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1/83)

40화

카이네스는 제 건설 현장에 문제를 일으킨 인부를 적당히 처벌할 생각이었으나 생각을 바꾸었다.

“이렇게 하죠. 그냥 제가 눈치챈 거로요. 당신이 오늘 찾아온 건 딸 아이에 대한 감사를 하러 온 거죠. 대화를 나누던 중에 제가 실마리를 잡았고, 눈치챘고요. 당신은 제가 눈치챈 것조차 모른 거로 해요.”

카이네스가 얘기하는 동안 인부는 바닥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소공작이 도통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이해한 듯했다.

그를 지켜보던 카이네스가 한쪽 무릎을 꿇어 인부의 앞에 앉았다.

아까와 다른 차가운 눈빛에 인부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지함은 용서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배신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잖아요. 그렇죠?”

“소, 소공작님….”

카이네스가 덜덜 떨리는 인부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마치 먹잇감을 보는 들짐승과 같았다.

“돌아가서 전해요. 아무래도 실수를 한 것 같다고.”

“하, 하지만 제가 어찌….”

“어떻게 그분을 만나겠냐고요?”

인부를 향한 황실의 감시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을 거다. 한낱 건설 인부를 매수한 것만 봐도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들키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찾아올 겁니다. 멀지 않은 날에.”

카이네스가 확신에 찬 눈으로 대답했다. 그는 루안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무엇을 바라는 건지, 이런 짓을 벌인 이유는 무언지.

* * *

“소공작이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루안은 자신이 매수한 인부에게 붙여 둔 심복이 찾아왔을 때부터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매수한 자가 배신이라도 했나?”

“그건 아닙니다만, 오늘 공작가를 찾았다기에 얘기를 나눠 보니 실수를 한 것 같다더군요.”

“실수?”

“건설 현장을 찾은 소공작이 인부의 사연을 듣고 딱하게 여겨 증표를 줬답니다. 그 증표를 들고 병원에 가니 딸아이를 살뜰히 살펴 준 덕분에 병이 다 나았다고 했습니다. 인부는 직접 감사를 전하기 위해 페이시아 공작저를 찾았고, 소공작이 맞이해 줬다고 했습니다.”

“소공작이 한낱 평민을, 그것도 제 밑에서 일하는 사람을 맞이했다고…. 한가하기도 하지.”

루안은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 손짓했다.

“소공작과 얘기를 나누었는데 당시에는 몰랐지만,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찜찜한 구석이 있더랍니다.”

“찜찜한 구석?”

“제가 생각해도 단순한 인부가 소공작을 만난 것 자체가 의문이라면서요.”

심복을 끝냈지만 루안은 한참이나 입을 떼지 않았다.

그저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겨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상관없을 것 같군. 소공작이 내가 저지른 일이란 걸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지 않았거든.”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알아채긴 했지만. 일이 아쉽게 됐다.

시간 끌기 용으로 벌인 일인데 벌써 꼬리가 잡히다니.

“건설 현장은 어떻게 됐나.”

“공사를 재개한다고 했습니다.”

쯧, 루안이 짜증스레 혀를 찼다.

공사가 재개되면 소공작의 일은 끝이었다. 뒤는 인부들의 일이었으니까.

“아쉽게 됐어.”

루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고르게 정돈된 넓은 부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마탑을 세울 자리로 점찍어 둔 곳이었다.

어두운 밤에는 등불 대신 마력석이 길을 밝힐 것이고, 수동으로 돌아가는 잡일 역시 마법의 힘을 빌릴 것이다.

루안은 제 꿈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걸 느끼면서도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나에게 마법의 힘이 있었더라면.’

아쉬움이 목구멍 끝까지 꽉 차올랐다.

“후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 폐하께서는 마탑을 허무맹랑한 계획이라 치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현 황후의 소생인 둘째 황자보다 자신을 더 총애한다는 거였다.

곧 황실 아카데미에서도 공식적으로 마법사를 길러 낼 것이다. 황실에서 마법 학부를 인정한다면 국민들이 가진 편견 역시 조금은 씻겨 내려갈 것이다.

그 초석을 다지는 일. 그게 루안의 몫이었다.

* * *

루안은 에스타가 오는 시간에 맞춰 황실 서고로 향했다.

에스타가 늘 찾아오는 제2 서고는 황태자의 개인 서고였다. 세상의 모든 책을 수집할 생각으로 만들었기에 크고 웅장했다.

루안은 그곳에 있는 책을 모두 한 번 이상은 읽었고, 위치 또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에스타가 어떤 책을 꺼내 보았는지, 루안의 눈에 너무도 잘 보였다.

‘제대로 읽은 책이 하나도 없네.’

그녀는 입구에 있는 책부터 한 줄로 쭉 훑은 것 같았다. 몇 권은 꺼내 본 것도 같은데, 읽은 흔적은 없었다.

설마 읽고 싶은 책을 못 찾은 걸까.

원하는 책이 있다면 찾아 줄 텐데, 매일 자신과 마주치면서도 말하지 않은 걸 보면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말할 수 없는 책을 찾고 있든지, 아니면 작은 부탁조차 하기 싫을 만큼 자신이 어렵다든지.

어렵다? 최근 그런 기색은 많이 줄었다. 마주치자마자 소리를 지르던 때도 있었으나 최근에는 가벼운 눈인사를 할 때도 있었다.

‘사이가 나쁘진 않지.’

에스타가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루안은 적당히 책을 골라 읽는 척했다.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타가 왔다는 뜻이었다.

* * *

에스타는 입구에서부터 마력에 관한 책을 찾아봤으나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제 자신이 훑은 곳까지 단번에 걸어갔다.

“하하, 안녕하세요.”

그런데 왜 또 황태자가 여기에 있는 걸까.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인사한 뒤, 드레스를 살짝 들어 보였다.

그러자 루안이 읽던 책을 접고는 책장에 집어넣었다.

‘어젯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책이네.’

헷갈릴까 봐 살짝 표시해뒀는데,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에스타는 내심 조마조마했다.

“오늘도 왔군. 반가워.”

루안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미래의 악역치고 상당히 밝은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외형을 가진 루안은 크림색에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준 황태자 의복을 입고 있었다.

밝은 금발까지 가진 그가 웃으니 반짝거리는 착시 효과가 생긴 것 같았다.

‘으아, 여기도 만만찮게 눈부시네.’

게다가 루안은 성인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산점이었기에, 오랜만에 에스타의 미남 레이더에 걸린 남자였다.

‘갱생 불가한 악역이란 점에서 탈락이지만.’

에스타는 마음속으로 루안의 이름 위에 검은 줄을 쫙쫙 그었다.

“전하께서도 상당히 책을 좋아하시나 봐요.”

에스타는 모른 척하며 말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해. 책을 읽을 때면 오롯이 혼자 있는 기분이 좋거든.”

알고 있는 대답이었다. 원작에서 봤었으니까.

루안은 정말 책을 좋아하는 듯 수줍게 말했다. 그 모습을 직관하니 에스타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쁜 악역인데 자꾸 착한 사람처럼 보여서 마냥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럼 책 보세요. 저는 이만.”

에스타는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며 그를 지나쳐 책장을 훑었다. 차근차근 제목을 눈으로 훑으며 마력의 ‘마’자만 보이는 책을 꺼내 첫 페이지를 읽었다.

집중해서 책을 찾던 에스타가 다음 책장으로 넘어가려던 찰나였다.

그녀는 루안이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뭐 하세요?”

“볼 책을 찾는 중이야.”

“…그러시군요.”

책을 찾는다면서 자신만 빤히 보고 있는 루안이 상당히 의심스러웠지만, 딱 잡아떼니 할 말이 없었다.

에스타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음 책장, 그리고 그다음 책장을 살필 때도 루안은 제 뒤에 서 있었다.

“…책을 보신다면서요.”

“보는 중이야.”

“책이 아니라 저를 보는 것 같은데요.”

“그거 자의식 과잉이야.”

루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고 있는 건….”

루안이 손을 쭉 뻗었다.

‘어? 나한테 오는 거 같은데.’

당황한 에스타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 책이었는데….”

당황한 루안의 목소리에 감았던 에스타가 감았던 눈을 떴다. 놀란 표정을 한 루안이 바로 눈안에 들어왔다.

그제야 제 등 뒤의 책장에서 꺼낸 책을 쥐고 있는 루안이 보였다.

“장난이었어. 놀랐다면 미안하군, 소공작 부인.”

“아, 아닙니다. 제가 무례를 저질렀어요.”

에스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왜 하필이면 장난에 속아 넘어가서 눈을 감냐고!

내면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루안은 심각한 얼굴로 볼을 문질렀다.

이상하겠지. 대외적으로 고상한 황태자 전하를 대하는 태도치고 너무 적대적이었으니까.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혹 내가 자네에게 무례를 저지른 적이 있나? 유달리 나를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결국 루안의 입에서 에스타가 염려하던 질문이 날아오고 말았다.

“아뇨, 없습니다.”

그녀는 루안처럼 잡아떼기로 했다. 아니라는데 지가 뭐 별수 있겠어?

“그렇군.”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책 한 권을 추천해 주지. 나와 취향이 비슷하다면 자네도 좋아하겠지.”

그러곤 어디론가 사라진 루안이 책 한 권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 이건….”

[당신이 알지 못하는 힘의 원리]

의아한 제목에 머뭇한 것도 잠시, 에스타는 책을 펼쳐 첫 장을 읽자마자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이건 마력에 관한 책이었다.

“금서잖아요, 전하. 혹 저를 놀리실 생각이라면 제발 무, 물려 주세요.”

하지만 제국법상, 마력에 관한 책은 금서였고, 금서를 읽는 건 처벌받았다.

원하는 책을 찾았지만 대놓고 반가워할 수 없다니.

‘윽, 아까워!’

아까워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놀리다니, 가당치도 않지.”

그녀의 두 눈은 책을 읽고 싶다며 아우성인데, 정작 입은 아니라고 잡아뗀다.

이 상황이 그저 웃긴 루안은 제가 아주 좋은 미끼를 손에 쥐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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