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베일리 가문 도서관에 있던 에스타는 메이어와 책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돌연 터진 굉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제 무슨 소리지?”
메이어의 물음에 에스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평온했던 공작저가 소란스러워진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가 봐야겠어요!”
공작저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필히 카이네스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에스타는 요새 그가 마력을 잘 다루지 못했단 사실을 떠올렸다.
“오라버니, 책 좀 잘 부탁드릴게요.”
메이어에게 책을 맡긴 에스타는 황급히 저택으로 돌아왔다.
자꾸만 손 틈새를 빠져나가는 치맛자락을 꽉 붙든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에스타가 숨을 헐떡이며 정문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이상할 정도로 싸늘해진 일 층에서 분주하던 사용인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택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어디 폭탄이라도 터진 듯 중앙 계단이 반쯤 내려앉아 있었고, 천장에 메달려 있던 샹들리에는 바닥에 떨어진 데다가, 천장엔 어마어마한 고드름이 맺혀 있었다.
곳곳에 서리가 껴 벽이 하얗게 덮인 걸 보니 별안간 제국에 겨울이 찾아온 것 같았다.
“삼 층에서 큰 소음이 터져 저희도 올라가 보려고 했으나….”
입김을 뿜으며 말끝을 흐린 하녀가 쳐다본 곳엔 엄청난 두께의 얼음이 삼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막고 있었다.
‘카이네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소행임을 깨달은 에스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주가 저택을 개박살 내다니! 원작에선 이런 얘기가 없었단 말이야!’
게다가 이런 빙벽이라니. 물이 없는 곳에서 이렇게 거대한 마력을 사용할 수는 없을 터였다.
‘정말로 각성한 걸까?’
그렇다면 왜?
의문이 뒤따랐지만 당장은 눈앞의 빙벽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작은 마님, 여기 계셨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얼마나 찾았다고요!”
집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나와 에스타의 몸을 살폈다.
“베일리 가문에 잠시 갔다 왔어요. 혹시 지금 카이네스가 방에 있나요?”
“네, 오늘 아침부터 저택에 계셨습니다.”
역시 카이네스였구나.
상황을 설명하던 집사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에스타는 불 마력을 갖고 있어서 추위를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사용인들은 전부 한여름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한기를 힘겹게 견디고 있었다.
“따로 나간다는 말씀이 없었으니 아직 안에 계실 겁니다.”
집사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집사의 말에 의하면, 저 빙벽 뒤에 카이네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저 얼음들이 카이네스를 위협하진 않겠지만, 거대한 마력을 사용했으니 카이네스가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저 얼음부터 빨리 치워야겠네요.”
사용인들은 난데없이 생긴 두꺼운 얼음벽을 휘둥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에스타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이 집 도련님이 사고 한번 단단히 쳤다. 이미 수십 명의 사람이 봤는데,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는 어려워 보였다.
“사람들을 시켜서 뜨거운 물을 부어야 할 것 같은데, 먼저 따뜻한 옷을 챙겨 입은 뒤 움직이세요. 이러다 다들 동상 걸리겠어요. 그리고 너무 위험한 짓은 하지 마세요. 여기서 더 사고가 커지면 안 되니까요.”
“네, 작은 마님.”
“그리고 사용인들은 입 단속해 두세요. 이 일이 저택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집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재빨리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공작가에서 오래 근무하는 사용인들은 어렴풋이 눈치챘는지 그다지 놀라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공작가에서 대를 걸쳐 내려오는 힘이었으니, 어쩌면 이미 몇몇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스타는 사용인들이 얼음을 녹일 동안 뒤뜰로 향했다.
카이네스의 집무실 창문이 이어진 곳이 바로 뒤뜰이었다.
“카이네스! 거기 있으면 대답 좀 해 줘!”
에스타는 목청껏 그를 불렀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 그의 신체 능력이라면 저곳에서 충분히 뛰어내렸을 법했지만, 에스타는 그가 기절하진 않았을지 계속 걱정되었다.
에스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다 부엌으로 뛰어가서는 하녀들과 같이 뜨거운 물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작은 마님! 저희가 하겠습니다!”
“그러다 몸 상하세요!”
하녀들이 만류했지만 에스타는 꿋꿋이 물을 퍼 날랐다.
“카이네스가 저기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손 놓고 있겠어. 돕게 해 줘.”
“작은 마님….”
에스타가 물에 젖은 소맷단을 대충 걷어 올린 뒤 양동이를 들고 앞장섰다.
‘제발, 녹아라!’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에스타가 물을 부을 때면 훨씬 빨리 얼음이 녹아내렸다.
물을 부어 얼음 중앙에 큰 구멍이 생겼을 때야, 장대처럼 길쭉한 봉을 가져와 지렛대처럼 단단히 받친 후에 얼음을 부쉈다.
“이제 됐어요!”
드디어 한 사람 정도는 지나갈 수 있을 틈이 생겼다.
에스타가 먼저 비집고 들어가려 하자 주변 하녀들이 일제히 말렸지만, 에스타는 멈추지 않았다.
“삼 층에 가서 확인만 하고 올게요!”
에스타는 카이네스가 있는지만 보고 오겠다고 소리친 뒤 계단 위로 뛰었다.
얼음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웠는데 에스타는 잘도 뛰어갔다. 그녀의 발이 닿는 부분은 금세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카이네스!”
에스타는 방문을 벌컥 열어 주변을 빠르게 확인했다. 이곳까지는 얼지 않았는지 바깥보단 그나마 온기가 느껴졌다.
카이네스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에스타는 삼 층 집무실로 향했다.
“카이네스! 여깄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새 빠져나갔나?’
카이네스가 없단 걸 확인하고 에스타는 안심의 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차가운 얼음이 승화되어 뿌연 수증기가 방 안 가득 퍼졌다.
의도 없이 능력을 써 버린 에스타가 주춤거리며 집무실을 벗어났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조심하자.’
갑자기 저택이 얼어 버린 것도 충분히 당황스러운 상황인데, 갑자기 녹으면 더한 혼란이 올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여름이었으니 이틀이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원목이 젖어서 보수는 해야겠지만.
카이네스가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저택을 정리하며 얌전히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람.’
카이네스가 걱정됐지만, 당장은 저택을 재정비하는 게 우선이었다.
에스타는 저택을 대략 정리하며 오늘 저녁이면 사라진 카이네스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 * *
페이시아 저택에 소속된 사람들은 별관에서 지내며 본관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얼음이 녹으며 전부 물이 된 탓에 저택이 전부 젖어 버렸고, 원상 복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정작 저택 주인인 페이시아 공작은 영지에서 돌아올 생각을 않았고, 카이네스는 저택에 잠시 돌아와 보수하는 내용을 잠깐 나누고는 일이 바쁘단 핑계로 다시 루이셀이 있는 호텔로 돌아갔다.
에스타는 카이네스를 기다렸지만, 며칠이 지나도 카이네스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집사와 하녀를 통해서 만나자는 얘기를 전했는데도 그는 귀신같이 모습을 감췄다. 누가 봐도 명백한 고의였다.
“외출 준비 좀 해 줘.”
에스타가 치아를 바드득 갈며 엘리에게 말했다.
‘그래. 보고 싶은 사람이 직접 가야지.’
에스타의 치장을 돕던 엘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작은 마님, 혹시 싸우러 가세요?”
“비슷하긴 해.”
며칠째 저택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카이네스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 오늘은 꼭 들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게다가 카이네스의 마력에 관한 것도 알지 못했으니까.
걱정이 반, 화가 반이었다.
에스타는 만반의 준비를 한 채 마차에 올랐다.
카이네스와 루이셀이 함께 지내고 있다는 호텔 앞에 도착하자, 루이셀이 호텔 로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에스타가 다소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도련님께서 만남을 거부하셨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왔다는 말을 제대로 전하셨나요?”
“확실히 전했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루이셀 덕분에 에스타는 금방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이로써 카이네스가 자신을 피한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에스타는 입술을 꽉 다물고 억지로 웃었다.
누가 봐도 화난 얼굴이었기에 루이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네스에게 전해 주세요. 다음에 만나면 확실히 설명해야 할 거라고.”
“네, 작은 마님.”
루이셀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에스타를 마중했다.
마부는 마부석으로 연결된 작은 창을 열어 왜 금방 다시 탔냐는 듯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페이시아 공작저로 돌아가.”
금세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여전히 의아했지만, 마부는 굳이 캐묻지 않고 창을 닫았다.
마차가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밖에서 마부가 ‘오늘은 날이 많이 덥네.’라며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부의 혼잣말을 증명하듯, 에스타는 자꾸만 열이 올랐다.
계속 자신을 무시하는 카이네스에게 화가 났다. 정확한 이유도 없이, 말도 없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구는 카이네스가 미웠다.
“제대로 말이나 했으면 기다리기라도 하지.”
그를 걱정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날 이후, 에스타는 더 이상 카이네스를 찾지 않았다. 그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저택을 보수하는 것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더욱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 * *
저택 중앙 계단 보수를 하기 위해 많은 인부들이 모인 가운데, 에스타가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인부들과 도안을 돌려 가며 본 이후, 계단의 세부적인 부분을 잡던 순간이었다.
어느 때보다 방정맞게 저택으로 뛰어 들어온 엘리가 에스타를 보자마자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작음 마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엘리, 지금 바쁜데 조금만 있다가 하면 안 될까?”
“작은 마님 제발요!”
엘리가 반쯤 사정하듯 굴자 에스타가 도면을 인부에게 건네곤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엘리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무슨 일인데?”
에스타가 묻자 엘리가 비밀 얘기라도 하듯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작은 마님! 들으셨어요?! 소공작 전하께서 아카데미에 입학하신대요!!”
“…뭐?”
“이번 가을에 소공작 전하께서 아카데미에 입학하신다고요!”
에스타는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이네스가 자신에게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자신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정도로 무가치한 사람이었는지, 관계가 나아졌다고 생각했던 건 자신만의 착각이었는지.
묻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지만 카이네스는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