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아니, 정확해. 그 작가는 사랑하는 이를 막내 황자의 후비로 보내기로 약속하며 황실 전속으로 들어온 거였거든.”
루안의 말에 에스타는 생각을 접고 그를 마주 봤다. 원작처럼 네가 뭘 아느냐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랑보다는 그 스스로의 성공을 더 우선시했지.”
“그럼 제 해석은 꽤 정확했네요.”
에스타는 루안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쉽게 얘기할 수 있었다.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헤른을 만났을 때보다는 더 순수한 것 같긴 한데.
‘얘기해, 말아? 나중에 사랑 때문에 너도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지니 사랑하는 사람한테 잘해 주라고.’
악역을 도와주는 게 찝찝하긴 했지만, 오늘의 대화로 루안이 느끼는 바가 있다면 차라리 다행일 듯했다. 에스타는 체념 섞인 마음으로 조심히 입을 뗐다.
“하지만 전 그를 이해할 수는 없겠더라고요.”
작가는 원작의 그와 똑같은 삶을 살았다. 사랑했지만 성공을 더 우선시해 제 약혼녀를 팔아넘겼지.
루안도 별다른바 없는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배신하고 고른 게 성공이라면, 그 성공은 절대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제발 이번 생에는 그러지 말렴.
에스타는 최대한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제 말에 기분 나쁜 악역이 미래에 제 목을 댕강 내쳐 버리질 않길 바랐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용하는 건 나쁜 일이에요. 이용해서 원하는 걸 손에 얻는다고 해도 상처뿐인 일이에요. 작가는 그걸 여행 도중에 깨달았을 뿐이고요.”
“그게 나쁘다고?”
“그럼 잘한 일인가요?”
에스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루안이 마주했던 눈을 내리깔았다.
“그건 아니지만….”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는 걸 보니 아직 갱생의 여지가 있어 보였다.
“그건 자신이 평생을 몸 바쳐 일군 모든 게 의미 없어질 만큼 부질없는 일이죠.”
에스타가 한 자 한 자 힘줘 말하자 루안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사랑해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사랑하고 후회해 보면요.”
그 순간이었다.
‘어…?’
순식간에 확 달아오른 루안의 얼굴, 흔들리는 루안의 눈동자가 올곧이 에스타의 얼굴에 박혔다.
평소 둔한 에스타도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기분이 들 만큼 루안의 표정 변화는 컸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에스타는 황급히 책을 읽는 척했다. 머리통에 닿는 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진땀이 뻘뻘 흘렸다.
‘왜 괜한 말을 해서는!’
원작 악역과의 인연만큼은 절대 사양이었다.
“사랑에 관해서 잘 아는 것 같네. 그만큼 소공작을 사랑한다는 거겠지.”
루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톡 쏘는 듯했다.
“암요. 제 남편인데요.”
카이네스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티를 내며 방긋방긋 웃자 루안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구겨졌다.
‘헤른을 만났을 때 잘해 주란 소리였지, 내게 관심 가지란 말은 아니었단다.’
웃는 것도 힘들어진 에스타는 다시 고개를 숙여 책을 읽었다.
황태자가 책을 빼앗아 가기 전에 한 자라도 더 글씨를 외워야 했다.
에스타가 관심을 주지 않자 루안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부드러운 황자인 척하는 것도 힘들 만큼 제 기분이 날뛰고 있었다.
평생에 걸쳐 이만큼 자신과 잘 맞는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유부녀지.’
그 생각에 피가 차게 식었다.
“오늘은 이만 가 보지.”
루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스타가 방긋 웃었다.
‘평생 가세요!’
저를 보내며 아주 기뻐하는 에스타를 보자 루안의 기분이 더러워졌다.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양손을 테이블에 기댄 채 고개를 숙였다.
에스타와의 거리가 좁아지자 그녀의 체향이 퍼졌다. 달콤한 복숭아 같은 냄새였다.
“페이시아 소공작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걸 어떻게 생각하나.”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평소 제 성격답지 않게 아무런 계획 없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삼 년이나 못 볼 테니 싫으려나.”
하지만 예상외로 반짝이는 에스타의 눈을 보며 루안은 섣부르게 뱉은 말을 물리지 않았다.
* * *
루안은 폐하께 말씀드려 보겠다는 말을 남기곤 서재를 나갔다.
“그게 가능하다니…!”
에스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루안이 저를 보며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자 고민이 깊어졌다.
‘도서관에 너무 자주 가는 건가.’
이대로 루안과 엮이면 골치 아팠다. 원작을 비트는 수준이 아니라 파괴하는 거잖아.
악역 서브남의 사랑이라니.
너무 과했다.
“당분간은 집에만 있어야겠다.”
에스타는 오늘 찾은 마력 관련 서적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꾹 참았다.
* * *
집으로 돌아오자 카이네스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먹어도 된다니까.”
“곧 누님이 돌아오실 것 같아서요.”
카이네스는 가끔 늦은 시각까지 에스타를 기다리곤 했다.
같이 식사를 하며 소소한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았다. 얘기를 하며 웃는 에스타를 맘껏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정작 에스타는 잘 모르는 거 같았지만.
에스타는 간단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식당에 들어와 카이네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카이네스, 그때 건설사에 문제 생겼다는 건 어떻게 됐어?”
“잘 해결됐습니다.”
사건을 일으킨 자도 잡았고, 그 배후도 찾았으니 해결은 맞았다. 아직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카이네스의 대답에 에스타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걱정돼서. 처음으로 맡은 일이잖아.”
공작의 뒤를 이어 처음으로 한 일인 만큼 공작가의 가솔, 그리고 가신들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황실과 페이시아는 대립 구도였고, 카이네스와 루안이 어릴 때부터 사이가 나쁘다는 것도 알았다. 카이네스의 사업이 잘되는 걸 루안이 잠자코 보기만 할까?
에스타는 문득 카이네스가 걱정되었다.
어릴 때부터 봐 와서 그런지 에스타의 눈에는 여전히 까만 집고양이 같은 카이네스였다.
“네가 걱정돼.”
에스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카이네스가 들고 있던 나이프가 우지끈 부러졌다.
그는 에스타가 눈치채기 전에 부러진 나이프를 테이블 밑으로 집어 던졌다.
“제가 걱정됩니까?”
에스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네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 누님은 날 걱정하고 질투하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자 에스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사라지고 안심이 뒤따랐다.
카이네스의 얼굴에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힘들지는 않은가? 얼굴이 좋아 보이네.’
에스타 역시 카이네스를 보며 안심했다.
‘남주님 버프라서 처음 맡은 일도 쉽게 넘어가는 건가?’
에스타는 잘게 썬 고기를 입에 넣어 냠냠 씹었다.
그러다 문득 루안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 황태자 전하께서 네가 황실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시더라.”
황태자라는 말에 카이네스의 안색이 돌변했다.
“누님이 전하를 어떻게 만납니까?”
“…도서관에서.”
“설마 가신다는 도서관이 제1 서고가 아니라 제2 서고였습니까?”
제2 서고면 황태자의 관할인 서고였다. 그의 취향으로 꾸며진 곳.
그 아래서 황태자와 에스타가 마주쳤다는 게 달갑지 않았다. 루이셀의 말마따나 에스타는 누가 봐도 예쁠 테니까.
자신의 모든 걸 고까워하는 루안이 그녀에게 해코지라도 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갑자기 차가워진 분위기에 에스타는 삐걱거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이네스가 한숨을 내쉬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네가 안 물었으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에스타는 꾹 눌러 참았다. 눈치를 봐 가며 대답해야 하는데 지금 그렇게 말했다간 카이네스의 차가운 눈빛에 얼어 죽을지도 몰랐다.
“말해야 하는 건 줄 몰랐어. 내가 실수라도 한 거야?”
“아뇨.”
카이네스는 아니라는 말과 다르게 원망 섞인 눈으로 에스타를 바라보았다.
‘내가 뭘 잘못하긴 한 것 같은데….’
즐거웠던 식사 자리가 꽝꽝 얼어붙고 말았다.
졸지에 에스타는 카이네스 눈치를 살폈다.
“이제는 말할게. 그러니까 화 풀어.”
“화 안 났습니다.”
말과 다르게 카이네스의 눈썹은 날카롭게 세워지고 있었다.
에스타는 손으로 그의 눈썹 모양을 따라 하며 말했다.
“네 눈썹이 이런데 정말 화난 게 아니라고?”
“…아닙니다.”
순간 에스타의 모습이 귀여워 카이네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귀엽잖아….’
화가 풀어지려던 찰나 황태자 루안이 떠올랐다.
빌어먹게도 타이밍 나쁘게 황태자가 저를 괴롭힌 이유를 깨닫고 말았다.
사건이 터진 날이 황실에서 황태자와 다과회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는 게 떠올라 더 열이 났다.
황태자의 손아귀에서 보기 좋게 놀아난 것이다.
‘나 때문이 아니라 에스타 때문이었어.’
사업 때문에 일이 많아진 탓에, 요즘 에스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건설업에 문제만 생기지 않았더라도 이 정도로 시간이 없진 않았을 텐데.
제가 바빠서 에스타에게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 루안이 꽤 다가간 것 같았다.
그러니 서고에 대한 얘기도 하고, 쓸데없이 아카데미 재학 얘기까지 꺼냈겠지.
자신이 아카데미에 가 있는 삼 년 동안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생각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게 에스타라는 걸 안 이상,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저는 아카데미에 가지 않을 겁니다.”
카이네스의 단호한 말에 에스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그녀의 표정 변화에 카이네스는 더 놀라고 말았다.
“왜에?”
“…이제 와서 가는 것도 웃기잖습니까.”
처음 아카데미 입학을 거부 받았던 할아버지는 황실로부터 받은 차별에 모멸감을 느꼈다.
그 뒤 아버지를 포함해 페이시아 가문 사람들은 황실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 재학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훌륭한 공작으로 인정받았으니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일이다.
하지만 눈에 띄게 실망하는 에스타를 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었으니까.
“네가 페이시아니까? 가문의 이름 아래 자유로울 수 없는 거야?”
그런데 침울한 에스타의 입에서 꽤 괜찮은 변명 거리가 나왔다.
“그렇죠.”
적당히 웃으며 말하자 에스타는 더 침울해졌다.
자유를 주고 싶어서 계약 결혼까지 했는데, 카이네스는 아직도 자유롭지 못했다. 공작 밑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게다가 카이네스는 공작에게 그다지 불쾌한 감정이 없는 것 같단 말이지.
“누님은 제가 아카데미에 갔으면 좋겠습니까?”
카이네스가 본심을 숨긴 채 은근슬쩍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