이라고.”

“…네.”

카이네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짧은 욕설까지 뱉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십니까?”

그 예쁜 아내가 혼자서 황실에 다니고 있다는 게 문제지.

황실에서 그녀를 보는 눈이 몇 개일까. 그 눈을 모두 파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녀를 모두가 보지 못하는 곳에 꽁꽁 숨겨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인데.

카이네스는 그녀가 황실에 다니는 게 불만이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제 구차한 질투 때문에 에스타가 황태자에게 얻어 낸 황실 서고 출입권을 취소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나 책을 좋아했다니. 아무래도 서고를 다시 지어야 할까 봐.’

생각해 보니 좋은 방법인 듯해 카이네스는 곧장 실행에 옮겼다.

“수도 저택에 서고를 지어야겠어.”

“…갑자기 웬 서고입니까?”

루이셀의 물음은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카이네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곧 에스타의 성년식이었다. 성년식의 선물로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규모는 황실 제2 서고에 비견될 만큼 아주 크게 지을 거야.”

콕 집어 말한 탓에 루이셀은 그가 돌연 서고를 짓겠다는 진짜 속뜻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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