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카이네스가 자신을 놀리는 루이셀에게 한 소리 하려는데 그가 몸을 획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내일 아침에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
루이셀이 나가자 방 안이 고요해졌다. 카이네스는 힘을 풀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때마침 차를 가지고 들어온 하녀에게 카이네스가 물었다.
“부인은?”
“황성으로 외출하셨습니다.”
“언제 돌아온다는 말은 없었나?”
“따로 말씀은 없으셨는데, 보통 가시면 세 시간 후에 오셨습니다. 혹 바쁘신 일이라면 사람을 보낼까요?”
하녀의 물음에 카이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세 시간 정도면 기다릴 수 있었다. 자신은 오늘 남은 반나절 동안 바쁜 일정이 없었으니까.
홀로 남은 카이네스는 하녀가 가져다준 차를 마셨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리러 갈까.”
집에서 만나면 될 텐데 왜 황성까지 찾아왔냐고 자신을 타박할까?
“…아니, 그냥 집에서 기다릴까.”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방을 휘젓고 다니던 카이네스가 우뚝 멈춰 섰다.
‘타박하면 좀 듣지, 뭐.’
그는 에스타가 선물로 준 푸른색 커프스단추를 매일같이 착용했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선물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지.’
나간 김에 저녁도 밖에서 먹고 오면 좋겠지. 오랜만에 시간을 갖는 셈이니 에스타에게 보석이랑 드레스도 사 줘도 좋을 것 같다.
루안이 선물해 준 목걸이를 찰 생각도 못 하게.
“흥, 그런 구닥다리 같은 선물을 사 주다니.”
카이네스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의자 뒤에 걸어 둔 재킷을 챙겼다.
때마침 창밖 너머로 한 마차가 들어섰다. 동시에 카이네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일을 일찍 끝낸 자신, 그리고 세 시간이 걸린다는 외출을 한 시간 만에 끝내고 돌아온 에스타가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먼저 오셨네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네스가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집사가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마차 문이 먼저 벌컥 열렸기 때문이었다.
‘뭔가 급해 보이는데.’
에스타는 허둥지둥한 몸짓으로 마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벗어났다. 바닥에 안착할 때 비틀거린 탓에 카이네스는 자신이 3층에 있다는 사실도 잊고 몸을 움찔거렸다.
다행히 에스타가 넘어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후…….”
그 잠깐 사이에 간 졸이던 카이네스는 찢을 것처럼 쥐고 있던 재킷을 서서히 놓았다.
그런데 에스타가 이제는 돌연 바닥을 기는 것처럼 몸을 낮춘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뭐 하는 건지…….”
에스타를 사랑한다고 자각한 이후론 잘 짓지 않았던 특유의 하찮다는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그만큼 에스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더 황당한 점이라면 그런 에스타조차 귀엽게 보인다는 것.
“완전히 미쳤군.”
카이네스는 자리에서 곧장 일 층으로 향했다.
슬슬 저택으로 들어올 줄 알았던 에스타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는 건가?’
저택 정문에 에스타의 전속 하녀인 엘리가 보였다. 카이네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부인은?”
“아, 작은 마님께서는 베일리 가문으로 가셨습니다.”
아쉽게도 엇갈렸나 보다.
오늘 기다림이 필연이라고 생각한 카이네스는 아쉽기만 했다.
그러다 엘리의 손에 들린 편지 봉투가 보였다. 흐릿하지만 그 편지 위에 찍힌 인장까지.
카이네스도 잘 알고 있는 직인이었다.
카타르샨이 운영하는 비밀 정보 길드, ‘엘레이’.
아버지께서 자주 이용했고, 자신도 몇 번 도움을 받은 최초의 정보 길드였다.
‘에스타가 거기엔 왜?’
카이네스는 굳은 표정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에스타가 헤른에 대해서 궁금해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이만 가 봐도 좋아.”
카이네스의 말에 엘리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뒤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카이네스는 조용히 엘리의 뒤를 따랐다.
엘리는 곧장 에스타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에서 나왔다.
최근에 몸이 안 좋은 듯해 걱정된다던 에스타의 말이 떠올랐다. 헤른을 찾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도.
‘누님은 거짓말할 때 눈썹을 찡그리지. 아직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정말 몸이 안 좋았으면 자신이 제일 먼저 알았을 거고, 에스타 또한 제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었으니까.
그는 수상쩍은 표정으로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에스타의 책상 위에 올려진 노란 봉투에는 인장이 찍혀 있어 무작정 뜯어 볼 수 없었다.
‘헤른 루에느 영애를 찾는 이유가 뭘까.’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카이네스는 그 이유가 가늠되지 않는 이 상황이 불만스러웠다. 정작 에스타는 말해 주지 않으니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상한 불안감을 못 이긴 그는 결국 봉투의 실링 왁스를 뜯었다.
순간 정보 길드를 통해서까지 알고 싶었던 헤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넘어갔던 것이 떠올랐다.
여러모로 예감이 좋지 못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야.”
카이네스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봉투를 내려놓았다.
이런 방식은 옳지 않았다. 일단은 에스타에게 묻는 게 먼저였다. 제가 몰래 훔쳐봤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에스타가 화를 낼지도 몰랐다.
실망하고, 슬퍼하겠지.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고작 궁금증 하나 풀자고 누님의 편지를 뜯을 생각을 하다니.’
카이네스는 비소를 흘리며 구겨진 미간을 문질렀다.
‘내가 선을 넘었어.’
그는 탁자 위에 놓인 향초 위에 실링 왁스를 가져다 댔다.
봉투 위에 다시 실링 왁스를 붙인 후, 편지를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놓고 에스타의 책상에 앉았다.
책상 높이가 자신의 것보다 살짝 낮았다. 카이네스는 저보다 작은 에스타의 체구가 떠올라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돌아오면 물어봐야지. 루에느 영애를 왜 찾냐고.’
그는 에스타가 사실대로 말해 줄 거라 믿었다. 에스타는 제게 그런 존재니까.
하나밖에 남지 않은 마지막 가족이자 연인이었다. 그러니 더 믿어야만 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카이네스는 이상할 정도로 긴장되어 다리가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에스타를 믿어야 한단 마음을 머리가 배반하는 기분이었다.
에스타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시선이 자꾸만 서류 쪽으로 닿았다. 카이네스는 초조한 사람처럼 탁자를 반복해서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다른 기운이 느껴져.’
서류에만 정신이 팔려 자신과 비슷한 기운이 에스타의 방 안에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제가 넣어 만들었던 마력석.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상하다. 에스타는 아직 마력석을 못 만들 텐데.’
만들었다면 제게 제일 먼저 자랑했겠지.
매일 식사도 함께하니 한마디라도 언질을 줬을 것이다.
‘다른 마법사의 것이라니.’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린 카이네스는 자신과 비슷한 힘이 마법이 느껴지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책상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서 느껴졌다.
에스타의 책상을 뒤졌다는 것을 의식하기도 전에,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바로 아버지의 마력석이었다. 그 옆는 처음 보는 신분증과 저택 문서, 그리고 카타르샨의 쪽지도 있었다.
“누님이 왜…….”
그의 눈에 차례차례로 각인되었다. 자신만 빼고 세상이 돌아가듯 느리게 시간이 흘렀다.
“…아니,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해.”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아 눈앞에 놓인 사실을 거부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에스타가 벌써부터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에스타와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 속에 허우적거리던 스스로를.
카이네스는 믿고 싶지 않았다.
“누님이 나를 떠나려고….”
신분까지 위조해서 자신이 모르는 곳으로 가려고 했단 것을 안 순간, 카이네스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몸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배신감이 들었다. 제 편이라면서, 암담한 현실 속에서 구해 주겠다고 한 주제에 혼자서 도망칠 생각이나 하고 있었니.
헤른을 찾는다고 핑계를 대던 에스타가 떠올랐다. 차라리 몸이 아파 걱정된다는 말이 사실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제가 무엇이 그렇게 싫어서, 이런 식으로 말도 없이 떠나려 했을까.
“5년 뒤에 이혼하자. 깔끔하게.”
“네 앞길에 문제 생기지 않게 할게.”
“결혼은…… 네 도피처가 되어 주고 싶은 마음에 뱉은 거야. 사심은 조금도 없어. 네가 성인이 되기 전에 헤어지자.”
예전에 에스타가 했던 말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사고를 당한 것처럼 달라진 에스타가 뱉은 말들이었다.
에스타는 변하지 않았다.
“더 이상 너를 좋아하지 않아.”
에스타가 다시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누님…. 누님….”
카이네스는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쩌면 에스타가 돌아와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스타는 끝내 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카이네스는 제 아버지의 마력석을 들고 그녀의 방에서 나갔다.
* * *
카이네스는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모든 문을 잠갔다.
시간이 늦어 노을이 지기 시작한 창문 앞에서 아직 에스타가 돌아오지 않음을 확인한 뒤, 커튼을 쳤다.
그는 쥐고 있던 마력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서로 공명하듯 진동하던 마력석이 곧 떨림을 멈추었고, 이내 카이네스의 눈앞에 공작이 나타났다.
공작은 뜬금없이 연락한 아들을 보는 것치고 무척 건조한 눈을 하고 있었다.
“누님께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이냐.”
공작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제 비밀에 대해 다 얘기하셨습니까?”
카이네스는 평소와 달리 물러서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살짝 이성을 잃은 것 같기도 했다.
공작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미간을 문질렀다.
“그래.”
제 예비 며느리가 아직도 얘기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탓에 제 아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역시.
“다 알고도 속였군요.”
제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얘기하던 에스타가 떠올랐다. 속으론 얼마나 우스웠을까.
놀리는 건지도 모르고.
눈치 없이 걱정이나 해 대는 내가 얼마나 우습고 유치했을까.
카이네스의 눈에 배신감이 차올랐다. 처음 맛보는 분노였다. 처음 느껴 본 상실감이었다. 에스타는 제게 사랑이자 실연이었다.
이 다채로운 감각을 선사한 이가 에스타, 제 부인이었다.
‘감히, 나를 떠나려고.’
그 순간 카이네스의 마력이 폭발하듯 터졌다. 무시무시한 폭발음에 공작조차 움찔거릴 정도였다.
동시에 공작가 일 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카이네스의 마력이 저택의 모든 것을 얼려 버린 탓이었다.
“카이네…!”
카이네스는 마력석을 부숴 공작과의 연결을 끊었다.
“누님, 계획대로는 안 될 겁니다.”
카이네스의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력과 같이 커진 몸뚱이가 산짐승만 해져버렸지만, 카이네스는 거리낌 없이 커튼을 걷었다.
눈앞에 보이는 베일리 가문의 창문으로 에스타의 인영이 흐릿하게 보였다.
살기인 듯, 증오인 듯 카이네스의 눈이 살벌하게 번득였다. 마치 ‘타오르는 붉은 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