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카이네스는 에스타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자태로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쳤다.
의연하게 굴었지만 방에 들어온 이후 쭉 카이네스의 시선은 에스타에게 닿아 있었다.
“마실 걸 달라고 할까?”
에스타는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방 구조를 살폈다. 어렸을 때부터 썼던 침대와 이불, 탁자 위 놓인 꽃병까지도.
작은 부분 하나까지 변하지 않았다. 먼지 한 점 없이 관리된 방을 보던 에스타가 작게 웃었다.
“이 방 안에서 달라진 건 우리뿐이네.”
소꿉친구에서 부부가 된 이후, 에스타의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그러게요.”
카이네스는 왠지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 뻐근할 정도였다.
정작 에스타는 단순한 농담이었는지 해맑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적당한 거리가 있으면서 멀지 않은 자리였다.
소꿉친구일 때와 별 다를 바 없는 자리 선정에 카이네스가 가만히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거기 앉으라고?”
“네.”
에스타가 ‘왜?’라고 되묻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자 카이네스는 자신이 일어났다.
“하긴, 제가 가면 되죠.”
“아니, 그건 좀….”
크고 길쭉한 소파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개나 있었지만, 에스타가 앉은 자리는 가운데에 놓인 상석이었다.
카이네스는 긴 소파를 지나쳐 에스타의 옆에 섰다.
‘설마 이 1인용 소파에 같이 앉겠단 소린 아니겠지? 자리도 없는데? 뭐… 팔걸이에 앉으려고? 네가?’
에스타가 의아한 눈으로 카이네스를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카이네스는 에스타의 생각을 알아챈 듯 짓궂게 웃으며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이제 자리에 앉았으니 얘기라도 해 볼까요?”
카이네스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잘생긴 남자가 웃으며 제 소파의 팔걸이에 앉아 있다니.
재킷을 벗어 셔츠 차림이 된 카이네스 때문인지 에스타는 제가 꼭 방탕한 황제라도 된 느낌이었다.
“내, 내가 저리로 갈게! 저쪽에 가서 같이 앉자, 카이네스!”
에스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끈거리는 볼이 식을 줄 몰랐다.
카이네스는 제 손을 잡아끄는 에스타의 손을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럽게 웃으며 따랐다.
“네, 누님.”
사실 제가 팔걸이에 앉을 거라 생각지도 않는 에스타의 표정을 보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반응이 이렇게 재밌을 줄 알았다면 자주 장난을 쳤을 텐데.
카이네스가 눈을 접어 웃으며 에스타의 옆자리에 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에스타의 귓불이 새빨갰다.
‘진짜 원작 남주인공 같았지.’
강하게 밀어붙이는 루안과 야한 폭스 남주였던 카이네스. 잠시나마 원작을 엿본 기분이 들어서 볼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어릴 때보다 더 커서 그런지 같은 행동, 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느껴졌다.
“아, 맞다.”
순간 에스타는 잊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며칠 전 카이네스에게 주려고 샀던 커프스 단추였다.
“이게 뭡니까?”
선물을 내밀자 카이네스가 물었다.
“선물.”
“제 생일도 아닌데요.”
“전에도 이 말 하더니…. 넌 진짜 변하질 않는구나.”
에스타가 작게 웃었다. 순진하게 되묻는 카이네스의 얼굴은 선이 굵어졌지만, 그 순간 어릴 적 모습과 겹쳐 보였다.
“감사합니다.”
선물 포장지를 열자 고급스러운 문양으로 장식된 커프스 단추가 나왔다.
카이네스는 당장 껴 볼 생각인지 셔츠 단추를 떼어 냈지만, 한 손으로 하는 게 힘든 듯 잘되지 않았다.
“내가 해 줄게.”
에스타가 카이네스의 손을 잡고 셔츠 단추를 열었다. 스치며 손이 닿을 때마다 카이네스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마음에 들어?”
양손 모두 제가 선물한 푸른 빛의 커프스 단추로 바뀌었다.
“네, 마음에 듭니다.”
카이네스가 예쁘게 웃으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너 커프스 단추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에스타가 오해 아닌 오해를 한 게 웃겨 카이네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누님이 준 선물이라서 좋은 겁니다.”
‘어…? 얘 진짜 자각 없이 이러는 건가?’
그는 어릴 때부터 살갑게 군 적아 없었다. 원래 성격이 서늘하고 무감각한 아이였으니까.
근데 돌이켜 보면 요즘 제 앞에서는 잘 웃고, 다정하게 대해 줬다.
‘원래 이러진 않았는데.’
행복해 보이니 나쁜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찜찜했다.
제가 무언가를 놓친 기분이었다.
“카이네스.”
“네, 누님.”
에스타의 부름에 카이네스가 곧장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물이 정말 마음에 드는지 커프스 단추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엘리가 방으로 찾아왔다.
“페뷰어 도련님이 도착하셔서 이제 저녁 식사를 시작할 것 같아요.”
“응, 바로 내려갈게.”
엘리는 알겠다며 돌아갔다.
“이제 그만….”
가자고 말하려 했는데.
이마에 무언가 말캉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차갑고 부드러우며 동시에 말랑거렸다.
“어?”
당황한 에스타가 눈을 번쩍 떴다. 그와 동시에 눈을 가렸던 카이네스의 손이 천천히 멀어졌다.
“선물 감사합니다, 누님.”
“어? …어어?”
탁 트인 시야에 카이네스의 살짝 붉어진 얼굴이 들어왔다.
“베일리 가문의 인사법이라 들었습니다. 이제 저도 하려고요.”
“아, 그래. 그렇구나.”
‘근데 그건 가족끼리만 하는 건데.’
에스타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지금 말하면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아서.
이상해진 분위기에 숨이 막혀 몰래 가슴을 쳤을 때였다.
방금까지 없던 목걸이가 목에 걸려 있었다.
“오늘 가져와서 다행이네요. 타이밍이 좋았어요.”
“이게 뭔데?”
“목걸이요.”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에스타는 픽 웃으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카이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제 마력을 담았습니다. 누님의 열기를 희석해 줄 겁니다.”
벌써 마력석을 만들 수 있게 됐구나. 역시 남주님이네.
빛을 받으니 푸른빛 마력석이 심장 부근에서 빛을 발했다. 공작이 준 마력석과 비슷한 모양이었지만, 훨씬 마력의 양이 방대하고 따뜻했다.
물 마법사인데 따뜻하다니. 요즘 그의 마력이 이상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에스타는 먼저 일어나 재킷을 챙기는 카이네스를 바라보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 * *
에스타가 황실 제2 서고에 들어서자 루안이 기다렸다는 듯 서서 책을 보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에스타도 루안에게 용무가 있었기에 선뜻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루안을 보니 계획대로 잘 이뤄질 것 같았다.
“자꾸 힐끗거리네.”
“누, 누가요? 뭐를요? 설마 제 얘기인가요?”
루안이 에스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책을 빌려 달란 부탁을 하려고 자꾸 기회를 엿보고 있어서 그런지 그가 오해할 만하긴 했다.
아는데도 당황한 에스타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래요. 네가 나를요. 네 얘기 맞아요.”
루안이 놀리기라도 하듯 에스타의 말을 따라 했다. 능글맞게 웃으며 책으로 입을 톡톡 치던 그가 아예 대놓고 돌아서 에스타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무슨 꿍꿍이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쳐다봤다.
“제… 말투 따라 하지 마세요.”
“그대는 유달리 내 앞에서 실수를 자주 해. 꼭 긴장한 사람처럼.”
“아니에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난 그대를 긴장하게 만든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루안은눈치가 상당히 빨랐다. 물론 눈치가 빠른 정도로 에스타가 그를 불편해하는 진짜 이유는 알아낼 수 없겠지만.
‘소설 속 악역이라서 불편하단 말야….’
에스타는 이 와중에도 눈을 아래로 착 내리깐 탓에 루안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쳐다보고 말았어요.”
“부탁?”
에스타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책을 빌려주실 수 있나요?”
“이곳의 책은 대출이 불가해. 하지만 원한다면 밖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야.”
루안은 말을 하다가 여전히 우물쭈물하며 주저하는 에스타를 바라보았다.
“그, 그게….”
“설마 그대가 저번에 읽은 금서를 빌려 달란 말은 아니겠지.”
역시 루안은 눈치가 빨랐다. 벌써 에스타의 부탁을 눈치채고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혹시 가능할까요?”
“내 제안에 못 이겨 금서를 읽었던 사람은 어디로 갔지? 취향에 안 맞아서 고작 첫 장만 읽고 덮지 않았나?”
‘모, 못 읽어서 그런 거였거든요!’
에스타는 당장 변명을 쏟아 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수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취향에 안 맞는 게 아니라요.”
“농담이야.”
‘이 자식이 정말….’
에스타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물었다.
“금서를 빌려주는 건 나 역시 법을 어기는 일인데.”
루안은 읽던 책을 책장에 넣으며 말했다.
문득 그는 에스타와 이렇게 단둘이 있게 된 시간이 꽤 오래됐음을 깨달았다.
‘귀족들에게 결혼한 여성이 미혼의 남성과, 그것도 무려 황족인 남자와 오랜 시간 동안 단둘만 있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기본 예법일 텐데.’
다시 생각해 보면 에스타는 기본 예법 정도는 개나 준 듯 행동한 적이 많았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말일 테고.’
루안은 그녀의 세 오라비를 떠올렸다. 황실에서 근무하는 페뷰어. 융통성 없지만 착실하고 귀족다운 자였다. 둘째 제뉴어와 셋째 메이어. 황실 아카데미에서 재학 중이며 제뉴어는 검술에, 메이어는 학술에 무척 뛰어났다.
셋 다 귀족답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에스타만 남다른 이유가 뭐지?’
루안은 제게 간청하듯 눈을 내리깔고 조심히 되묻는 에스타를 바라보았다.
“안 될까요?”
부탁할 때만 이렇게 눈을 맞추는 건 어디서 배웠는지.
고분고분하게 구는 에스타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던 루안의 눈동자에 순간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
“…대가요?”
“그러니 먼저 제안해 봐. 내가 혹할 만한 조건을.”
그는 마치 악당처럼 웃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본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