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83)

45화

“여, 영애인 걸 바로 아네?”

“여자 이름이잖아요.”

“그렇긴 해.”

“말 돌리지 마시고요. 왜 찾으시는데요?”

에스타가 볼을 긁적였다. 이렇게 바로 속마음이 들키다니. 둘러댈 변명을 재빨리 생각해 냈다.

“그… 영애에게 신묘한 능력이 있대. 그래서 나도 치료 가능한지 물어보려고.”

에스타는 원작에 나왔던 진실을 살짝 섞어 거짓말했다.

그녀와 같이 밤을 보내면 치유가 된다. 그게 무슨 병이든.

황태자는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하였고, 황태자에게 붙잡힌 헤른을 해방해 주는 게 남주 카이네스였다.

현 사교계에도 헤른의 기묘한 능력에 대해 소문이 퍼져 있었다. 다들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개 뜬소문처럼 취급했다.

“그저 떠도는 소문일 텐데요.”

다행히 카이네스의 날 선 경계가 살짝 수그러들었다.

에스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이네스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뭐든 해 보는 게 좋잖아. 요즘 몸이 걱정되기도 하고.”

적당히 둘러대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카이네스의 눈썹이 구겨졌다.

어쭙잖은 핑계란 것을 카이네스도 그걸 느낀 듯했다.

이대로 가다간 카이네스가 또 화를 내며 캐물을 것 같았다. 에스타는 슬쩍 말을 돌리기로 했다.

나른한 시간대의 피크닉이라 그의 비밀에 관해 얘기를 꺼내기가 무척 좋은 것 같았다.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마음도 같이 늘어지니까.

“그리고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에스타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릴 적에 내가 메이어 오라버니랑 축제에 가서 만났다던 검은 머리 남자 기억해? 그 사탕 줬다던 이상한 남자.”

에스타가 꺼낸 비밀 얘기에 카이네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 기억합니다.”

“최근에 그 남자를 또 만났어.”

슬쩍 카이네스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많이 놀라진 않았을까.

“네가 바빠서 오페라 보러 오지 못했을 때, 그 앞에서 만났어.”

카이네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많이 놀라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굴었다.

여전히 숨길 생각인 걸까?

“…근데 익숙한 느낌이 나는 게 내가 아는 사람 같단 말이야.”

나름 강수를 두었다. 지금 털어놔도 절대 놀라지 않을 거라는 눈동자로 카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입은 모른다 했지만, 그녀의 눈은 확신을 가진 듯 똘망똘망했다. 카이네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익숙한 느낌이요?”

“응. 눈앞에 두고도 날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든다니까. 진짜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까 얼른 얘기해! 난 진짜 괜찮다니까?’

에스타가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카이네스가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린 채 입가를 가리고 고민하던 카이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이 누님께서 아는 사람이면 어쩔 겁니까?”

에스타는 저도 모르게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섣불리 대답하면 괜한 오해를 사려나?’

카이네스의 붉은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설마 미움받게 될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걸까.

그는 자신도 무슨 답을 바라는지 모른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에스타의 입이 열리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카이네스의 몸이 바짝 굳어 버렸다.

물의 마력을 다루는 사람의 목이 타들어 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난 상관없을 것 같아.”

에스타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너무 태평한 거 아닌가?’

자신임을 아는 것도 아닐 텐데 무얼 믿고 상관이 없어?

안심한 것도 잠시, 이 여자의 무감각함에 기가 찬 카이네스는 다른 쪽으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뭐가 상관이 없습니까? 당장 재판에 넘겨야지요. 언제는 이상한 사람이라면서요.”

“그, 그거야….”

‘너인지 몰랐으니까.’

되레 당황한 에스타가 눈을 깜빡거렸다.

“주변에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경계하셔야죠. 베일리 영애일 때도, 페이시아 소공작 부인일 때도. 페이시아를 시기하는 가문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누님은 경계심이 부족합니다.”

“어, 어?”

‘내가 왜 잔소리를 듣고 있는 거지?’

에스타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눈만 껌뻑거렸다. 그때 카이네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뜸 납치하고서 금품을 요구하게 된다면요? 누님에게 해를 끼치면요?”

카이네스는 겁이라도 주려는 것처럼 엄격하게 말했다. 에스타는 그런 카이네스가 황당할 뿐이었다.

‘너 그럴 생각이었니?’

카이네스가 불편한 기색이 담긴 얼굴로 에스타를 바라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위기의식이 없고, 태평했다. 원래 그런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건 좀 심각하지 않은가.

카이네스의 마음속에서 에스타에 대한 걱정이 더 커졌다. ‘태평한 누님’에서 ‘위기의식이 전혀 없는 누님’ 정도로 변경되었다.

나른한 오후라고 마음이 풀어지는 건 저뿐이라는 걸 에스타는 깨달았다.

‘나에게는 정말 말해 줄 생각이 없구나.’

에스타는 마음을 다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카이네스 특유의 하찮은 눈빛을 받은 건.

카이네스가 혀까지 차고는 손을 내밀었다.

“치료나 하죠.”

에스타가 카이네스의 손을 잡자 박하 같은 화한 기분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래. 비밀을 말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네 마음만 편하면 됐지.’

어쩌면 그의 비밀을 아는 것도 플래그의 일종일지도 몰랐다.

로판에서 남주가 의지하는 건 여주뿐이니까.

미래 아내 헤른을 위해 남겨 둬야 하는 걸지도 몰라.

에스타는 가볍게 생각하며 손을 통해 전해지는 카이네스의 마력을 느꼈다. 시원하고 개운한 물의 마력이었다.

‘역시 내 전용 에어컨, 최고야!’

* * *

에스타는 하루라도 빨리 헤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헤른은 초반에 서브남의 손아귀에 놀아나다 보니 구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려 원작의 여주님 아닌가!

게다가 이번에는 황후가 되기 전에 카이네스와 이어지기를 바랐다. 제 목숨만 보장된다면 에스타는 원작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헤른은 가문이 휘청거릴 만큼의 큰 빚을 탕감하기 위해 팔려 가듯 결혼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 계략을 세운 것도 루안, 헤른을 구해 내는 것도 루안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지. 애초에 가문에 문제가 없게 할 거니까.”

에스타는 루안보다 빠르게 손을 뻗기 위해 헤른의 뒷조사를 한 거였다.

에스타는 엘리까지 물리고서 카타르샨의 시종이 가져다준 편지를 방에서 조심히 열어 보았다. 

주르륵 넘어가는 에스타의 눈동자가 금방 움직임을 멈췄다.

“헤른이 갑자기 아카데미에…? 왜?”

그래서 저택 근처에서 볼 수 없었구나. 사교계에서 들려오는 소문도 없더라니.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그런 거였어.

에스타는 혼란스러웠다. 원작에서 헤른이 아카데미를 다녔다는 언급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용이 또 바뀐 건가?’

그러다 문득, 황태자의 말이 떠올랐다.

카이네스를 아카데미에 보내는 게 어떻겠냐는 물음.

“이런 게 인연이구나. 둘은 어떻게 해도 만날 사이였어.”

에스타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른이 무슨 마음을 먹었느냐가 문제인데.’

원작의 흐름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최소한 헤른의 가문이 망하고, 그런 헤른에게 황태자 루안이 악의 담긴 손을 뻗는다는 것.

에스타는 그걸 막고 싶었다.

“그냥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은 건가?”

에스타는 여주인공인 헤른과 대화 한번 나눠 보지 못했다. 원작을 읽었지만 다 알 수는 없는 법.

그녀는 편지를 다시 봉투 안에 넣으며 스스로 아쉬움을 달랬다.

‘여주인공과 얘기 한번 해 보려면 최소 여름 방학까지는 기다려야 하네.’

에스타는 턱을 괸 손을 풀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오리털을 잔뜩 넣은 소파가 부드럽게 등을 품었다.

“아쉽다, 아쉬워.”

카이네스가 잘생긴 만큼 헤른도 만만찮게 예쁠 텐데.

여주인공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고, 정석 미인의 얼굴이지만 호전적인 성격을 감출 수 없었다.

‘…라는 묘사가 있었지.’

붉은 사자라는 애칭도 있는 여자였다.

“헤른 앞에서 나대다가 얻어터진 남자 얘기도 있었지.”

에스타는 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느긋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곧 첫 만남이 있겠지.”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공 여주인공의 만남이니 분명 무척이나 로맨틱할 거다.

“나중에 꼭 물어봐야지.”

에스타는 기대감을 품은 채 양 볼을 잔뜩 붉혔다.

* * *

일 때문에 수도 중심가로 가던 카이네스의 기분은 평소보다 매우 너절한 상태였다.

‘아주 오늘 날을 잡았구나.’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제 기분을 바닥에 처박으려고 판을 짠 것 같았다.

카이네스가 이토록 짜증이 솟구치는 것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붉은 머리의 여학생 때문이었다.

“헤른 루에느.”

카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으깨듯 그 이름을 불렀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허리춤에서 찰랑거렸고, 바람에 살랑일 때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녀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흰 피부는 청초한 그녀의 얼굴에 잘 어울렸고, 붉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대조되어 그녀의 피부가 더욱 희어 보였다.

그녀가 헤른이었다.

‘누님이 왜 찾는 걸까. 무엇 때문에? 왜 내게 말도 하지 않고?’

카이네스는 구겨진 미간을 문질렀다.

수도에서 제가 모르는 귀족이 없다는 걸 에스타가 잊은 것부터 해서, 에스타마저 저 헤른이라는 여자에게 홀린 것 같아 화가 났다.

“짜증 나.”

‘사실 찾는 사람이 있어서….’

에스타가 풋풋하게 볼을 붉힌 채 말하는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단지 그의 기억이 왜곡된 거였지만, 헤른을 찾고 싶어 하는 에스타를 단단히 오해하는 바람에 홀렸다는 착각까지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카이네스는 제 옆을 지나가려는 헤른을 순순히 보내 주고 싶지 않았다.

마침 그가 들어서려던 길은 두 명이 지나다니기에 좁은 골목이었다. 헤른은 관리된 잔디를 밟고 싶지 않아 돌길 위를 걸은 탓에 길은 더 좁아졌다.

그 앞에 카이네스가 서 있었다.

카이네스가 움직임 없이 서 있었기에 헤른은 지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페이시아 소공작이 저벅저벅 걸어와서는 퍽 제 어깨를 치기 전까지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