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며칠 뒤, 카타르샨에게서 연락이 왔다. 비밀 명의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었는지 에스타가 원했던 땅 명의를 ‘빌리 레터’라는 중성적인 이름으로 구매해 보내 주었다.
아직은 사용할 일 없는 신분증과 땅이었기에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에스타는 서고에서 적어 온 지렁이같은 글씨체를 가지고 카이네스의 방으로 향했다.
카이네스는 오늘 오전 업무만 마치고 참께 홍차를 마시기로 했다.
에스타가 카이네스의 집무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낮게 잠긴 카이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타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카이네스, 나야. 아직 일 안 끝났어?”
“곧 끝납니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카이네스의 정중한 요청에 에스타가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맞은편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폭신한 깃털이 가득 담긴 소파에 앉자 몸이 노곤해졌다. 게다가 사각거리는 카이네스의 깃펜 소리가 꼭 자장가처럼 들렸다.
지금은 나른한 점심 시간대였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다 보니 솔솔 잠이 쏟아졌다.
카이네스는 급한 서류 검토를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에스타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더욱 빨리 처리했건만.
고개를 들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에스타가 눈에 들어왔다.
에스타의 긴 금발이 어깨를 타로 흘러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고, 고개는 불편한 자세로 꺾여 있었다. 그런데도 에스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카이네스는 에스타를 깨워야 한다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바빠서 며칠 보지 못하는 게 무척 아쉬웠다. 일이 늦게 끝날 때마다 에스타의 방 앞을 몰래 서성인 건 그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에스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뭐라고 생각할까.
짧은 생각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님, 일어나십시….”
“으음, 카이네스….”
에스타의 찌푸려진 미간은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눈도 뜨지 않았다.
에스타는 잠에 빠진 채로 소파에서 허우적거렸다.
에스타의 잠꼬대는 귀여웠으나 카이네스에게 그다지 좋은 추억이 아니었다.
제가 그녀를 죽게 버려둘 거라 생각했던 걸 알게 됐으니까.
그녀가 또 쓸데없는 말을 뱉을까 두려웠다. 카이네스가 서둘러 에스타의 어깨를 흔들었을 때였다.
“겨… 결혼 추… 축하해애….”
예상치 못한 에스타의 말에 카이네스가 멈칫 행동을 멈췄다.
“행복해…야 해.”
중얼거린 탓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카이네스는 에스타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결혼 축하해. 행복해.’
이내 카이네스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잠든 에스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보던 카이네스가 용기 내어 에스타의 금발을 손에 움켜쥐었다.
보드라운 솜털 같았다. 처음 만져보는 것도 아닌데 카이네스의 심장이 부숴져라 쿵쿵 뛰었다.
“으음….”
머리카락을 쥔 감각 때문인지 에스타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카이네스는 고개를 떨어뜨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십 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본 에스타의 금발이 자신의 영혼을 빨아당기는 것 같았다.
쿵쿵.
카이네스는 귓가엔 제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카이네스?”
에스타가 잠결이 뭍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누님.”
카이네스가 대답하자 에스타가 묘하게 웃음 지었다.
꿈을 꿨다. 카이네스가 헤른과 만나 행복하게 사는 꿈이었다.
웃는 카이네스를 보고 얼마나 흡족해했는지.
에스타는 제 생각대로 잘 자란 카이네스를 보며 행복했지만, 꿈속의 카이네스의 곁엔 자신이 없었다.
저택도, 집사도, 하녀들도 모두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에스타의 모습은 없었다.
그게 조금 마음이 아파 에스타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어제 잠을 설쳐서 그래.”
변명 아니 변명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타가 카이네스의 어깨를 살짝 밀어 냈다.
이미 자신보다 한참이나 커진 카이네스의 몸이 느껴졌다. 성인을 앞둔 나이.
더 크면 헤른의 곁으로 떠날 것을 알기에, 에스타는 최대한 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 * *
에스타와 카이네스는 가볍게 준비를 마치고 정원으로 나왔다. 저택 코앞이었지만 오랜만에 함께 나온 나들이였다.
태양을 등져 그늘진 카이네스 얼굴에서 빛이 났다.
‘역시 잘났어.’
카이네스가 남주님이라는 건 불변의 법칙처럼 틀어지지 않았다. 원작이 다 틀어져도 카이네스는 마주님이겠지.
에스타는 카이네스를 제치고 앞서 걸었다. 꿈 때문인지 마음이 뒤숭숭했다.
큰 상수리나무 아래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엘리가 그러면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카이네스가 괜찮다고 말했다.
“정말 안 되는데….”
엘리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커다란 잎을 뻗고 자란 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펴 주었다.
에스타가 태연하게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리자, 카이네스는 별 고민 없이 옆자리에 앉았다.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제일 귀하다는 소공작과 그의 아내가 잔디밭에 돗자리 하나 깔고 티 타임을 즐긴다는 사실은 페이시아 가문만의 비밀이었다.
“저번에 말한 바쁜 일은 해결됐어?”
카이네스의 취향에 맞춰 준비한 생크림 케이크와 아몬드 쿠키를 엘리가 가져다주었다.
“네, 이유를 파악했으니 해결만 하면 됩니다.”
카이네스가 얇은 눈으로 에스타를 훑었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하고 쿠키를 반으로 부숴 입에 집어넣었다.
“으음, 그랬구나.”
제 얘기를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에스타는 푸른 하늘을 구경했다.
카이네스는 그런 에스타를 눈에 담으며 무신경하게 포크로 케이크를 쿡 떴다.
입에 케이크를 넣을 때면 얼굴에 희미하게 기쁨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맛있네요.”
에스타가 빤히 바라보는 이유가 맛이 궁금해서라고 생각했는지, 카이네스가 케이크를 조금 잘라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
“드세요.”
“먹여 주려고?”
카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먹을 수 있는데?”
애 취급하는 탓에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에스타는 늘 이랬잖아요.”
‘그래. 그래서 네가 매번 당황했었지.’
어렸을 때 놀려먹던 모습이 떠올라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거야 어릴 때잖아.”
부쩍 자란 카이네스 때문에 훨씬 먼 일인처럼 느껴졌다. 키가 더 자란 것인지 앉아서도 시선이 높았다.
카이네스가 무덤덤하게 말하니 별일 아닌 것 같아서 음식을 다시 입에 넣었다.
“음, 맛있네!”
에스타는 일단 카이네스의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한입 더 드릴까요?”
거절하려 했는데, 이미 입 앞에 내밀어진 새로운 케이크와 살짝 기대감을 담은 카이네스의 눈빛 때문에 거절이 힘들었다.
“케이크는 천천히 먹고 이제 얘기 좀 하자, 카이네스.”
우물거리며 천천히 대답하자 카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묻었습니다.”
손수건을 받아들려는데 카이네스가 손을 뒤로 뺐다.
“제가 닦아드리겠습니다.”
카이네스가 손수건을 쥐곤 그녀의 입가를 문질렀다.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분명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잔디밭 위로 따스한 햇볕이 쏟아졌고, 그 햇볕을 카이네스가 등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릴 만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카이네스는 붉은 눈동자를 살짝 내리깐 채로 그녀의 입가를 닦는 데 여념 없었다.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카이네스가 쓴 포크를 너무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는 걸.
뒤늦게 인식하자 에스타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에스타가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엘리가 찾아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아가씨. 의뢰한 일을 끝마쳤다고 말하면 아실 거라고 하시던데요?”
길드장, 카타르샨이 보낸 사람이 왔다는 소리였다.
‘하필이면 지금 찾아오냐!’
곁눈질로 카이네스를 쳐다보았다. 누구냐는 듯 묻는 눈에 답을 하기 어려웠지만 이대로 카타르샨이 보낸 자를 돌려보내기도 난감했다.
“지금 갈게. 응접실로 안내해 드려.”
“네, 아가씨.”
엘리가 순종적으로 고개 숙였다.
카타르샨에게 의뢰한 지 오늘로 딱 일주일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답변에 놀랐던 찰나, 등 뒤에서 카이네스가 소리 내어 포크를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누님,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죠.”
카이네스가 삐뚜름해진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늘 무표정을 고수했지만, 가끔 이렇게 웃을 때면 무서웠다. 왜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건데.
“…아니.”
슬쩍 시선을 피하고 대답하자 카이네스가 차분히 되물었다.
“숨기시려고요?”
“그건 아닌데.”
하필이면 카이네스가 있을 때 연락이 올 게 뭐람.
집에만 있는 귀족 영애가 길드에 찾아가 의뢰를 했다.
음습한 골목길 안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길드를 어떻게 찾았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서로 암호를 주고받아 출입조차 엄격한 길드의 암호를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에스타가 난감함에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카이네스는 그런 에스타의 고민을 봐주고 싶지 않았다. 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에스타에 대해 모르는 게 있다는 건 상당히 불쾌한 기분이었다.
“세세하게 따지지 않을게요. 그냥 얘기해 주세요. 궁금해서 그래요.”
사르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카이네스의 얼굴에 에스타는 저도 모르게 진실을 내뱉었다.
“사실 찾는 사람이 있어서 며칠 전에 길드에 찾아갔었거든.”
“누님이 찾는 사람이요?”
…내가 이걸 왜 얘기했지?
에스타는 뒤늦게 충격을 받고는 입을 벌렸다.
카이네스의 얼굴 공격. 정말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게 누구죠?”
“…헤른.”
네 미래의 아내다, 이놈아.
에스타가 이마를 짚은 채 대답했다. 이제 와서 대답해 주지 않는 것도 웃겼다.
카이네스에게 굳이 숨겨야 하는 정보도 아니었기에 대답해 주었는데, 카이네스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 영애는 왜 찾으시는데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 하며, 바짝 다가와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 하며.
이름부터 제 짝인 걸 느낀 건가? 아니면 건드리지 말라고 선을 긋는 건가?
카이네스의 반응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 에스타는 살짝 난감해졌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